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3:4)
당대에 율법에 해박한 석이요 학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많이 배웠다는 니고데모는 세상적인 지식과 자신이 터득했다는 학문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데 걸림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신만만하게 내 뱉은 말입니다. 니고데모의 이 말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들의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진리는 세상적인 상식이나 전공한 학문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1. 생각을 멈추어 보세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계1: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한 사도가 귀양생활을 하던 밧모라는 섬에서 들려주는 그의 고백처럼, 갑자기 무한하신 존재 앞에 압도되어 모든 생각에 사라져버리고 고요한 침묵에 한없이 잠기는 순간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마음속에서 자신과 남을 끝없이 판단하며 떠들어대던 육신의 목소리가 조용해지고, 분석하며 헤아리기에 분주하던 생각이 자취를 감추고, 한없는 충족감에 잠겨 고요히 안식하는 그런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던 어느 날 진리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채 깊은 명상에 잠기는 순간 문득 무엇인가 감지하게 됩니다. 정당하다고 주장하던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워하며 꼬리를 감추는지를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아주 지혜롭다고 신뢰하던 우리 자신의 생각들이 얼마나 순화되지 못한 육신의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지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무한하신 존재의 빛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자신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2.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은 항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생각들로 아주 분주합니다. 생각을 멈춘 상태에 머무르는 순간은 아주 드물거나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것과 합쳐져 있지 않다면, 우리 생각들의 대부분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있지 않은 “자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완전히 죽지 않은 육신의 에고인 “나”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려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고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아무리 훌륭한 신앙의 가면을 쓰고 합리화시키며 나오더라도 그것은 결국 육신의 자아가 죽기 싫어서 안간힘을 쓰는 것뿐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구루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갈5:19~21).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생각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감정에 의해서 자주 바뀌기 쉽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신자들은 아직도 변화하지 못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니고데모처럼 항변하기도 합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을 네고데모처럼 항변합니다. 그 생각들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니고데모처럼 항변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릴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이 멈추어지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며 짓는 죄를 멈출 수 있습니다.
3. 생각을 꺼버리는 버튼
우리 마음속에는 생각을 꺼버리는 버튼이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육신에서 올라오는 소욕과 생각을 꺼버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버튼이 있습니다. 그 버튼을 사용하여 육신의 생각을 꺼버리는 법을 체득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들과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우리는 빨리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로 성령을 택하고 육신의 소욕과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을 꺼버리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약하게 하고 악하게 물들이는 것들로 마음이 번거로워지거나 그늘에 덮여지는 어두운 생각들로 우리의 마음이 캄캄해지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빨리 꺼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왜곡된 성격과 인격과 고집 센 아집에서부터 나오는 생각의 뿌리가 내리지 못하도록 빨리 생각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드리는 지속적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생각이 끝날 때만 평화가 오고 자신의 생각을 멈출 때에만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이 멈출 때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악한 상상과 생각을 물리치기 위한 지속적인 영혼의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교묘한 술수를 내거나 죄를 지으려는 유혹을 굳게 저항하며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켜주실 수 있는 분을 믿음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근원이신 예수님께 머물면서 그분의 마음이 내게 전달되도록 진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4. 남아 있는 안식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4:9~10)
성경은 육신의 생각과 육신의 일을 멈춘 사람들을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없어지는 경험, 육신의 소욕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험, 육신이 짓는 죄를 쉬는 경험을 하는 사람, 이것이 진정한 안식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해야 할 남아 있는 안식입니다.
항상 자신과 남을 정죄하며 떠들어 대는 비판의 목소리와 남을 끊임없이 원망하며 변명하는 생각을 성령의 버튼으로 조용히 꺼버리고 사랑과 용서의 속성에 함께 녹아들어가서 조용히 그분의 임재 속에 쉬는 경험을 체험하는 사람만이 남아있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만들어 놓으실 전능자의 품안에 안기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손을 펴서 전능자의 앞에 내려놓는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안식의 경험을 하는 사람만이 앞으로 다가오는 영원한 안식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에는 고요한 평화가 있습니다. 안식에 들어간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쳐오는 아름다운 빛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거듭난 사람의 성품의 일부분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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