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2010

한가지 목적: 그리스도의 충만을 드러냄

한 단체의 가치는 내세우는 주장이나 기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단체 안에서 어떠한 질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나오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롭고 신선한 기름부으심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예비해 주셨는지 모르는 채로 갈등해 온분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주 극적인 방법으로 당신에게 얼마나 주님이 필요한 분인지 가르쳐 주시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셨지만 외적 축복의 형태 뿐 아니라 십자가의 방법으로도 가까이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당신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당신은 이것을 기뻐해 왔습니다.

동시에 옛날에 주님이 축복해 주셨던 많은 생각과 계획이 지금은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이 고수했던 기독교 주제들이나 교회의 행정 같은 것이 더욱 단순해지고 더욱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독교만으로 축소되었습니다. 당신은 이제 예수님을 알기만을 소원하게 되었소, 당신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영혼은 고양되었습니다.

겪어 온 변화 속에서 당신은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는 것이 목표가 되었고, 삶 속에 예수님의 온유와 권위와 사랑이 나타나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나타내지 않는 어떤 프로그램이나 교회 활동도 그것이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없는 죽은 행위에 불과함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당신에게 새롭고 신선한 기름 부으심을 예비하신 증거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이 사는 도시를 더럽히는 마귀의 요새들(stronghold)을 부수어 버리실 것이며, 교회에 거룩함을 불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까, 그리스도교입니까?
우리는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하나님 대신 교리를 채워 놓았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 대신에 안내서를 쥐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순복음파인지 침례교파인지 어느 교회의 배경에서 나왔는지 식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교회가 특정한 전통을 발전시켜 온 것 같고, 그 중 어떤 것은 그리스도께 단순히 순결하게 헌신해야 하는 진리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 하게 되면 금방 그들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는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고,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왕국의 시민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서 열정적으로 오직 주 예수님의 영과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왕국의 거룩한 기준에 도달하도록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우리의 목표나 초점이 되지 않을 때 장래에 미혹될 여지가 많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신 일을 보십시오. 겨우 3년 반 동안에 평범한 남자들과 여자들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담대한 제자들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들은 고난에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고, 희생이 있다고 뒤로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보통 사람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덧입혀져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자를 고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람을 변화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3년 반 동안 희석되지 않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속에 만들어 내셨던 것과 같은 것을 우리 안에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다른 점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안 하시는가 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어떤 분은 그건 2천년 전의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그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음성도 듣고 기적도 옆에서 보지 않았냐고요? 그 당시 예수님을 통하여 일하시던 그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늙거나 약해지거나 변절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쏟아 부으십니다. 예수님께서 1세기에 하셨던 그 말씀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움직입니다’(4:12). 그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28:20)? 예수님은 동일하십니다. 성령께서도 임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적용됩니다. 우리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2천년 전 사람들 안에 그분의 왕국을 세우셨던 그 영원하신 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히 같은 일을 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예수님을 희석하거나 제한하지 않아야 하는 것뿐입니다. 그분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이나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뿐입니다.

교회 행정이나 지엽적인 교리로 논쟁한다면, 어떤 사람은 목사를 찾고 어떤 사람은 장로를 찾고 또 어떤 사람은 제직회가 아니면 조금도 움직이려하지 않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것을 보지 못하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하는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을 키우시지 않습니다. 종들을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역자가 아닌 종이 되어야 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교회를 회복하시는 것을 보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지도력의 형태는 단순합니다. 즉 지도자는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심히 있습니까? 교회에 대한 관심도 행사 중심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모습을 지니려고 애써 노력하는 성도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진심으로 그분을 추구하기만 하면 교회의 형태야 어떠하든지 그 모임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순절 전에 하나님께서는 단지 120명의 작은 다락방 교회 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도 선지자와 교사들이 함께 모여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13:1). 마틴 루터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 가지셨던 모든 것은 불만을 느꼈던 한 수도사였지만, 그 역시 하나님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모든 부흥을 일으키실 때 평범한 사람들을 사용하였지만, 공통점은 그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제일로 구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께 외적 형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앞에 어떤 마음의 자세로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목적 있는 필사적 추구
우리는 교회의 행정이나 절차 등에 대해 말하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때는 조직적으로보다는 형태 없이 빈 것으로시작하십니다. 지하실이나 다락방에 모여서 필사적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성령께서 은혜로 그들을 비워 놓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만드십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등을 모두 내놓고 끈질기게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우셨던 것처럼 그들도 모든 특권과 안락을 버리고 그분의 형태를, 종의 형태를 취합니다(2:7).

그리고 그들의 무력한 것을 그분 앞에 가지고 옵니다. 진정으로 비어 있을 때 진정한 충만함이 올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그들은 자신의 영적 빈곤이 하나님의 선물로써 그분의 왕국에 대한 준비임을 깨닫습니다(5:3; 3:17).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음이 더욱 크게 느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커져 가지 않던가요?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사람들은 새 부대로서, 깨끗해지고 비워져서 새로운 술로 더욱 늘어날 수 있는 그릇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닮아 그리스도의 내적 충만함으로 부풉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성령의 열매와 능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할 때 틀에 박히고 굳어져 있어서는 안 되며 정해진 형식 없이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찾는 열정이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 실제로 형성되기까지 만족하지 않는(4:19)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이나 행정을 고집하지 맙시다. 요는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복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는가 입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찾겠습니까?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종교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속에서 교회 지도자로서 또는 중보기도하는 자로서의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파를 다른 교파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분 안에 거한다면, ‘그분이 행하신 대로 행할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이 인격이 아니라 종교로 되어 버린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1세기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었고 예수님의 영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단순했지만 말할 수 없이 위대했고 능력이 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 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대로 행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집을 세우는 데 필요한 요구 사항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만이 세워지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합니까? 바른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봅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4:12).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증과 아들의 권위를 실제로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목표-그것이 우리의 목표이기도 해야 하는데-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방식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셨던 기도와 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고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보다 낮은 기준과 타협할 여기가 없으며 더구나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에 불순종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히 예수님의 말씀이기 선포되고 예수님의 영이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는 곳에 예수님의 삶과 생명이 나타남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금의 목표, 평생의 목표가 되게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충만함으로 교회에 나타나심을 꼭 봅시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 교리나 행정을 앞세웠던 것을 용서해 주소서. 잘못된 종교적 전등이 끼쳤던 영향력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소서. 지금 당장에라도 주님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을 허락해 주소서. 주님만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 LORD]/프랜시스 프랜지팬/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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