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2010

신 구약 중간시대를 알아야 신약이 열립니다 2 – 신약에 등장하는 주요 직책들



헤롯왕? 분봉왕? 총독? 산헤드린 공의회?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파? 사두개파열심당엣센파?...

1) 헤롯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나타났던 대헤롯(Herod Great. B.C. 37-4)도 헤롯왕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님이 사역하시던 30세 어간에 있었던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 4- AD 39:대헤롯의 아들, 아켈라오 동생. BC 78년에 사망한 최초의 에돔 왕 안티파스와 이름은 같지만 4대째 내려온 때임)도 헤롯이라고 지칭합니다.

대헤롯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해서 알다시피 소위 헤롯가문을 유다에 튼튼히 으로 자리매김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에도 약 30년 이상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마치 남방 유다를 쳐들어온 애굽과 바벨론이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세워놓고 떠났던 것과 똑 같은 그런 식으로 된 왕이지요. 식민 백성은 유대인이요, 꼭뚝각시 왕은 에돔사람이요, 실권자는 로마인 셈입니다. 그는 BC 37-4년까지 유대를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건축도 시작했고, 여러 도시들을 세워 나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통치 말년에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있는 사건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인데, 어떻게 해서 얻은 유대인의 왕자리인데, 자기 말고 누군가 유대인의 왕이 난다니, 이 대단한 헤롯이 가만 있을 리가 없지요. 유아들을 다 살해하라는 명령까지 냈는데 그만 자기가 죽어버립니다


BC 4년 봄에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BC 4년이라고도 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일찍이 BC 5년 겨울로 잡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래서 이 대헤롯의 죽음이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계산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유대인의 왕예수께서 나타나시자마자, :“유대인의 왕대헤롯이 죽는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인(30)으로서 활동하시는 때는 더 이상 이 대헤롯 왕 때가 아닙니다. 그의 아들들이 다스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여럿이었다는 겁니다. 안티파스, 빌립, 아켈라오입니다. 누구 한 사람을 지명해서 왕을 잇게 했으면 우리도 안 복잡할텐데, 대헤롯은 아들 셋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유언을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데 그 쪼그만 땅을 또 조각조작 나눠 따로 다스리게 해 놨으니 우린 여간 골치 아픈게 아닙니다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요단 동편)을 줍니다. 빌립에게는 갈릴리 북동부 지역을 물려줍니다. 그리고 아켈라오에게는 유다, 사라미아, 이두매(에돔지역)의 통치권을 줍니다. 아켈라오에게 반을 주었고 나머지를 두 아들에게 준 셈입니다.

이렇게 나눠진 땅을 다스리던 왕들을 가리켜서 분봉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헤롯이 유언했다고 다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인가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분봉왕 ethnarch’ king’(대헤롯 같은)보다는 낮은 지위입니다. 한국말로는 똑 같은 분봉왕이지만 분봉왕 ethnarch’분봉왕 tetrarch’보다 높은 지위로 불리던 명칭입니다. 아켈라오에게는 ethnarch, 빌립에게는 tetrarch라는 명칭으로 허락합니다.

아켈리오 는 마태복음 2 22절에서 한번 성경에 언급됩니다. 이집트에 피난갔던 예수님의 가족이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지 않고 갈릴리로 올라가 살게 된 경위를 말해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이아 에돔직역을 분할받습니다. 유대지역은 아켈라오 영역이었습니다.

빌립 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은 주로 이방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데가볼리 지역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그가 세운 도시였습니다. 이것 역시 로마황제 가이사를 가리기 위해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이미 가이사랴라는 도시[건축광 아버지 대헤롯이 세웠음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체포된 후 로마에 재판 받으러 가기 전에 2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곳]가 지중해 연안 해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이름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북쪽의 헐몬산 자락에 있는 휴양도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셔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기도 하신 그 곳입니다.

헤롯 안티파스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던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 삼 년 중에 나오는 헤롯왕은 바로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향인 갈릴리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한 언급이 세 번 있습니다. 그는 헤롯 빌립(분봉왕 빌립은 아님, 다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한 헤롯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 사건을 질책합니다

결국은 이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장본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후 예수님의 활동이 활발해지지 죽었던 요한이 살아난 것 아닌가 싶어서 매우 초조해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9:7). 그리고 예수님을 매우 보고 싶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 헤롯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건축광이었습니다. 갈릴리에 디베랴라는 도시도 건설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나타났던 헤롯가문들은 그 후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동안에도 계속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 사도행전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다른 헤롯왕들이 나타나지요. 이 때 나타나는 헤롯왕가의 이름이 바로 가르립바입니다. 그들의 아버지 대헤롯의 형, 그러니까 그들의 삼촌들 가운데 파사엘이라고 하는사람의 혈통을 타고 내려온 다른 계열의 사람들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결국은 충이 먹어 죽은 헤롯왕(12)입니다. 처음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등장한 인물입니다.

그 후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올라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됩니다. A.D. 55년경에 이르면 갈릴리와 데가볼리,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며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A.D. 100년 경까지 다스립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것 아시지요? 이미 1, 2, 3차 선교여행을 다마치고 예루살렘에 헌금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된 얘기 말입니다

데사로니가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서, 로마서 편지를 이미 다 쓴 시점이지요. 바울은 자기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해서 일단 가이사랴 감옥에 억류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유대총독 관저가 있었다)에 있는 동안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었던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빌라도 다음에 나타난 총독). 

이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립바 2세가 가이사랴로 방문오는데 이때 바울이 그들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 유명한 바울의 개인 구원 간증이 이 아그립바 2세 앞에서 한 간증입니다(25-26). 아그립바 2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은 수 있을 뻔하였다”(26:28, 32)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2) 총독 - 방금 위에서도 총독이 등장했지만, 그럼 총독은 또 뭘까요? 로마지배 아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헤롯이 왕으로 있었고, 거기다가 또 유다자체에도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배경이 이다지도 복잡합니다.

보통 전쟁을 해서 나라를 빼앗으면 그 나라를 다스리기는 다스려야 하니까 누군가 통치자를 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통상 정복자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통치자(king, ethnarch, tetrarch)로 새로 세운 다음에, 그 사람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배울 때 애굽의 바로느고가 백성들이 세운 여호아하스는 잡아가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웠던 것 기억나시지요? 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여호야긴은 잡아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대힌 왕으로 세웠던 것 생각나시지요

그것처럼 자기 말 잘 듣는 왕을 만들어 놓고 원격조정하는 것이 보통 하는 식민정책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세울 왕이 없을 때는 본국에서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 사람을 총독이라고 불렀습니다. 포로시대 때 느헤미야는 총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빌라도 총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왜 분봉왕이 있었는데 또 총독도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런 연유입니다.

대헤롯이 아들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죽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중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와 에돔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이었는데 그만 정치를 잘 못했습니다. 너무 야만적인 독제정치를 했습니다. 가이사(아우구스투스)는 유화정책으로 다스리라 그랬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이 때 아켈라오는 2,000~3,000명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유대는(예루살렘 지역) 혼란해졌습니다. 폭동은 더 심하게 번져갔고 로마의 개입으로 진정됩니다. 유대지역 백성들은 이제 더 이상 헤롯가문의 통치를 못 받겠다고 종식기켜달라는 청원을 로마 가이사에게 합니다.

가이샤는 아켈라오를 로마로 소환했고, 고올(Gaul 프랑스)이라는 곳으로 추방시킵니다. 정치를 잘 못한 거지요. 그 이후부터 유대 예루살렘 지역만(갈릴리는 아닙니다. 분봉왕이 있습니다)은 분봉왕이 다스리지 않고 직접 로마의 직영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총독이 파견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헤롯의 아들, 분봉왕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지역은 첫 로마 총독 코포니우스(1)를 시작으로 해서 마르쿠스 얌비블루스(2), 아니우스 루푸스(3), 발레리우스 그라투스(4)를 거쳐 우리가 잘 아는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5, AD 26-36) 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총독입니다. 그러다가 바울 때에 가서 나타나는 총독이 위에서 얘기한 벨릭스와 베스도 이런 사람들입니다.

총독의 관저는 가이사랴(지중해변)에 있었는데 예수님을 재판했던 빌라도는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소동을 염려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관저에 와 있었고, 헤롯 안티파스도 같은 이유로 성 안에 자기 관저에 있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왔다갔다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은 로마총독들이 가이사랴에 머뭅니다. 거기 영체자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됐지만 가이사랴로 후송되었습니다.

3) 산헤드린공의회 황제나, 헤롯가문이나, 총독이나 그런 정복자들은 순수 유대인 공동체에서 볼 때는 적들입니다. 힘이 없어 당하고 있는 것이지 힘만 있다면 들고 일어나서 독립하고 싶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다보니 바로 이 순수 유대인 공동체 속에는 나름대로 그들을 대표하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라는 겁니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공의회라는 말이 시사해 주듯이 이것은 의회를 가리킵니다. 유대인 최고 자치 의결기관입니다

황제나, 헤롯이나, 총독 같은 외부세력 말고, 유대 공동체 속에서는 가장 높은 소위 정치기관이 바로 이 의회였습니다. 공식적인 주권은 비록 로마나 헤롯왕이 갖고 있었으나 산헤드린 공의회는 사법적 기능과 입법적 기능, 그리고 행정적 기능까지 갖고, 어느 선 까지는 자치적으로 정치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18:31)”라고 한 말에 나타난 법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예외는 이방인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죄를 범했을 때입니다. 물론 모든 법은 율법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공의회라는 것은 언제부터 있어왔는가? 우리는 이 공의회를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주 먼 옛날 모세시대 때 돕는 백부장, 오십부장 등이 있었지요? 그 사람들을 장로라고 불러왔습니다(27:1). 이들은 그 후 여호수아나 사사시대를 지나오면서도 계속해서 백성들의 대표로 유대사회에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장로들’, ‘귀인들’, ‘방백들이라는 이름으로 있어오다가 신약에서는 산헤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4) 데제사장 산헤드린이 유대인 자치세력으로서 최고의 기관인데 반해 한 개인으로서도 또 대장(?)이 있는 겁니다. 이 대장은 누구였을까요? 이 유대인 공동체는 신앙 공동체였기 때문에 과거 에스라 이래로 대제사장이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위치라고 볼 수 있는 직책이라면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대제사장이 산헤드린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종교당파(신학적 배경)로 말하자면 사두개파였습니다. 이렇게 외형적 전통으로 볼 때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대제사장이요, 백성들을 영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지, 사실은 로마나 헤롯이나 총독에 붙어서 자기의 권력을 즐기며 백성들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착취하는 세력으로 쉽게 타락하곤 했습니다.

잘하는 대제사장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라는 직함이 유대인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을 안 정복자들은 아예 이 대제사장까지도 자기네가 다루기 쉬운 사람들을 임명해 버리면 쉽다는 것을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론계열의 레위인이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을 임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데 눈이 밝은 사람들은 돈을 갖다주고 이 대제사장권을 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 안나스 같은 사람입니다. 물론 유대공동체 내에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남은 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숨어 있는 참 이스라엘, 경건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는 나다나엘, 시므온, 안나, 요셉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대제사장이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 유대 공동체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로 자처하지만 속으로는 결국 로마나 헤롯 가문과 결탁해서 그게 그거인 셈이 된 형국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성전에서 제물을 팔아서 돈을 버는 장사까지 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백성들을 대신해서 속죄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5) 서기관, 율법사, 랍비 팔레스타인 땅 본국에 사는 유대인들을 어쨌거나 이런 성전에라고 출입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온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바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율법을 배우고 유대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 모이게 된 장소를 가리켜 회당이라고 부릅니다. 외국 땅에서 유대정신을 잇게 하는 집회장소인 셈이지요

이 회당은 후에 팔레스타인 땅 안에도 수없이 많이 세워져 교육기관이 되었고, 그 후로 바울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 세워집니다. 회당에서 드린 것은 아니지만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교육을 한 것입니다. 회당은 이방 땅에서뿐만 아니라 고국에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도 세워졌습니다. 사실 이 운동은 원래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가 했던 일입니다.

에스라 이후 중간기를 지나오면서부터는 어떻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율법을 쉽게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해석하고 쉽게 풀어주는 서기관, 율법교하, 지혜교사, 랍비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즈음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성경을 본문으로 하고 설교를 하십니다.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풀어 해석해 주어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었습니다. 과거 모세 시절에 기록된 모세오경을 포로시대 후기에는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해석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2km’. ‘정결케 하는 규례로 손을 씻을 때는 팔꿈치가지 씻는다등등 율법을 연구하고, 명상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는 일들을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이 한 것입니다. 또 공적인 자료들을 기록하고 필사했던 사람들(왕하12:10)이 있었듯이 서기관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은 법률가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으며, 그 중 일부는 산헤드린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또 신학자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6) 바리새파(The Pharisees)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많이 예수님의 사역에 관계된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바리새파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명칭인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 말은 분리되다. 구별되다라는 의미를 갖도 있습니다. ‘바리새파라는 명칭이 분리된 자들과 관계된 말이라면, 마카비 가문의 거룩한 전쟁에 함께 참여한 전사들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를 거룩하게 생각하며 의식상 부정한 것을 엄격하게 구별했습니다. 정결 예식과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성들의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 그룹들은 엉터리라는 것을 백성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조세프스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가문을 욕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민중이라는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보다 종교적인 면에서 더 인정을 받는 그룹이었습니다

니고데모, 바울과 같은 바리새인도 있었던 점으로 보아 진지하게 율법을 연구하며 구약을 계승하려는 그룹임에 틀립없었습니다. 구약에서 흘러 내려오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이들을 통해 명맥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까지도 정통 유대인교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유대교의 핵심세력이 이들입니다. 사두개파 A.D. 70, 또 한번의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에 비하면 바리새파야말로 유대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7) 사두개파(The Sadducess) –사두개파는 유대교 안에서 제사장적 귀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종파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지주들입니다.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사독에서 유래된 것으로 봅니다. 사독은 다윗시대에 아비아달과 함께 제사장이었고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직의 원조라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카비 혁명을 전후로 해서 제사장 제도가 재정비되고 재조직될 때 사두개파가 하나의 당파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파와는 반대 입장을 취하며 경쟁관계에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8) 열심당(The Zsalots) – 열심당은 영어의 음역을 따라 셀롯인 시몬’(6:15)이라 표기된 것과 같이 셀롯당이라고도 합니다. 이 당파는 종교적 당파가 아닙니다. 열성적 민족주의 집단입니다. 이들은 마카비활동에 그 기원을 둡니다. 그런데 요세푸스 같은 역사가는 이들을 강도들’, ‘산적으로 불렀습니다. 맹렬한 반로마주의자면서 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기득권 세력자들에 대해서도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토라(모세율법)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합니다.

9) 엣센파(The Esseness) – 이밖에도 쿰란 공동체로 불리우는 엣센파가 있었습니다. 경건한 유대 공동체 중의 하나인데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문서들의 발견으로 이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들이 백성들과 접하는 대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들은 광야에 은둔하는 수도사적 성격을 가진 단체였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 엣센 공동체에 관계된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추정하기도 합니다. 종교 공동체로서 극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주로 거주했던 동굴 속에서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것이 사해사본입니다. 이 사본은 구약성경의 정확성을 증명하는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로 공헌을 합니다.

<어 성경이 읽어지네 중에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