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설교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청중이었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인은 모두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은 상당한 노력을 한 후에야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정반대의 경우를 경험한다.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도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전 세게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성경 읽는 일을 제외하고는 유대의 민족적 유산과 접촉이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종파로 시작해서 모든 종족과 문화적 정체성을 포괄하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런 변화에 예수님의 의도가 있는가? 어떤 이들은 현 기독교에 이스라엘을 위한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은 실종되고 오히려 예수님의 목적과 별로 관계없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종종 이 때문에 정죄를 느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길을 가셨다. 이 사실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그저 유대인들만을 이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훨씬 더 넓고 포괄적인 생각을 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고향 나사렛에서 있었던 한 매력적인 사건을 기록한다. 예수님은 고향의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읽으신 후 이사야의 예언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21)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읽으셨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 말씀은 예수님 사역의 여러 단면을 묘사한다. 예수님은 눈먼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유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이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정당화하고자 이 구절을 사용했다. 즉, 가난한 자와 죄수, 소경, 그리고 부패한 정부나 경제적 힘이 있는 자들에게 억눌린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사역 말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들의 이해는 옳다. 예수님이 선포한 나라가 도래하는 새로운 시대에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라면 어떠한 것이든지 옳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 건강, 평화를 가져오며, 특히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 눌린 자들을 위한 사역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하지만 문자적 의미를 따르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예수님의 명백한 의도를 간과하게 한다. 예수님의 정충은 그분의 뜻하신 바를 온전히 이해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포함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사실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를 위한 사역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사야 말씀을 앞뒤 문맥을 고려하여 읽는다면, 이것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것이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 것 중수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무릇 나 여호와는…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사61:4-8)
이사야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예수님도 물론 그렇게 하셨으리라) 이 예언의 말씀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이 포로로 잡혀갔고, 도성은 파괴되었고, 농토는 황폐해졌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종교를 모독하려는 의도로 성전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이사야는 이를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방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겼다고 해석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스스로 승리하셨다고 해석했다. 이사야는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사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실 거라고 거듭 예언했다.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도성이 재건되며 놀라운 축복의 시기가 시작되리라. 이것이 예수님이 읽으셨던 구절의 뜻이다.
이 구절에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모두 다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이들은 바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눈이 멀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을 사랑을 보지 못하고, 포로 됨과 죄악으로 인해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순간 이 포로 된 자들이 자유롭게 딜 거라는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오백 년 전 바벨론에서 돌아왔으나 여전히 포로인 채, 소경으로 궁핍한 채 억눌려 있다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청중, 전에 예수님의 이웃이었던 이 사람들이 바로 가난하고 눈멀고 포로 된 자라는 말씀이다. 죄악이 여전히 국가적 실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직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고 회복시키지도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듣는 그대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예언이 이루어져 해방이 찾아왔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복 주시려고 그들에게로 돌아오셨다.
그렇기에 “그들이 다 그를 증언”(눅4:22)하였다는 말씀은 놀랍지도 않다(‘증언하다’라는 헬라어는 ‘누구에 대해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도 있다-역주).
분명히 예수님의 고향에 가득한 흥분은 예수님이 눈먼 자들을 고치는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 흥분은 나라가 해방되고 재건되며, 다시 하나님 앞에 구별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은 고향에 돌아오셔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건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정확히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종교적 민족주의
하지만 예수님은 이웃의 암묵적인 동의에 반하는 이질적인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셨다. 위대한 선지자요, 이스라엘의 영웅인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사렛 사람들이 전에는 들어 보지 못한 말로 이들의 사역을 묘사한다. 이스라엘이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런데 굶어 죽어가는 이스라엘 과부의 집은 모두 지나치게 하고, 한 이방인 과부를 돌보며 그와 함께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스라엘의 나환자는 내버려 두고, 엘리사에게 적국의 장군을 고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과거의 경험하여 알고 기대하는 대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발언은 이웃을 몹시 화나게 했고, 그들은 바로 회당에서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 전에는 이 장면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런 살기등등한 분노의 순간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2001년9월11일 이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살기등등한 분노가 내게 더 가까이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나사렛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광경을 생각해 보라.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다니는 모스크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는 고향 땅, 팔레스타인의 꿈이 실현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선언한다. 알라가 은총과 축복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이 계획이 실현될 거라고 코란에 근거해 입증한다고 가정하자. 청중은 과연 그 메시지를 좋아할까? 아마 그 이슬람 종교 지도자는 암살될 것이다….
인종적, 종교적 적개심이 맹렬히 급증하는 곳에서 이런 설교를 한다면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랬듯, 분노를 유발할 것이다. 심지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종교적 편협
예수님의 설교를 이해하려면 거룩한 땅 이스라엘이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고요한 곳이고 예수님이 거기서 평화로운 농부들과 어울려 하프 반주에 맞춰 사랑 노래를 부르셨다는 식의 몽상을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아마 당시 팔레스타인은 못해도 지금만큼이나 고요했을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억압받았고 많은 수가 이에 분노했다. 어떤 사람은 살인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극단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들로 여겼다. 그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미움과 경멸이 유대인들에게 무능한 광신자요 끊임없이 다투기를 즐기는 자들로 보았다. 로마의 지배가 잔혹하게 효과적이었고 효과적으로 잔혹했기에 유대인은 이를 증오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신 그때에도, 폭동과 민란이 늘 있었다.
예수님은 거의 배타적일 정도로 유대인들에게만 설교했다. 하지만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성경이 늘 말씀해 온 대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시는 것을 보고라고 촉구했다. 게다가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복음을 놓칠 수도 있다는 구약의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배타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유대인에게만 설교했지만,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놀란 만큼 좋은 소식,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소식을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경건 문제가 아닌, 통치권 변동의 문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말미암아 가족이 갈라서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핍박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이 메시지는 사실로 확증된다. 가족이 갈라서고 제자들은 살해당했다. 그분의 운동이 끝날 때까지(그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백만의 사람이 예수님의 메시지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평화의 왕’이라 불린다. 중동평화조약을 생각해 보라. 폭력이 현존하는 가운데 평화협정이 이루어져 그 영향력이 적군에까지 미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 고향 사람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도 나사렛 사람들에게 그들이 미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말했다.
<유대인의 옷을 입은 예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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