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2010

성령과 회개- 토마스 왓슨


사도 바울을 더둘로에게 우리가 보니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소요케 하는자요’(24: 5)라는 선동죄로 거짓되이 고소를 당하였는데, 사도행전 26장에서 그는 베스도와 아그립바 앞에서 자기 자신에 관한 변호를 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웅변가임을 보여준다. 먼저 그는 왕에게 몸짓으로 호소했는데, 웅변가들의 관습이 그렇듯이 자기 손을 저으며 말했다. 또한 그의 연설 양식을 보면 아그립봐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다"(26:2)라고 하였다그리고 나서 바울은 3가지 일을 논하는데, 이그립바 왕을 거의 회심시키다시피 했을 만큼 깊이 있는 수사학적 말투로 한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회심 전의 생활양식에 관해 말하기를,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5)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거듭나기 전에는 전통에 열심을 내었으며, 그의 거짓된 열심의 불이 어찌나 뜨러웠던지 가지 앞에 방해거리가 되는 모든 사람을 태울 정도여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10)라고 하였다.

둘째로 그는 자기의 회심의 양식에 관해 말하기를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밝은 빛이”(13) 있었다고 하였다. 빛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신 몸으로부터 비추어진 것이었다. 그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였다. 몸에는 상퍼를 입으시면서, 머리는 하늘나라에 두신 외치셨던 것이다. 빛과 목소리에 압도된 바울은 땅에 엎드러졌다.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4-15). 바울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났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모든 신념은 사라졌고 그는 자기의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의 원줄기에 접목시키게 되었다.

셋째로 그는 회심 자신의 생활양식에 관해 말한다. 전에 박해자였던 그가 이제는 전도자가 되었다. “일어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러 함이니”(16). 택한 그릇바울이 구원의 역사하심을 받았을 그는 이전에 해를 끼진 것만큼 선을 행하는 열심을 다하였다. 그는 전에는 성도들을 핍박하여 죽이는 이을 하였으나 이제는 죄인들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처음에 그를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내셨고 후에는 그의 사명을 확장시켜 이방인들에게까지 전도하게 하셨다. 그가 전도한 제목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20) 선전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무게 있고 탁월한 주제인가!

나는 믿음이 먼저냐 회개가 먼저냐 우선순위를 놓고 논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회개는 먼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나는 믿음의 씨가 마음속에 먼저 역사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불타는 양초를 안에 들여올 빛이 먼저 나타나지만 양초가 빛보다 먼저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먼저 볼지라도 믿음의 시작은 전에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회개 전에 마음속에 씨눈으로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유는 회개는 은혜이므로 살아 있는 사람에 의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떻게 영혼이 살겠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0:38) 하였다. 그러므로 참회자의 마음속에는 먼저 얼마간의 믿음의 씨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죽은 회개이고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먼저건 회개가 먼저건 회개는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에 회개 없이는 구원받을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바울은 파선당했을 널빤지와 깨어진 조각에 의지하여 해안까지 해엄쳐 갔다(27:44).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파선을 당했는데 회개는 파선당한 후에 하늘나라로 헤엄쳐 가도록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널빤지이다.

엄숙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도 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져 있는 중요한 의무이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 하였고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없이함을 받으라”(3:19) 하였다. 너희 악함을 회개하고’(8:22)라고 하였다.

증인들의 입에서 진리는 확증되고 있다. 회개는 토대 역할을 하는 은혜이기에, “회개함과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6:1-2)라고 하였다.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지 않는 종교는 반드시 땅에 무너지고 만다.

회개는 복음 아래서 요구되는 은혜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율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설교는, 아니 그의 설교의 마디는 회개’(4:17)였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실 때에 남겨놓으신 고별사는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24;47)라는 것이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6:12).

회개는 순수한 복음적 은혜이다. 행위의 언약은 아무런 회개도 용납하지 않았고, 거기서는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회개는 복음에 의해 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매입하신 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율법은 인격적인, 완전한 그리고 항구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율법은 이에 미치지 못했던 모든 사람을 저주하였기에,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내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하였다. 온갖 일을 행하지 않는 자는 회개할 지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저주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개는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빛을 보게 교리이다.

그러면 회개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첫째, 부분적으로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저희가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2:3)라고 하였다. 설교한 말씀은 회개를 달성하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구이다. 이것은 망치와 불에 비유되었는데(23:29), 하나는 마음을 녹이는 것이다. 그러한 효능을 가진 말씀을 분배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그리고 하늘나라의 빛을 꺼버린 사람들은 얼마나 지옥을 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까!

둘째,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직자들은 피리와 풍금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말씀을 효과 있게 만드는 것은 그들 속에서 호흡하시는 성령이니, “베드로가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10:44)라고 하였다. 성령은 말씀 안에서 조명하시고 회심시키신다.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실 마음은 눈물로 녹는 것이기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니 그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12;10)이라고 하였다.

말씀이 얼마나 다양한 효과를 사람들에게 끼치는가 생각해보면 놀랍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 요나와 같아서, 그들의 마음이 연해져 눈물을 흘리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 음악에 감동받지 못하듯 설교에 감동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에 의해 더욱 선해지고 어떤 사람들은 더욱 악해진다.

포도에 단맛을 들게 하는 동일한 흙이 쑥에는 쓴맛을 들게 하는 것처럼 말씀이 사람의 양심에는 감동을 주지만 다른 사람의 양심에는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받지 못했다(요일2:20).

아아, 이슬이 만나와 함께 내리도록,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동행 동사하시도록 기도하라. 율법의 병거가 있어도 하나님의 성령이 병거에 가담하지 않으신다면 이것이 우리를 하늘나라도 데려가지 못할 것이다(8: 29)

<회개/토마스 왓슨/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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