11/23/2009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의 시기

우리는 세대주의 신학이건 개혁주의 신학이건 전 천년설이건 무 천년설이건, 성도들의 변화의 시기를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시기로 주장하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이 일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두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휴거와 변화의 시기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다.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강림하실 때, 그때까지 살아 있는 모든 성도들은 일곱째 대접 심판 직전에 하늘로 끌어 올리우는 공중휴거가 있을 것이다. 이 공중휴거는 그 직후에 일곱째 대접 심판으로 말미암는 불로 지구를 소멸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지시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공중에서 영접케 하시는 하나님의 기묘하신 섭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후에 이 땅에 창조된 새로운 그리스도의 왕국에 내려와 천년 동안의 축복된 생애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은 이처럼 성도들의 휴거 시에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신학이나 성경해석에서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변화한다는 드라마가 종말론의 필수적인 공식이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성도들을 공중으로 끌어 올린다는 휴거는 있어도 휴거될 때 성도들이 변화 받는다는 말은 없다.

그들은 이 변화란 말을 다른 성경구절에서 빌려다가 짜깁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 짜깁기가 제대로 된 짜깁기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빌려다 아무렇게나 짜깁기한 성경구절을 찾아 보기로 한다.

고전15:50-54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살전4장과 고전15장, 이 두 곳의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자연스레 해답이 나오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주 재림의 때에 일어날 일이요 후자의 경우는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로 이 두 사건의 계시의 시차는 천년왕국이 그 중간에 개재해 있는 천 년간이나 된다.

주 재림의 경우,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을 불지만, 마지막 부활의 경우는 그 나머지 모든 성도들을 살리는“마지막 나팔”을 분다. 이 나팔소리에 죽은 성도들은 살아나게 되고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 받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나팔을 부는 시기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그 시기를 말하며 이 시기는 천년왕국 이후에 백보좌 심판 때에 있게 된다.

이때 왜 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해야 하며 살아있는 모든 성도들은 변화 받아야 하나?“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때 일제히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때까지 천년왕국에서 혈과 육으로 살아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혈과 육을 벗고 변화 받은 새로운 몸을 입어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홀연한 변화를 통해 이 옷을 입고 신령한 몸을 가지고 영원한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맺는 말 : 우리는 과감히 무의미하고 무모한 아직까지의 부활의 논쟁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부활의 방향과 순서조차 제대로 정립해 놓지 못한 신학계를 탓하기에 앞서 성경에서 올바른 부활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 주님은 곧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주 재림의 소망을 가지려면 올바른 부활관을 가지고 이 부활과 변화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