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3-10절과 누가복음6:20-23절에서 이른바 산상수훈으로 알려진 이 부분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하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누가는 이보다 더 간결하게 기록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이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축복의 결과를 말씀하는 각 줄의 후반부를 읽으면,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이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모습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다시 오랫동안 기다려 온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하에 사는 축복을 경험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위로와 채우심을 경험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땅을 차지한다.
* 하나님의 백성은 용서받는다.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본다.
*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자녀로 인정받는다.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 안에서, 그분의 공급과 먹이심과 용서를 경험하며 사는 백성에 관한 아름다운 비전을 제시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롭거나 논쟁거리가 될 만한 무언가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미 수세대에 걸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성취된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새로우며, 논쟁의 씨앗이 된다. 그분은 먼 훗날 언젠가 받을 축복에 대해, 어떤 가상의 세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너희가 복을 받을 수 있다’가 아니라 ‘네가 복되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역사적 선언이다.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혜택을 누린다.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하는 방법에 관한 몇몇 이론이 유대인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좀 더 공들여 지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씻고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예수님을 성가시게 했다.
쿰란공동체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금욕적인 공동체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심당원은 억압에 항거하는 게릴라전을 선호했다. 이런 집단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할지 자신들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적어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을 방해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지 안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은 이 세가지 견해에 모두 반대하셨다. 바리새인의 율법 해석에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그분은 결코 수도사가 아니었고, 게다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도하셨다.
나는 산상수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의 접근으로만 이해했다(이제 와서 보니 그릇된 생각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의에 굶주리고, 마음이 청결해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해야 한다. 이런 영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더 잘 받을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누가복음의 산상수훈보다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더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이미 궁핍한 자들에게 가난하고, 배고프고, 비참하고, 미움 받으려 애쓰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나는 이제 더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으로 도덕적 교훈을 주시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분이 산상수훈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래 좀 더 구체적인 사항을 선언하셨다고 믿는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가 열릴 때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언하셨다. 어떤 사람들이 그 나라를 누리는 축복을 받을지 선포하셨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하늘을 날았듯이 예수님은 첫 비행 편에 대해 이미 선포하셨다. 누가 그 비행기에 탈 수 있을지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에서 자주 강조하신 위대한 역설을 선언하신다. 바로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겸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바른 행실이 하나님 사역을 부흥시킬 것이라는 말씀은 하지도 않으셨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결코 사람 손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자 도래한다.
예수님은 마치 물속에 던져진 그물처럼 은밀한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다. 하나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처럼 놀란 만한 성장을 보인다. 오랜 여행 끝에 돌아오는 주인처럼 예고 없이 갑자기 등장한다.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이웃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자비는 택하신 백성을 넘어 병든 수리아 적장과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 과부를 돕는 데까지 이른다. 하나님은 적합하지 않은 자들을 축복하신다.
만일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볼 수 있었다면, 이러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축복은 의인이나 부유한 자들에게 부어지지 않았다. 예수님의 축복은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아픈 자, 슬픈 자, 따돌림 받는 자, 예수님께 나아오려고 가족의 명예를 저버려야 했던 자들처럼 희망이 절실한 작고 평범한 사람에게 부어졌다. 예수의 사역을 통틀어 살펴보면, 그분이 죄인, 세리, 나환자와 같은 사람들을 축복하셨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의 옷을 입은 예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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