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선지자는 반드시 성령님이 아닌 다른 모든 도움을 끊어야만 한다. 심지어 친구관계조차 덫이 되고 그의 듣기를 현혹할 수가 있다. 친척들에 대한 충성이 듣기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애국심과 애향심이 걸림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매국노라고 부르면서 가죽채찍과 말로 빈정거릴 때 예레미야가 어떻게 느껴야만 했을지 생각해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도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 같이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렘21:8-10)
엘리사는 자신이 주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돌아서지 못하도록 그의 소들과 멍에, 쟁기를 불살랐다. 예수님은 훨씬 깊은 단절로 부르신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이 젊은 남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머무르며 아비를 장사지내는 자식의 의무를 다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런 다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유롭게 집을 떠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은 가족의 연줄을 끊으신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다 되지 못하고”(눅14:26)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단어만큼이나 많은 다양한 뜻으로 사용된다. 사랑의 주님께서 제정신으로 우리에게 미워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 이 문맥에서 ‘미워하다’는 자유를 베어버리고, 계속되는 육적인 영향력을 미워하라는 의미이다. 우리의 성격과 인격, 그리고 혼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다른 친척들과 친구들, 가계와 국적, 인종과 문화의 한복판에서 형성되었다. 이 모두는 죄로 병들었으나, 외관상 유익해 보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원자로 영접할 때, 그것은 옛 자궁에서 죽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의 새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탯줄을 잘라내지 못한다면, 모든 방식들, 동기들, 충성, 소유물, 질투, 두려움, 육적인 사랑-이 모든 내면의 충동들-이 거의 점검받지 않은 채로, 선한 것처럼 가려져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 생명 안으로 들어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에 대하여서도 죽는다. 우리는 우리이며 우리였던 모든 것에 대해 죽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과거-모든 친적들, 선생들, 인종 그리고 문화-를 끊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사랑의 관계에 여전히 계시고, 아내와 자녀들과 남편의 사랑에도 여전히 계신다.
이제 쟁점은 사랑하기를 누가 할 것이냐 그리고 어떤 성품을 통해서 할 것이냐이다. 주께서 그분의 성품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옛 방식 속에 우리의 죽지 않은 자기가 계속 존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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