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화 훈련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우리의 정성이요 마음이며 훈련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은사가 훈련으로 받느냐 배워서 되느냐 하는 편견과 고집을 가지는 사람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은사의 개념도 모르는 사람의 옹졸한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팍하고 굳어진 심령은 결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심령으로는 맛보지 못 할 것이요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신앙 인으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려고 하다가 마실 물이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하는 경우 예배 중에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처다 보면서 이것을 마음의 눈짓으로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나의 사모는 이를 즉각적으로 헤아리고 대처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심령으로 사모와 통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부부간에는 말없이 그 심령을 서로가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서로가 교제를 나누고 심령을 통하고 살았기 때문에 서로가 심령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관계입니다.
내주 하시는 성령사역에 민감해야 심령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심령이 깨닫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이러한 민감한 심령은 알아차립니다.
영적으로 결단하지 않고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게 되면 심령이 부담을 느끼고 짐을 지게 됩니다 이것을 또 무시하고 계속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강행을 하게 되면 양심이 침소를 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때 한 두 번 이러한 부담이나 느낌을 무시하게 되면 영적 지각은 또 둔하여 집니다 깨닫는 것도 둔하여지고 느끼는 것도 둔하여지고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지각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게 되고 이러한 영적인 지각을 통하여 신령한 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심령으로 아는 경험적인 지식이나 영적 지각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느끼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지 이성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원리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구약의 원리처럼 돌비나 양피지나 종이에 새기지 아니하고 성도들의 육의 심비에 새겼다고 합니다.
(고후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롬2: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도 심령이 둔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 나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반드시 말씀과 성령은 양쪽 수레바퀴와 같아서 함께 굴러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과 심령의 영역은 다르기 때문에 심령으로 섬기는 것과 우리 생각으로 섬기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서 작용합니다 좀더 깊이는 잠재 의식에 영역에서 역사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씨앗이 잠재의식의 영역 넘어 영의 영역에 깊이 심어지고 이 말씀이 다시 성령의 기름 부음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 다시 흘러나와야 하며 성령의 깊은 감동의 역사가 내 마음의 영역에 부어지고 우리의 이성이 다시 이를 해석하고 깨달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안되고 말씀을 실생활의 경험적인 차원에서 심령이 이해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설명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영역에서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이 바로 성령의 신령한 기름부음의 사역이요 이러한 기름부음의 현상이 우리 심령에 부어지는 것들이 믿음의 현상이요 지혜의 말씀이요 지식의 말씀이요 통변이요 예언의 말씀이요 능력이요 병고치는 은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령한 역사가 일어나도 말씀이 없으면 안됩니다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는 비유에서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야하는 것입니다 심어지지 않은 말씀이 나올 때는 신령한 사역이라도 이는 사단이나 귀신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례).중이 목사 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전혀 예수를 대적하는 중의 입장에 있으면서 어떤 목사가 전도하러 왔다가 자신으로부터 성경강해를 8시간이나 듣다가 전도를 포기하고 돌아갔는데 당시의 이 중은 성경을 한번도 읽은 적이 없지만 성경을 꿰둟어 알고 있었고 이 전도하려고 온 목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조차 미리 알고 있는 신령한 능력이 있었기에 이 목사님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어떻게 말하려는지 조차 훤히 알고 대화를 하니 께임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했습니다.
나중에 예수 믿고 목사가 된 후에 다시 이 목사님을 만났는데 과거처럼 될 수가 없었고 전혀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씀은 영적인 원리를 터득하게 되고 이 영적인 원리가 우리 심령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길잡이는 되지만 우리의 생각영역에서 작용하는 이 말씀만으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부족합니다.
깊은 영의 영역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우리가 깨닫게 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그러므로 성경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오게 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이렇게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내 중심인 참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신의 생각이나 형식적이거나 율법적인 것을 의미하지 아니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령으로 섬기(예배)라는 말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내적 역사가 있어 성령에 깊이 사로잡힌 심령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성령은 우리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며 우리의 깊은 내적인 심령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느끼고 인식하며 받아드리어 그를 대접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훈련이 되어 육성이 죽고 영적인 심령이 된 사람의 이러한 심령은 곧 율법이 따로 없고 선지자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성령)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성령)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9/30/2009
세계 영적 도해
세계 영적 도해
하나님의 사정
세상에는 무수한 신이 있지만 참 신을 찾아내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이 자신을 경배하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능력(power)이고 다음은 착한 성품으로 이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춘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 애굽에서 그의 백성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모습은 그분의 능력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고, 그 백성을 사랑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지 충분히 맛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허용하셨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건 우리의 수준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반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시기에 에덴에서 쫒아 내실 때도 저주가 아닌 구원 얻을 방법을 즉각적으로 약속하시고, 뱀을 향하여서는 즉각적으로 저주를 선포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다. 눈물날 정도로 놀랍고 놀라운 사실 아닌가!! 또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고, 성도의 권세를 회복시키셨다.
사단의 세계경영 가인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가인을 최초로 살인자로 만든 사단의 수법은 늘 동일하다. 첫째는 시기하게 하고 다음은 하나님께 불평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범죄케 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지만 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으므로 홀로 서서 두려움으로 인해 처음 한 일이 성(현대어로 도시)를 쌓아 다시금 인류의 악의 역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가인은 도시문명을 건설하였고 여기서부터 인류문명이 시작되어 후에 바벨문명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세계영적 전쟁의 핵심주제가 문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벨 문명을 대적하기 위해 문명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언어를 흩으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하나님은 이 바벨문명을 심각하게 보시고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경영에 돌입하셨는데 그 방법이 사람을통해 하시는 것이였다. 가장 살기좋은 곳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고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라는 약속과 축복을 하시고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전략적 방법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시험을 받고 통과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의 모형은 첫째 경제, 둘째 종교권력, 셋째 사회정치권력으로 나타났는데 이 세 가지 권력이 고대 바벨론 이후에 형성된 고대 신들의 권력으로 문명의 중심에 있었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명의 중심에서 일하시지 않고 낮은 곳에 임했고, 모세도 광야 40년의 시간을 갖는. 즉 history maker는 문명의 중심으로 가지 않고 변방으로 간다는 것이다. 세계문명의 힘을 비웃듯이 주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유유히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세계영적전쟁 다니엘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대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지식 정보시대이고 양과 염소가 확실히구별되며, 인생은 혼동 속에 있어 지혜자를 찾게 되고 무서운 속도로 세계는 통합되어져 점점 666시스템 통제 체제로 접어들게 되는 시대는 말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막강한 힘으로 지배해 가는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망각하고 미시적으로 활동하는 잡신들이나 동네 귀신들과 일상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그런 괴롭힘은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가장 큰 세력이 세계관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전쟁은 세계관과의 전쟁이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사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팍스 아메리카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자유주의가 활기를 치게 되고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미국 단독 지배체제가 되었고 세계 시장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번영을 위해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보고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전쟁과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분쟁과 평화를 막는 방법이 지구촌의 다양한 종교적, 민족적 가치를 없애고 하나의 가치로 세계를 통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모든 사람들도 동의할 만한 “자유”라는 것이고 곧 자유주의 세계지배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엘리트들의 세계비전이다.
세계화의 음모 미국 엘리트들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기술과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추진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세계의 서구화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능력지상주의를 만들고 양육강식의 시대로 약자를 같이 살 동반자로 보기 보다는 사회적 경쟁력을 저해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만물의 상품화라는 가치를 두고 자유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 세계를 자유롭고 개방된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강자의 무절제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빈라덴과 무슬림 전사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서구의 이러한 타락상에 대해 교육시켜왔고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지배를 받는 것이 큰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성경은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고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를 받고,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음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무참히 단절되고 파괴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음녀가 자신을 숨기며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도고 하자. 이 음녀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진원지인 에게해에서 세력화되기 시작해서 바벨론 앗수르 문명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애굽 문명을 건설했던 여신 이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애굽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 여신은 앗수르(앗시리아)지역으로 이동한 다음 새로운 문명을 이루는데 그 중심도시가 호수위의 여신, 물위의 여신의 뜻을 지닌 니느웨 이다. 그리고 요시아 시대에 아세라 여신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지중해로 넘어와 시벨라 연신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르데미스(아테네) 여신으로 계속 변한다. 이 여신의 공통된 특징은 자유와 풍요의 여신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적 뿌리이며 원조이다. 다음은 다이아나 여신으로 변신하고 또 다른 기묘한 전략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여신으로 둔갑한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마리아는 자유의 여신으로 다시 부활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시스 여신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이 그의 첫째 아들 호루스 탄생일이고, 그리스 기독교 정교의 예수님의 탄생일을 1월 6일로 하는데 그날은 둘째 아들 아이온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문명적 맥락에서 세계를 영적으로 도해하지 않고는 잘 잡히지 않는 가려진 실체이다. 이러한 음녀는 신학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지성사회를 공략하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무기로 사용하며, 이러한 이유로 음녀는 현재 가장 강력한 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경제권력으로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변방으로 달리며 신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룰 주님의 위대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끝까지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함으로 종교권력에서 자유해져 경제권력 없이도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거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지혜로운 5처녀와 같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통찰력 있게 이 시대를 바라보며 깨어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신이 있지만 참 신을 찾아내는 방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이 자신을 경배하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첫 번째 조건이 능력(power)이고 다음은 착한 성품으로 이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춘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 애굽에서 그의 백성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모습은 그분의 능력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고, 그 백성을 사랑하고 계심을 증거한다. 성경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지 충분히 맛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허용하셨을까?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건 우리의 수준으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반박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정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시기에 에덴에서 쫒아 내실 때도 저주가 아닌 구원 얻을 방법을 즉각적으로 약속하시고, 뱀을 향하여서는 즉각적으로 저주를 선포한다. 그리고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통해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다. 눈물날 정도로 놀랍고 놀라운 사실 아닌가!! 또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셨고, 성도의 권세를 회복시키셨다.
사단의 세계경영 가인을 동생 아벨을 죽이는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가인을 최초로 살인자로 만든 사단의 수법은 늘 동일하다. 첫째는 시기하게 하고 다음은 하나님께 불평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사람에게 범죄케 한다. 하나님은 가인을 용서하지만 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믿지도 않으므로 홀로 서서 두려움으로 인해 처음 한 일이 성(현대어로 도시)를 쌓아 다시금 인류의 악의 역사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가인은 도시문명을 건설하였고 여기서부터 인류문명이 시작되어 후에 바벨문명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세계영적 전쟁의 핵심주제가 문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바벨 문명을 대적하기 위해 문명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언어를 흩으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세계경영 하나님은 이 바벨문명을 심각하게 보시고 보다 적극적으로 세계경영에 돌입하셨는데 그 방법이 사람을통해 하시는 것이였다. 가장 살기좋은 곳에 살았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고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라는 약속과 축복을 하시고 이 놀라운 축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세계경영의 전략적 방법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시험을 받고 통과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시험의 모형은 첫째 경제, 둘째 종교권력, 셋째 사회정치권력으로 나타났는데 이 세 가지 권력이 고대 바벨론 이후에 형성된 고대 신들의 권력으로 문명의 중심에 있었던 것들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문명의 중심에서 일하시지 않고 낮은 곳에 임했고, 모세도 광야 40년의 시간을 갖는. 즉 history maker는 문명의 중심으로 가지 않고 변방으로 간다는 것이다. 세계문명의 힘을 비웃듯이 주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유유히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이러한 위대한 믿음의 사람,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세계영적전쟁 다니엘에서 말하는 마지막 시대는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지식 정보시대이고 양과 염소가 확실히구별되며, 인생은 혼동 속에 있어 지혜자를 찾게 되고 무서운 속도로 세계는 통합되어져 점점 666시스템 통제 체제로 접어들게 되는 시대는 말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를 막강한 힘으로 지배해 가는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망각하고 미시적으로 활동하는 잡신들이나 동네 귀신들과 일상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그런 괴롭힘은 분명히 있지만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가장 큰 세력이 세계관임을 알아야 한다. 영적전쟁은 세계관과의 전쟁이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자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높아진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사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팍스 아메리카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자유주의가 활기를 치게 되고 팍스 아메리카 시대가 도래하게 되어 미국 단독 지배체제가 되었고 세계 시장 경제체제는 자본주의 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번영을 위해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보고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전쟁과 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분쟁과 평화를 막는 방법이 지구촌의 다양한 종교적, 민족적 가치를 없애고 하나의 가치로 세계를 통합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나의 가치로 통합하기 위해 내세운 것이 모든 사람들도 동의할 만한 “자유”라는 것이고 곧 자유주의 세계지배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엘리트들의 세계비전이다.
세계화의 음모 미국 엘리트들이 추진하는 세계화는 기술과 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추진세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세계의 서구화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것들은 능력지상주의를 만들고 양육강식의 시대로 약자를 같이 살 동반자로 보기 보다는 사회적 경쟁력을 저해하는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는 만물의 상품화라는 가치를 두고 자유주의라는 토양에서 자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 세계를 자유롭고 개방된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강자의 무절제한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빈라덴과 무슬림 전사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서구의 이러한 타락상에 대해 교육시켜왔고 서구자본주의 문명의 지배를 받는 것이 큰 재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에는 한계가 있고 이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 성경은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변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고 하나님의 간섭과 통제를 받고, 말씀의 권고를 받아야 한다.
음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지배 하에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는 무참히 단절되고 파괴되었다. 여기서 어떻게 음녀가 자신을 숨기며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도고 하자. 이 음녀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진원지인 에게해에서 세력화되기 시작해서 바벨론 앗수르 문명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애굽 문명을 건설했던 여신 이시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애굽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자 이 여신은 앗수르(앗시리아)지역으로 이동한 다음 새로운 문명을 이루는데 그 중심도시가 호수위의 여신, 물위의 여신의 뜻을 지닌 니느웨 이다. 그리고 요시아 시대에 아세라 여신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지중해로 넘어와 시벨라 연신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르데미스(아테네) 여신으로 계속 변한다. 이 여신의 공통된 특징은 자유와 풍요의 여신으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영적 뿌리이며 원조이다. 다음은 다이아나 여신으로 변신하고 또 다른 기묘한 전략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우상화하여 여신으로 둔갑한다.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마리아는 자유의 여신으로 다시 부활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시스 여신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크리스마스 12월 25일이 그의 첫째 아들 호루스 탄생일이고, 그리스 기독교 정교의 예수님의 탄생일을 1월 6일로 하는데 그날은 둘째 아들 아이온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적, 문명적 맥락에서 세계를 영적으로 도해하지 않고는 잘 잡히지 않는 가려진 실체이다. 이러한 음녀는 신학에서도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지성사회를 공략하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무기로 사용하며, 이러한 이유로 음녀는 현재 가장 강력한 힘으로 활동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경제권력으로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변방으로 달리며 신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룰 주님의 위대한 제자들이 되어야 한다. 끝까지 어린양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하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함으로 종교권력에서 자유해져 경제권력 없이도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거의 마지막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며 지혜로운 5처녀와 같이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무엇보다 말씀을 통해 통찰력 있게 이 시대를 바라보며 깨어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자아)으로부터…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자아)으로부터…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은 결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생명은 힘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생명은 느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강한 체험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체험을 위해 영성훈련을 하며 생명의 삶을 위해 영성형성을 이루도록 노력합니다.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생명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실재입니다.
생명은 멈춤이 아니요 변화를 가져다 주며 영향을 주어 생명의 역사를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명의 체험과 삶을 경험하며 누리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한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진리인것처럼 먼저 자신이 죽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을 체험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지 않고는 생명을 체험하지도 누리지도 실재도 될 수 없다. 죽는 것은 자기를 부인 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속에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은 오직 내(자아)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생명의 실재는 곧 체험이며 결과는 열매이다.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은 결과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생명은 힘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영향력이 있습니다.
생명은 느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은 강한 체험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체험을 위해 영성훈련을 하며 생명의 삶을 위해 영성형성을 이루도록 노력합니다.
생명은 느낌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생명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생명은 실재입니다.
생명은 멈춤이 아니요 변화를 가져다 주며 영향을 주어 생명의 역사를 나타납니다.
그러나 생명의 체험과 삶을 경험하며 누리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한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진리인것처럼 먼저 자신이 죽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생명의 체험은 곧 죽음을 체험햐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지 않고는 생명을 체험하지도 누리지도 실재도 될 수 없다. 죽는 것은 자기를 부인 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속에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는 것은 오직 내(자아)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생명의 실재는 곧 체험이며 결과는 열매이다.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오, 주여! 오늘 아침 이 중에게 독수리의 눈과 올빼미의 지혜를 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하늘 중앙에 있는 복음 전화국과 연결해 주시고 이마를 천국의 태양으로 빛나게 하시고, 저의 마음에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게 하소서. 저의 상상력에 송진을 바르시고, 저의 입술에 기름을 칠하시며 저의 혀를 당신의 능력으로 진압하소서. 저의 죄에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시고, 저의 팔이 부단히 움직이게 하시며, 저의 가슴에 당신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소서. 전신에 당신의 구원으로 기름 부으시고 불을 붙여 주소서” 아멘. <케네스 맥팔랜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친밀함의 재탄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전세계를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할 연료가 되길 바라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말씀이 능력있게 나타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다. 그런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지를 드러나게 한다. 또 사람들을 다시 거룩하게 한다.
기름부음은 그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할 것이다. 기름부음은 성경에 나온 개념이며 믿음의 거인들에게 존재했던 풍부한 시앙 유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 기름부음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기름부음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도대체 기름부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구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이라는 히브리어 ‘맛사’(massah)는 원래 신성한 기름을 물건에 발라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쳤던 구약시대 풍습에서 유래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소명, 봉사, 권한 위임을 뜻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봉헌’과 ‘기름부음’이라는 두 히브리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자 ‘따로 구별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되었다. 결국 ‘기름부음’과 ‘소명’은 동의어가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훗날 다윗의 자손이 세상을 통치하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새의 가지에서 기름부음 받은 여호와의 종이 탄생하고 그 기름부음은 곧 성령을 통한 능력과 지혜로 나타난다고 했다(이사야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 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9:21, 행2:32-34참조) 수많은 선지자가 이처럼 회복과 기름부음을 주제로 예언했다.
요엘은 마지막 때에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라고 했고 기름부음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 말씀을 예언자처럼 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엘2:28-29).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역사하기를 원하는가? 신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자손을 고대하던 히브리인의 소망은 드디어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성취되었다(헬라어 ‘크리스도’[Christos]는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뜻임).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종임을 밝히셨다(눅4:18-19).
하나님은 예수님이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중에 성령으로 기름부으셨고, 다윗의자손이며 메시아임을 확증하셨다(눅3:21-22). 그 순간 예수님은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으셨다. 그래서 공생애 동안 사단에게 억눌린 자들의 해방하실 수 있었다(행10:38). 기름부음은 이제 다윗의 자손이며 진정한 예수님 한 분에게 임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 보좌에 앉아 믿는 자의 그리스도와 주가 되셨다(행2:36).
바로 그 영광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성령 세례를 믿는 자에게 부어 주셨다(33절).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소명과 능력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 탄생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진리를 입증해 주는 하나님의 전폭적이고 기적적인 도움을 받았고, 그 분의 몸이요 백성인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갔다(1:1, 14).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 제사장, 왕가의 유업을 받은 자가 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교회 전체에 임한 동시에 교인들 각각에 임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고후1:21)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남은 평생 동안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1요 2:20, 27). 기름부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성도가 되었음을, 특정 사역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자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였다(고전 1:21, 12:27).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일을 하고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즉 기름부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았다는 말이다. 다음은 기름부음에 대한 핵심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과 함께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특별하고 전능한 역사를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효과적으로 사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역사하심이 빚는 결과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의 발단과 효과는 철저히 초자연적이다. 또 기름부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효과적인 사역(봉사,섬김)을 하기 위해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며, 그리스도인을 통해 역사한다. 바운즈는 기름부음이 기도를 통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말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그리스도인이 지닌 모든 잠재력이 발휘된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감과 판단력, 통찰력을 분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기름부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강한, 마음의 능력을 사용하게 한다. 기름부음 덕분에 마음에서부터 온화, 성결, 힘이 흘러나온다. 성숙, 자유, 사려, 방향성, 폐부를 찌르는 말은 모두 기름부음의 열매다.”
기름부음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사람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숨결이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충만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원활하게 하고, 자르고, 어루만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폭탄처럼 전해진다. 말씀을 위로자, 규탄자, 폭로자, 탐색자처럼 느끼게 한다. 듣는 사람을 피의자나 성자로 만들고 아이처럼 울게 만들며 거인처럼 굳세게 한다. 봄이 나뭇잎을 키우듯이 너그럽게 마음과 지갑을 열게 만든다.” 20세기 후반, 위대한 설교자 만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 때마다 기름부음을 간절히 간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기름부음이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지식과 능력임을 깊이 깨달았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하게 임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능력의 허용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믿는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로 만드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재능과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하나님께 바아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름부음 받은 신자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 구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받으면 직면한 상황이나 환경을 분명히 이하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담력이 생기게 한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표시 중 하나가 그러한 담대함이었다(미 3:8; 행4:31). 기름부음을 받으면 생각과 말이 명료해지고 권위가 생기며 자신감이 넘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영향력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한 단순한 말과 행동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죄를 깨닫는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성경말씀을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로 인한 영향력은 전인적이다. 우리의 생각, 마음, 영혼, 심지어 육체까지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순종의 결과로 육신에 새로운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기름부음의 영향력을 알아채기는 쉽지만 그것은 철저히 성령의 전능한 역사에 속한다. 성령은 마치 바람처럼, 선택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고 축복하신다(요3:8). 문제는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하시는 시기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간절히 원하고 기대해야 하지만 그 시기와 능력의 정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역사인 기름부음은 영속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절대로 기름부음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고 세상적인 삶을 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여 기름부음 받은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겸허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 삼손과 같이, 당신을 통해 나타나려고 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 삼손은 부주의하고 무심한 생활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었고, 그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사사기 16:20). 기름부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현상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역사이다.
기름부음은 정의 내릴 수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형상으로 뭐라고 형용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도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부드럽고도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고, 주님의 사랑을 불어 넣어 준다. 하늘에서 그것을 얻을 수밖에 없다. 기름부음은 감정적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한 감상주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맺지 못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형식이나 감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기름부음은 결과를 보고 알 수 있으며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감상적인 조작이나 집단 최면이 아니다. 기름부음은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헌신하고 영적 준비를 하는 자녀에게 축복하기 원하신다. 기름부음은 곧 믿는 자의 마음과 성령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기름부음.. 중에서> - Anthony L. Jinwright
“오, 주여! 오늘 아침 이 중에게 독수리의 눈과 올빼미의 지혜를 주옵소서. 저의 영혼을 하늘 중앙에 있는 복음 전화국과 연결해 주시고 이마를 천국의 태양으로 빛나게 하시고, 저의 마음에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게 하소서. 저의 상상력에 송진을 바르시고, 저의 입술에 기름을 칠하시며 저의 혀를 당신의 능력으로 진압하소서. 저의 죄에 말씀의 전류가 흐르게 하시고, 저의 팔이 부단히 움직이게 하시며, 저의 가슴에 당신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소서. 전신에 당신의 구원으로 기름 부으시고 불을 붙여 주소서” 아멘. <케네스 맥팔랜드>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는다. 이것을 친밀함의 재탄생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변화가 전세계를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할 연료가 되길 바라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말씀이 능력있게 나타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다. 그런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고 지를 드러나게 한다. 또 사람들을 다시 거룩하게 한다.
기름부음은 그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할 것이다. 기름부음은 성경에 나온 개념이며 믿음의 거인들에게 존재했던 풍부한 시앙 유산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대부분 기름부음의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기름부음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도대체 기름부음이 무엇이란 말인가?
구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이라는 히브리어 ‘맛사’(massah)는 원래 신성한 기름을 물건에 발라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쳤던 구약시대 풍습에서 유래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소명, 봉사, 권한 위임을 뜻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봉헌’과 ‘기름부음’이라는 두 히브리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고자 ‘따로 구별함’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되었다. 결국 ‘기름부음’과 ‘소명’은 동의어가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훗날 다윗의 자손이 세상을 통치하며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새의 가지에서 기름부음 받은 여호와의 종이 탄생하고 그 기름부음은 곧 성령을 통한 능력과 지혜로 나타난다고 했다(이사야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 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9:21, 행2:32-34참조) 수많은 선지자가 이처럼 회복과 기름부음을 주제로 예언했다.
요엘은 마지막 때에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라고 했고 기름부음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 말씀을 예언자처럼 말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요엘2:28-29). 당신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이렇게 역사하기를 원하는가? 신약에 나오는 기름부음 –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자손을 고대하던 히브리인의 소망은 드디어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성취되었다(헬라어 ‘크리스도’[Christos]는 ‘기름부음 받은자’라는 뜻임).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종임을 밝히셨다(눅4:18-19).
하나님은 예수님이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중에 성령으로 기름부으셨고, 다윗의자손이며 메시아임을 확증하셨다(눅3:21-22). 그 순간 예수님은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으셨다. 그래서 공생애 동안 사단에게 억눌린 자들의 해방하실 수 있었다(행10:38). 기름부음은 이제 다윗의 자손이며 진정한 예수님 한 분에게 임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셨고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 보좌에 앉아 믿는 자의 그리스도와 주가 되셨다(행2:36).
바로 그 영광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성령 세례를 믿는 자에게 부어 주셨다(33절). 오순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소명과 능력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 탄생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진리를 입증해 주는 하나님의 전폭적이고 기적적인 도움을 받았고, 그 분의 몸이요 백성인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계속해서 이어갔다(1:1, 14).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 제사장, 왕가의 유업을 받은 자가 되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교회 전체에 임한 동시에 교인들 각각에 임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고후1:21)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남은 평생 동안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었다(1요 2:20, 27). 기름부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성도가 되었음을, 특정 사역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고자 성령의 은사를 받았음을 입증하는 증거였다(고전 1:21, 12:27).
교회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일을 하고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즉 기름부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았다는 말이다. 다음은 기름부음에 대한 핵심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과 함께하고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의 특별하고 전능한 역사를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효과적으로 사역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역사하심이 빚는 결과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의 발단과 효과는 철저히 초자연적이다. 또 기름부음의 목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효과적인 사역(봉사,섬김)을 하기 위해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늘에서 오는 능력을 입게 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한다. 이러한 힘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하지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며, 그리스도인을 통해 역사한다. 바운즈는 기름부음이 기도를 통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영향력이라고 말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그리스도인이 지닌 모든 잠재력이 발휘된다. 기름부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영감과 판단력, 통찰력을 분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기름부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보다 훨씬 강한, 마음의 능력을 사용하게 한다. 기름부음 덕분에 마음에서부터 온화, 성결, 힘이 흘러나온다. 성숙, 자유, 사려, 방향성, 폐부를 찌르는 말은 모두 기름부음의 열매다.”
기름부음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사람에게 그 진리를 깨닫게 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달콤하기 이를 데 없는 숨결이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충만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원활하게 하고, 자르고, 어루만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폭탄처럼 전해진다. 말씀을 위로자, 규탄자, 폭로자, 탐색자처럼 느끼게 한다. 듣는 사람을 피의자나 성자로 만들고 아이처럼 울게 만들며 거인처럼 굳세게 한다. 봄이 나뭇잎을 키우듯이 너그럽게 마음과 지갑을 열게 만든다.” 20세기 후반, 위대한 설교자 만틴 로이드 존스는 설교 때마다 기름부음을 간절히 간구했던 사람이다. 그는 기름부음이 하나님의 숨결이며,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지식과 능력임을 깊이 깨달았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하게 임하는 방법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능력의 허용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믿는자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보다 더 큰일을 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성령이 역사하는 통로로 만드신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재능과 능력을 초월한 능력을 하나님께 바아 스스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름부음 받은 신자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 구역’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능력을 받으면 직면한 상황이나 환경을 분명히 이하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담력이 생기게 한다.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표시 중 하나가 그러한 담대함이었다(미 3:8; 행4:31). 기름부음을 받으면 생각과 말이 명료해지고 권위가 생기며 자신감이 넘친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의 영향력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 한 단순한 말과 행동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죄를 깨닫는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면 성경말씀을 실제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로 인한 영향력은 전인적이다. 우리의 생각, 마음, 영혼, 심지어 육체까지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순종의 결과로 육신에 새로운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기름부음의 영향력을 알아채기는 쉽지만 그것은 철저히 성령의 전능한 역사에 속한다. 성령은 마치 바람처럼, 선택한 사람들에게 기름을 붓고 축복하신다(요3:8). 문제는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하시는 시기다.
우리는 기름부음을 간절히 원하고 기대해야 하지만 그 시기와 능력의 정도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역사인 기름부음은 영속적인 소유물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절대로 기름부음을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된다.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고 세상적인 삶을 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여 기름부음 받은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겸허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라. 삼손과 같이, 당신을 통해 나타나려고 하는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아야 한다. 삼손은 부주의하고 무심한 생활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잃었고, 그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사사기 16:20). 기름부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현상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역사이다.
기름부음은 정의 내릴 수 없고 설명도 불가능한 형상으로 뭐라고 형용할 수 없고, 정체를 알 수도 없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부드럽고도 강력한 무언가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고, 주님의 사랑을 불어 넣어 준다. 하늘에서 그것을 얻을 수밖에 없다. 기름부음은 감정적 언어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순한 감상주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맺지 못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형식이나 감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진정한 기름부음은 결과를 보고 알 수 있으며 성령의 열매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감상적인 조작이나 집단 최면이 아니다. 기름부음은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은 간절히 기도하고 헌신하고 영적 준비를 하는 자녀에게 축복하기 원하신다. 기름부음은 곧 믿는 자의 마음과 성령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디딤돌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기름부음.. 중에서> - Anthony L. Jinwright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
구약에서는 특수한 몇몇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17). 사람에 따라 능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은사를 받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신자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 세례, 성령 체험 곧 어노인팅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다음을 체험한다.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난다. 방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사가 나타난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의 기적행하는 은사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찬양과 예배가 살아난다 어노인팅을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과 그렇지 않은 찬양에는 차이가 있다. 어노인팅을 받은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강하게 느끼게 하며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한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3, 1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 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지만 찬양은 용사이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적고 싸우게 만드신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기도에 능력이 붙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능력이 따르고 오랫동안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성령 체험있는 목사들이 하루 평균 45분을 기도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목사들은 15분 정도라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친다(막 9:29; 엡 6:18; 단 10). 마귀를 대항하는 중보기도는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들 및 어느 특정 지역 또는 단체를 위한 집중 기도로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를 말한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한 능력은 물론 눈에 보이는 능력이 현상이 나타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현상들을 보면 다른 경우에는 모두가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을 말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8장 17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마술사가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저희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도행전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 -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성전 기물을 만드는 여러가지 재주를 주셨다(출 31:3). - 사사들에게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 (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 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다 (삼상 19:23-24). - 여호와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 (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김). - 꿈을 해석했다(창 41:38; 단 4:18). -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 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 귀신을 쫓는다(마 12:28).
뜨거운 신앙인이 된다 성령의 임재 자체가 올 세대―내세―의 도래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체가 우리의 삶이 올 세대의 능력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말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며 동시에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 상급을 사모한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짙은 안개가 기름부음의 강렬한 태양 빛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고 멀리만 느껴졌던 종말의 산 봉우리가 갑자기 성큼 가까이 다가온 긴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기름부음을 받은 신앙인은 예배를 사모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 하며, 세상 재미보다는 예수를 섬기는 재미를 만끽한다. 이들에게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된다. 예수는 더 이상 철학이나 개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구세주요 연인이요 친구이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신앙이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예수의 임재(presence)가 더욱 개인적으로 강렬하게 체험된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요 15:26; 16:1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교리를 알면서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에서 인격적인 예수와의 친교가 결핍되어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직도 성경 내용 많이 아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인해 타락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단계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성품―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성령의 열매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갈 5:16; 엡 5:18). A. B. 심슨(Simpson)은 기름부음의 외적인 표적으로 예수충만(a fullness of Jesus), 경건하고 의롭고 순종하는 삶, 기쁨 충만, 성령의 열매, 지식과 빛을 예로 들었다.
그 외에도 어노인팅을 받으면 나타나는 결과로서는: - 말씀이 꿀 맛같이 달게 된다(시 119:103). -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 진다(롬8:15). -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롬 8:16; 살전1:5). - 긴박감을 가지고 전도한다(행 1:8; 고후 5:13-14). 성령의 도래는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요일 4:11; 롬 5:5). -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다(고전 16:22; 요일 3:3). - 악령의 존재에 민감해 진다(마 12:28; 행 10:38; 엡 6:12). ♡ (글로리아넷/구요한 목사)
구약에서는 특수한 몇몇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17). 사람에 따라 능력의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은사를 받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신자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 세례, 성령 체험 곧 어노인팅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다음을 체험한다.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난다. 방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사가 나타난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의 기적행하는 은사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1).
찬양과 예배가 살아난다 어노인팅을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과 그렇지 않은 찬양에는 차이가 있다. 어노인팅을 받은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가까이 강하게 느끼게 하며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한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3, 14).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 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8-19).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지만 찬양은 용사이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적고 싸우게 만드신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기도에 능력이 붙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능력이 따르고 오랫동안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성령 체험있는 목사들이 하루 평균 45분을 기도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목사들은 15분 정도라고 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물리친다(막 9:29; 엡 6:18; 단 10). 마귀를 대항하는 중보기도는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들 및 어느 특정 지역 또는 단체를 위한 집중 기도로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를 말한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한 능력은 물론 눈에 보이는 능력이 현상이 나타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현상들을 보면 다른 경우에는 모두가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현상을 말하고 있는데 사도행전 8장 17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마술사가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저희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도행전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 -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성전 기물을 만드는 여러가지 재주를 주셨다(출 31:3). - 사사들에게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 (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 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다 (삼상 19:23-24). - 여호와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 (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김). - 꿈을 해석했다(창 41:38; 단 4:18). -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 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 귀신을 쫓는다(마 12:28).
뜨거운 신앙인이 된다 성령의 임재 자체가 올 세대―내세―의 도래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체가 우리의 삶이 올 세대의 능력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말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며 동시에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 상급을 사모한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짙은 안개가 기름부음의 강렬한 태양 빛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고 멀리만 느껴졌던 종말의 산 봉우리가 갑자기 성큼 가까이 다가온 긴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기름부음을 받은 신앙인은 예배를 사모하고,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많이하고, 헌금을 많이 하며, 세상 재미보다는 예수를 섬기는 재미를 만끽한다. 이들에게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된다. 예수는 더 이상 철학이나 개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구세주요 연인이요 친구이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신앙이 교리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예수의 임재(presence)가 더욱 개인적으로 강렬하게 체험된다.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요 15:26; 16:1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교리를 알면서도 매일매일의 신앙생활에서 인격적인 예수와의 친교가 결핍되어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래서 아직도 성경 내용 많이 아는 것을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인해 타락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단계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성품―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성령의 열매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갈 5:16; 엡 5:18). A. B. 심슨(Simpson)은 기름부음의 외적인 표적으로 예수충만(a fullness of Jesus), 경건하고 의롭고 순종하는 삶, 기쁨 충만, 성령의 열매, 지식과 빛을 예로 들었다.
그 외에도 어노인팅을 받으면 나타나는 결과로서는: - 말씀이 꿀 맛같이 달게 된다(시 119:103). -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 진다(롬8:15). -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롬 8:16; 살전1:5). - 긴박감을 가지고 전도한다(행 1:8; 고후 5:13-14). 성령의 도래는 종말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요일 4:11; 롬 5:5). -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다(고전 16:22; 요일 3:3). - 악령의 존재에 민감해 진다(마 12:28; 행 10:38; 엡 6:12). ♡ (글로리아넷/구요한 목사)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과 여러 가지 영적 경험 - 로렌스 길릭 예수회 신부 글, 번역(김한글)
요한 복음 9장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질문을 한다. 눈이 먼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은 마치 눈이 멀음을 적어도 죄에 대한 벌로 간주하거나 눈이 멀음과 죄를 동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은 이 눈멀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나 자신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도들이 질문한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 보곤 했었다. 나는 태어 날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8 살때에 "이 가혹한 은총"을 받았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의사들은 몇 번 씩이나 나의 눈을 검사하였다.
루우드의 물과 성인과 순교자들의 뼈로 축성을 받았지만, 44살인 지금까지도 눈이 먼 상태이다. 나는 아직도 하느님의 배려 깊으신 사랑과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화해하려 노력하면서 질문해 보곤 한다. 질문들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는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느리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대답은 분명 온다. 최근에 나는 남다코다 주의 베드렌즈 국립공원을 여행하였었다. 나와 동행한 두 친구들은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보는, 계곡, 언덕과 바위들의 장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언어로 설명해 준다는 것이 머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의 웅장한 경치, 야구 선수들이 절묘하게 공을 날리는 것,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들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면서,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의 한계 때문에 친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눈이 먼것에 대해 글로 묘사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도인지를 느낀다. 여러분이 한번 눈을 감고 그냥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이 것은 곤혹스런 경험이다. 순간적이나마 경험하는 어두움의 와중에도, 만일 전화가 울리면 재빨리 눈을 뜨고 수화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은가? 내 친구들이 베드렌즈 공원의 장관을 나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나도 "가혹한 선물"을 가짐으로서 얻는 경험들을, 여러분들에게 완전하게 이해시킬 수 없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겪는 경험과 비슷할 수 있고 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은 몇 가지를 쓰고자 한다. 나는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눈멀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어두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좀더 보편적인 은총에 대해 가르쳐 준 것에 대해 말하겠다. 가끔 사람들이 나와의 접근을 피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처럼, 눈이 안보이게 되는 재앙을 입을까봐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지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욕되게 할까 혹은 무례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내 곁을 빨리 지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자신의 눈먼 상태를 뒤돌아 볼 수도 있는 기회를 재빨리 지나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축복이자 괴롭힘일 수 있지만, 눈 이 멀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과 씨름하지만 매일 매일 그 것과 부딪치면서 내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소용없는 저항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눈먼 상태에 의해 정복당하도록 허락할 때 더욱 더 많은 평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9장을 여는 사도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이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탓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눈이 멈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그분은 매우 분명하게, 마지 못해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보는 사람을 가려 못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 멀게 하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9, 39).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심오한 진실을 볼 수도 있는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우리 각자의 눈 먼 상태를 직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영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들을 점차적으로 빛의 삶으로 천천히 안내되어 가도록 허용하면서, 우리들의 인간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기는 약점들과 더불어 계속 기도하면서 사는 삶. 이것은 한번에 끝나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은 투명하게 볼 수 없다는 한계와 더불어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감과 눈이 멈 우리들은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에 본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알겠다".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겠니"?라고 물어 볼 때 see와 know를 서로 교체하면서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마치 어떤 것을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양 겁을 낼 수 도 있다. 알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어두움의 무서운 형태일 수 도 있다. 우리들은 쌍둥이인 토마스 사도가, 믿기 위해서 보아야만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믿는자가 될 것을 격려하신다 (요한 복음 20, 29). 눈먼 사람으로 지낸 36년 이 지 난 후에도 나는 아직도 혼돈스런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에는 마비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나는 피정을 지도하러 몇 년 전에 한국에 있었다. 첫날 아침 창 밖으로부터 들려 오는 소음에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기억난다. 예수회 건물은 언덕 위에 높이 있어서 서울 시내의 택시들과, 버스와 트럭들이 멀리서 어렴풋이 지나다니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비슷한 소리들을 내 평생 들었다. 그것은 혼란과 무질서의 소리들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알려진 안정된 자리에 있으라는 경고인 동시에 모험에 초대하는 소리이다. 나는 나의 공포를 직면하는 것을 배웠으며 예수회 건물이 주는 안전함을 벗어나서 서울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초대에 응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현기증나도록 움직이는 것들과 소음의 신비안에서 나는 보는 것도 배웠다.
만일 우리가 불안정함을 단지 피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눈이 먼 것이다. 우리들은 공포라는 물위를 걸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눈이 멀게 되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어둠의 공포 때문에 너무 슬픈 나머지 우울증까지 겪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제공할 수 도 있는, 하느님께서 다른 한 손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따른 선택, 결혼, 인간 관계에 대해 극도로 걱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명성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절망적인 형태의 어둠의 상태가 된다. 투명한 시력은 주어진 상품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배제하게 되는 방어적인 태도이다. 영적 생활은,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지켜만 보는, 관중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호하고 있는 확고함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 내는 갈등으로 이루어진 여정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을 변호하고 우리들의 어둠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은 겉잡기 힘들고 대리적일 뿐이다.
영적 삶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향해나가고 심지어는 신뢰를 하는, 신비를 침착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보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약속도 없이 "가서 실로암 우물의 물로 씻으십시오 (요한, 9, 7)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연못으로 가야 했다. 그의 시력을 되찾는 일은, 그의 어두움의 신비를 예수님의 치유의 약속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달려 있다. 눈이 안보인 다는 것은 가혹한 은총이지만 그러나 계속 나아가면서 훌륭하게 성숙될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보내는 "실로암 우물"이 무엇이건 간에 그곳으로 좀더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을 배웠다. 나의 삶에 하느님의 약속이 충실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가서 씻으라고 말하신다, 그리고 그는 시력을 찾고 돌아 왔다. 부딪히거나 상처가 생기지 않지만, 가끔 온갖 종류의 어둠 속으로 눈이 안 보이는 나를 보낸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보게 되고 그것을 봄으로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되면 불안정함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부터 내가 배운 영적 삶의 제일 첫 번째 요소이다.
선택과 받아들임 눈먼 사람에게 도전을 가했던 유태인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안전과 명확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각자 마음안에 있는 불안전감으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하신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은, 그 신비의 진정함을 불신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찾아 오신 것을 주목하라 (요한, 9:1-35). 눈먼 지도자들의 관심은 안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력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이 먼 그 사람은 종교적인 논쟁에 말려들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한때는 눈이 멀었었지만, 지금은 시력을 회복했다는 것만을 알 뿐 이다 (요한 9:25).
눈이 먼 나에게 두 번째 제공 된 영적 삶의 선물은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가끔은, 가장 고통스러운 받아들임이다. 파티 혹은 다른 모임에서, 나는 그 저녁시간을 보낼 사람이나, 같이 앉거나, 같이 이야기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에겐가, "미안해요. 저기 내가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있어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신 그 특정한 사람에게 항상 전적으로 마음이 열려져 있거나 고마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똑같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초대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권력이라든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몇 가지 중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의 영성은 "성령을 받아들임, 즉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우리들을 비우는, 그런 종류의 가난에 기초 해 있다. 나는 곧잘 경이롭지만 이상한 상황을 통하여 감사의 미덕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몇 번은, 내가 길을 건너가도록 도와준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도와 줄려고 했던 술에 취한 사람이다. 또 한번은 토론토의 지하철역에서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의 양쪽에서 각각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많은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양쪽 모두 내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받아들임은 쉬운 미덕이 아니다.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정지시키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일어 날 수 있다.
어떤 집에 손님으로서 초대를 받아 갈 때나는 어떤 형태로든 계란 음식은 싫어한다. 나는 가끔 크고 작은 계란 조각을 셀러드에서 발견한다. 가끔 나는 내가 무엇을 먹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다. 한국을 방문했었을 때 내 친구는, "나는 무엇인가 있는 것을 보기는 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라면서 나에게 말을 해 준다. 옷을 사러 갈 때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선택을 해 주어야 한다. 항상 같은 사람과 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복장도 일관성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인디아의 시인, 타고르는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오신다" 라고 쓴다. 신앙인 인 우리들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어떠한 형태건 그 안에서 그분이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을 증명을 해야 되는 것에 묶여서, 오시는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어둠이다: 피부 색, 머리 모양,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이런 것들은 분명히 그를 감싸고 참신하게 하겠지만, 오시는 그분은 오히려 꽁꽁 싼 것을 풀고 받아들여 지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마테오 25:40)라고 말씀하신다. 눈이 멀었다는 이 가혹한 선물은 나의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사치에의 욕망을 전적으로 대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나만의 바램이 있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잡은 다음에는, 내가 좀더 그분의 도움과 동행을 좀더 받아들이는 것을 배움으로서,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배운다.
나의 욕망과 기대의 손을 펴기는 하지만, 나의 손안에 무엇이 들어 와야 한다는,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민감하게 만져 볼 수 있기 위해 손을 펴고 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믿음의 기회를 잃은 동안,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그의 시력의 회복과 함께 신앙의 빛을 받았다. 눈먼 사람의 받아들임은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선택적으로 논란을 좋아하는 것이 나란히 대조가 된다. 영적 삶에서는 요구가 아닌 바램을 가지는 것, 완고한 기대가 아닌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눈먼 나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신앙이 제공하는 시력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그 분이 오시든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오시든지 고마와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의존성과 독립성 나의 삶에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와 , "좀 도와 주실래요? 사이의 긴장을 겪고 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비현실적이며 영웅적이 되는 것에 대해 쉽사리 두려워 한다. 또한 너무 의존적이 되거나 남의 짐이 되거나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내 눈이 먼 것을 이용하거나, 게으르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 요한 복음에서의 눈먼 사람은, 그가 누구인가를 나타 내는 데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 그의 부모들이 먹여 살렸던 사람, 그 자신 유다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등, 3가지 현실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 오셔서 낫게 해 주심으로서, 이 세가지 아이덴티티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극적으로 넘어 서게 하였다.
8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하고 물어 본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지금 여러 가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들은 지금 아들에게 책임을 져왔던 자신들로부터 떨어진다. 그들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요한 9: 23) 라고 말한다. 그들 자신이 회당에서 위치를 잃게 될까봐 겁을 낸다. 그의 시력을 되찾음으로서 그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34절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제공되었다. 새롭게 보게 된 그 남자는, 평생을 몸담았던 회당에서 쫏겨 났다. 그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찾아서 새로운 아이덴티티, 의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제공해 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과 믿지 못함, 시력과 눈이 멀음이 긴장을 야기시키지만, 시력이 제공하는 자유로 인해 이 사람은, 믿는 자로서 해방이 되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30일 피정을 하였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적절하게 의존적이 되는 것과 그가 보내는 도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고투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메사추세츠주의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라고 보내졌다. 나에게 수퍼바이져가 첫 번째로 한말은, "물론 제일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병동에서는 독립적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였다. 나는 적절한 독립과 감사하는 의존간의 긴장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긴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에게는 은총이며 나를 도와 주는 사람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자부심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이다. 언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편하게 될지 혹은 그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불쾌해 할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내가 쓰고 있는 하얀 색 지팡이로 내 앞을 톡톡 치면서 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때에는, 지팡이는 항복과 패배의 견딜 수 없는 상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장님이며 내가 혹시 너무 독립적이 아닌가하는 것에 대해 따질 것 없이, 또 도움 없이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긴장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장님이며, 내가 너그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의 빛을 고맙게 받아 들 일 수 있다. 내가 가혹한 선물을 저항하지 않을 때,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내가 은총이 되는 것을 허락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고 또 훌륭하게 자선에 관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너무도 손쉽게 책을 펴들고 읽는 사람을 보며 원망 할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피로해 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눈을 사용 할 수 있는 나의 친구들 역시 다른 영역에서 비슷하게 의존적이 될 수 있으며 능력의 모자람과 제한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도록 배워야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설정한 자주성과 진실된 의존성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내 친구들은 차를 운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못미치지만, 책속의 그림 그대로 그리고 싶어하거나 그림속의 사진처럼 기술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할 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이 가진 한계와 싸운다. 한편 이 한계들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의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의존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 고통스러운 단면은, 인내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자주 나는 누군가가 와서 나의 우편물을 읽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왔을 때는, 그의 우편물을 먼저 읽고 싶어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좀더 기다려야 할 는지도 모른다. 나를 도와 줄려고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나의 참을 수 없음이 의존성을 더욱 불쾌하게 할 것이다. 길을 건너 갈 때에는 모든 차들이 지나가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뿐더러 앞차가 지나간 후에도 내가 건너 가는 시간동안 뒤에 다른 차가 지나가지 않도록 거리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눈이 안보이는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 귀가 안 들리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들, 모두 다 그런 악마와 씨름을 한다. 신앙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일상 생활의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바로 악마와 나의 눈먼 상태와 씨름을 하는 악마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때 나의 영적 삶의 모험에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항상 참지 못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마와 직면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 "야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 26)라는 구절을 읽는 것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내 안에 있는 참지 못하는 에너지가 가끔 폭발을 하면 나는 급히 내방으로 들어오는데 도중에 층계에 내 발가락이 걸리거나 반쯤 열린 문에 내 머리를 박곤 한다. 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는다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복되어라. 그 분을 기다리는 자 (이사야서 30: 18-19). 은혜로운 하느님 앞에서 나는 기다린다. 나는 점차 "섬기는 자"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전환된다. 그분은 나에게 봉사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를 조용히 가라 앉혀 주고, 나에게 권위가 아닌 강인함을 주고, 단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닌 용기를 주신다.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겪는 갈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의 부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이 부족함- 나에게 희망작인 기대로 부른다.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러 온다. 그들은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기 전에 세 번씩이나 초인종을 누른다. 나의 방으로 급히 들어 와서 재빨리 앉은 다음 나에게 이미 다른 약속에 늦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53 분밖에 할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기도 생활이 매우 공허하고 무미 건조하다고 털어놓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가만히 침묵속에 앉아서, 자신들이 한말을 자신들이 다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들의 삶은 연속적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대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을 성이 없다가나, 지나치게 요구를 하거나, 독립적이라면, 이것이 그대로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안에서도 대부분 반영이 된다. 성서 속의 눈이 먼 그 남자는 예수님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예수님이 다시 그에게 오셔서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 분임을 나타내고, 신앙의 새로운 비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론 눈이 먼 그 사람의 삶과 영적 삶은 같은 점이 많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이 그 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눈이 먼 상태 때문에, 마치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가끔 자신들을 우리 자신의 재산인양 취급하고 창조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한다. 여하한 형태로든 안전하지 못함을 항상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안전성을 항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떤 것을 거부해야 되는지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만 한다고 느낀다. 눈이 먼 것은 이러한 악마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매일 겪는 육박전은 그들과의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였으며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눈 이 먼 것처럼, 영적 생활도 끝없는 회심과, 낙오와, 다시 일어서는 것의 연속을 포함한다. 나는 항상 은총속에 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또 항상 고마워 하는 눈이 먼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한 복음 9장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놀라운 질문을 한다. 눈이 먼 사람을 보면서 그들은 묻는다. 선생님 이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그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은 마치 눈이 멀음을 적어도 죄에 대한 벌로 간주하거나 눈이 멀음과 죄를 동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은 이 눈멀음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나 자신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사도들이 질문한 비슷한 질문들을 던져 보곤 했었다. 나는 태어 날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8 살때에 "이 가혹한 은총"을 받았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의사들은 몇 번 씩이나 나의 눈을 검사하였다.
루우드의 물과 성인과 순교자들의 뼈로 축성을 받았지만, 44살인 지금까지도 눈이 먼 상태이다. 나는 아직도 하느님의 배려 깊으신 사랑과 시력을 잃은 것에 대해 화해하려 노력하면서 질문해 보곤 한다. 질문들은 너무나도 빨리 생기는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느리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대답은 분명 온다. 최근에 나는 남다코다 주의 베드렌즈 국립공원을 여행하였었다. 나와 동행한 두 친구들은 우리들이 지나가면서 보는, 계곡, 언덕과 바위들의 장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언어로 설명해 준다는 것이 머지 않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의 웅장한 경치, 야구 선수들이 절묘하게 공을 날리는 것,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들을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면서,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려 하는 것의 한계 때문에 친구들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자신이 눈이 먼것에 대해 글로 묘사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시도인지를 느낀다. 여러분이 한번 눈을 감고 그냥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이 것은 곤혹스런 경험이다. 순간적이나마 경험하는 어두움의 와중에도, 만일 전화가 울리면 재빨리 눈을 뜨고 수화기를 잡을 수 있지 않은가? 내 친구들이 베드렌즈 공원의 장관을 나에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나도 "가혹한 선물"을 가짐으로서 얻는 경험들을, 여러분들에게 완전하게 이해시킬 수 없다. 그래서 거의 불가능한 과업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겪는 경험과 비슷할 수 있고 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싶은 몇 가지를 쓰고자 한다. 나는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눈멀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이 어두움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좀더 보편적인 은총에 대해 가르쳐 준 것에 대해 말하겠다. 가끔 사람들이 나와의 접근을 피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처럼, 눈이 안보이게 되는 재앙을 입을까봐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감지 할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욕되게 할까 혹은 무례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내 곁을 빨리 지나가려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 자신의 눈먼 상태를 뒤돌아 볼 수도 있는 기회를 재빨리 지나 가고 있는 것이다. 눈이 멀었다는 것은 축복이자 괴롭힘일 수 있지만, 눈 이 멀었다는 사실을 직면하지 않으려 피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과 씨름하지만 매일 매일 그 것과 부딪치면서 내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소용없는 저항을 계속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나의 눈먼 상태에 의해 정복당하도록 허락할 때 더욱 더 많은 평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9장을 여는 사도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신다. : 이 것은 그 사람이 지은 죄의 탓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의 탓도 아닙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우신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우리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눈이 멈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다. 그분은 매우 분명하게, 마지 못해 하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보는 사람을 가려 못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 멀게 하려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 9, 39).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더 심오한 진실을 볼 수도 있는 삶의 모든 사건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우리 각자의 눈 먼 상태를 직면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영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들을 점차적으로 빛의 삶으로 천천히 안내되어 가도록 허용하면서, 우리들의 인간성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생기는 약점들과 더불어 계속 기도하면서 사는 삶. 이것은 한번에 끝나는 치유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이것은 투명하게 볼 수 없다는 한계와 더불어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불안감과 눈이 멈 우리들은 아는 것을 경험하는 것에 본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알겠다".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겠니"?라고 물어 볼 때 see와 know를 서로 교체하면서 같은 의미로 쓰여진다. 마치 어떤 것을 모르는 것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양 겁을 낼 수 도 있다. 알려고 하는 것은 때로는 어두움의 무서운 형태일 수 도 있다. 우리들은 쌍둥이인 토마스 사도가, 믿기 위해서 보아야만 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믿는자가 될 것을 격려하신다 (요한 복음 20, 29). 눈먼 사람으로 지낸 36년 이 지 난 후에도 나는 아직도 혼돈스런 새로운 환경에 접할 때에는 마비될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한다.
나는 피정을 지도하러 몇 년 전에 한국에 있었다. 첫날 아침 창 밖으로부터 들려 오는 소음에 공포를 느꼈던 경험이 기억난다. 예수회 건물은 언덕 위에 높이 있어서 서울 시내의 택시들과, 버스와 트럭들이 멀리서 어렴풋이 지나다니는 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비슷한 소리들을 내 평생 들었다. 그것은 혼란과 무질서의 소리들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알려진 안정된 자리에 있으라는 경고인 동시에 모험에 초대하는 소리이다. 나는 나의 공포를 직면하는 것을 배웠으며 예수회 건물이 주는 안전함을 벗어나서 서울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시내 한복판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초대에 응 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현기증나도록 움직이는 것들과 소음의 신비안에서 나는 보는 것도 배웠다.
만일 우리가 불안정함을 단지 피하거나 없애버리는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우리는 눈이 먼 것이다. 우리들은 공포라는 물위를 걸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장님이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눈이 멀게 되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어둠의 공포 때문에 너무 슬픈 나머지 우울증까지 겪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제공할 수 도 있는, 하느님께서 다른 한 손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따른 선택, 결혼, 인간 관계에 대해 극도로 걱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명성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절망적인 형태의 어둠의 상태가 된다. 투명한 시력은 주어진 상품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에서는, 하느님의 보호를 배제하게 되는 방어적인 태도이다. 영적 생활은,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지켜만 보는, 관중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보호하고 있는 확고함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떼어 내는 갈등으로 이루어진 여정이다. 만일 우리 자신들을 변호하고 우리들의 어둠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면서 산다면 우리들은 환상 속에서 사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경험은 겉잡기 힘들고 대리적일 뿐이다.
영적 삶 안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알려지지 않았고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향해나가고 심지어는 신뢰를 하는, 신비를 침착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은 보게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청하였다. 예수님은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다는 약속도 없이 "가서 실로암 우물의 물로 씻으십시오 (요한, 9, 7)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시력을 되찾기를 바란다면 그 자신이 스스로 연못으로 가야 했다. 그의 시력을 되찾는 일은, 그의 어두움의 신비를 예수님의 치유의 약속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에 달려 있다. 눈이 안보인 다는 것은 가혹한 은총이지만 그러나 계속 나아가면서 훌륭하게 성숙될 수도 있다. 나는 "나를 보내는 "실로암 우물"이 무엇이건 간에 그곳으로 좀더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을 배웠다. 나의 삶에 하느님의 약속이 충실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예수님은 그 남자에게 가서 씻으라고 말하신다, 그리고 그는 시력을 찾고 돌아 왔다. 부딪히거나 상처가 생기지 않지만, 가끔 온갖 종류의 어둠 속으로 눈이 안 보이는 나를 보낸다". 그러나 돌아 올 때는 보게 되고 그것을 봄으로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되면 불안정함의 어두움을 직면하는 것은 눈이 안 보이는 것으로부터 내가 배운 영적 삶의 제일 첫 번째 요소이다.
선택과 받아들임 눈먼 사람에게 도전을 가했던 유태인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만의 안전과 명확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각자 마음안에 있는 불안전감으로 들어 갈 것을 제안하신다. 우리는, 이런 지도자들은, 그 신비의 진정함을 불신하려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에게 두 번이나 찾아 오신 것을 주목하라 (요한, 9:1-35). 눈먼 지도자들의 관심은 안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시력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눈이 먼 그 사람은 종교적인 논쟁에 말려들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한때는 눈이 멀었었지만, 지금은 시력을 회복했다는 것만을 알 뿐 이다 (요한 9:25).
눈이 먼 나에게 두 번째 제공 된 영적 삶의 선물은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가끔은, 가장 고통스러운 받아들임이다. 파티 혹은 다른 모임에서, 나는 그 저녁시간을 보낼 사람이나, 같이 앉거나, 같이 이야기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나는 누구에겐가, "미안해요. 저기 내가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가 있어요" 하면서 그 자리를 피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이 나에게 보내신 그 특정한 사람에게 항상 전적으로 마음이 열려져 있거나 고마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똑같은 미소를 띠며, 나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도록 나를 초대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권력이라든가 부를 가진 사람들이, 몇 가지 중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신자들의 영성은 "성령을 받아들임, 즉 그것을 받아들이고 감사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우리들을 비우는, 그런 종류의 가난에 기초 해 있다. 나는 곧잘 경이롭지만 이상한 상황을 통하여 감사의 미덕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몇 번은, 내가 길을 건너가도록 도와준 후에도 계속해서 나를 도와 줄려고 했던 술에 취한 사람이다. 또 한번은 토론토의 지하철역에서 전철이 멈추고 문이 열렸다. 나의 양쪽에서 각각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당겼다. 많은 사람들과 소음 때문에 양쪽 모두 내가 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받아들임은 쉬운 미덕이 아니다. 지나치게 까다롭기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를 정지시키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일어 날 수 있다.
어떤 집에 손님으로서 초대를 받아 갈 때나는 어떤 형태로든 계란 음식은 싫어한다. 나는 가끔 크고 작은 계란 조각을 셀러드에서 발견한다. 가끔 나는 내가 무엇을 먹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다. 한국을 방문했었을 때 내 친구는, "나는 무엇인가 있는 것을 보기는 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라면서 나에게 말을 해 준다. 옷을 사러 갈 때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선택을 해 주어야 한다. 항상 같은 사람과 가는데,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복장도 일관성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인디아의 시인, 타고르는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오신다. 그분은 끊임없이 오신다" 라고 쓴다. 신앙인 인 우리들은 그분이 선택하시는 어떠한 형태건 그 안에서 그분이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받는다.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을 증명을 해야 되는 것에 묶여서, 오시는 분이 그 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을 놓쳐 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어둠이다: 피부 색, 머리 모양, 뚱뚱하거나 날씬하거나, 이런 것들은 분명히 그를 감싸고 참신하게 하겠지만, 오시는 그분은 오히려 꽁꽁 싼 것을 풀고 받아들여 지시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마테오 25:40)라고 말씀하신다. 눈이 멀었다는 이 가혹한 선물은 나의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사치에의 욕망을 전적으로 대치한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선호하는 것과 나만의 바램이 있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잡은 다음에는, 내가 좀더 그분의 도움과 동행을 좀더 받아들이는 것을 배움으로서, 나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배운다.
나의 욕망과 기대의 손을 펴기는 하지만, 나의 손안에 무엇이 들어 와야 한다는, 이미 정해진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분의 현존을 민감하게 만져 볼 수 있기 위해 손을 펴고 있다. 바리세이파 사람들이 믿음의 기회를 잃은 동안,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그의 시력의 회복과 함께 신앙의 빛을 받았다. 눈먼 사람의 받아들임은 바리세이파 사람들의 선택적으로 논란을 좋아하는 것이 나란히 대조가 된다. 영적 삶에서는 요구가 아닌 바램을 가지는 것, 완고한 기대가 아닌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눈먼 나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신앙이 제공하는 시력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그 분이 오시든지, 혹은 무엇을 가지고 오시든지 고마와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의존성과 독립성 나의 삶에서 "나 혼자 할 수 있어"와 , "좀 도와 주실래요? 사이의 긴장을 겪고 있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가 정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비현실적이며 영웅적이 되는 것에 대해 쉽사리 두려워 한다. 또한 너무 의존적이 되거나 남의 짐이 되거나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내 눈이 먼 것을 이용하거나, 게으르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한다. 요한 복음에서의 눈먼 사람은, 그가 누구인가를 나타 내는 데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 그의 부모들이 먹여 살렸던 사람, 그 자신 유다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등, 3가지 현실에 의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삶 안으로 들어 오셔서 낫게 해 주심으로서, 이 세가지 아이덴티티에 의존하고 있던 것을 극적으로 넘어 서게 하였다.
8절에서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 진정 누구인가하고 물어 본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지금 여러 가지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들은 지금 아들에게 책임을 져왔던 자신들로부터 떨어진다. 그들은 다 자란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요한 9: 23) 라고 말한다. 그들 자신이 회당에서 위치를 잃게 될까봐 겁을 낸다. 그의 시력을 되찾음으로서 그는 가족으로부터 독립을 한다. 34절에서, 절대적인 자유가 제공되었다. 새롭게 보게 된 그 남자는, 평생을 몸담았던 회당에서 쫏겨 났다. 그 다음절에서 예수님은, 그를 찾아서 새로운 아이덴티티, 의존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제공해 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신앙과 믿지 못함, 시력과 눈이 멀음이 긴장을 야기시키지만, 시력이 제공하는 자유로 인해 이 사람은, 믿는 자로서 해방이 되었다. 몇 년 전에 나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30일 피정을 하였다.
나는 하느님 안에서 적절하게 의존적이 되는 것과 그가 보내는 도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서 고투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메사추세츠주의 병원의 정신과 병동에서 일을 하라고 보내졌다. 나에게 수퍼바이져가 첫 번째로 한말은, "물론 제일 처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이 병동에서는 독립적이 되야 한다는 겁니다"였다. 나는 적절한 독립과 감사하는 의존간의 긴장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는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긴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것이 나에게는 은총이며 나를 도와 주는 사람에게도 은총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자부심이, 내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이다. 언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편하게 될지 혹은 그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불쾌해 할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내가 쓰고 있는 하얀 색 지팡이로 내 앞을 톡톡 치면서 가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때에는, 지팡이는 항복과 패배의 견딜 수 없는 상징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장님이며 내가 혹시 너무 독립적이 아닌가하는 것에 대해 따질 것 없이, 또 도움 없이 나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이 긴장이 해결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장님이며, 내가 너그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도움의 빛을 고맙게 받아 들 일 수 있다. 내가 가혹한 선물을 저항하지 않을 때, 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내가 은총이 되는 것을 허락 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자주적이 되는 것을 보면서 화를 낼 수도 있다. 그들은 차에 올라타고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친구들을 방문할 수 있고 또 훌륭하게 자선에 관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는 너무도 손쉽게 책을 펴들고 읽는 사람을 보며 원망 할 수도 있다.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피로해 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두 눈을 사용 할 수 있는 나의 친구들 역시 다른 영역에서 비슷하게 의존적이 될 수 있으며 능력의 모자람과 제한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도록 배워야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이 설정한 자주성과 진실된 의존성이 보편적이라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내 친구들은 차를 운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림책 속에 실려있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못미치지만, 책속의 그림 그대로 그리고 싶어하거나 그림속의 사진처럼 기술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할 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이 가진 한계와 싸운다. 한편 이 한계들은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의존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의존적이 된다는 것에 대한 또 하나 고통스러운 단면은, 인내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 시간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에 맞추어야 한다. 자주 나는 누군가가 와서 나의 우편물을 읽어 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가 왔을 때는, 그의 우편물을 먼저 읽고 싶어 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좀더 기다려야 할 는지도 모른다. 나를 도와 줄려고 하는 사람에게 화를 낸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나의 참을 수 없음이 의존성을 더욱 불쾌하게 할 것이다. 길을 건너 갈 때에는 모든 차들이 지나가야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뿐더러 앞차가 지나간 후에도 내가 건너 가는 시간동안 뒤에 다른 차가 지나가지 않도록 거리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눈이 안보이는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눈이 보이는 사람들, 귀가 안 들리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들, 모두 다 그런 악마와 씨름을 한다. 신앙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일상 생활의 어디에서나 접할 수 있는 바로 악마와 나의 눈먼 상태와 씨름을 하는 악마가 똑같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 할 때 나의 영적 삶의 모험에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항상 참지 못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마와 직면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서 "야훼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일이다 (애가 3, 26)라는 구절을 읽는 것을 참으로 힘들게 한다.
내 안에 있는 참지 못하는 에너지가 가끔 폭발을 하면 나는 급히 내방으로 들어오는데 도중에 층계에 내 발가락이 걸리거나 반쯤 열린 문에 내 머리를 박곤 한다. 나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듣는다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실 날을 기다리신다. 복되어라. 그 분을 기다리는 자 (이사야서 30: 18-19). 은혜로운 하느님 앞에서 나는 기다린다. 나는 점차 "섬기는 자"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전환된다. 그분은 나에게 봉사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나를 조용히 가라 앉혀 주고, 나에게 권위가 아닌 강인함을 주고, 단지 단순한 에너지가 아닌 용기를 주신다. 참을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내가 겪는 갈등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의 부족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의 참을성이 부족함- 나에게 희망작인 기대로 부른다.
사람들이 그들의 기도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러 온다. 그들은 내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문을 열기 전에 세 번씩이나 초인종을 누른다. 나의 방으로 급히 들어 와서 재빨리 앉은 다음 나에게 이미 다른 약속에 늦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53 분밖에 할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기도 생활이 매우 공허하고 무미 건조하다고 털어놓는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단지 가만히 침묵속에 앉아서, 자신들이 한말을 자신들이 다시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우리들의 삶은 연속적이라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대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을 성이 없다가나, 지나치게 요구를 하거나, 독립적이라면, 이것이 그대로 하느님과 우리들의 관계안에서도 대부분 반영이 된다. 성서 속의 눈이 먼 그 남자는 예수님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치유하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또 예수님이 다시 그에게 오셔서 그에게 시력을 되찾게 해 준 분임을 나타내고, 신앙의 새로운 비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론 눈이 먼 그 사람의 삶과 영적 삶은 같은 점이 많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이 그 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눈이 먼 상태 때문에, 마치 우리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는 가끔 자신들을 우리 자신의 재산인양 취급하고 창조주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려 한다. 여하한 형태로든 안전하지 못함을 항상 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안전성을 항상 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도구로 간주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어떤 것을 거부해야 되는지에 대해 혼자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만 한다고 느낀다. 눈이 먼 것은 이러한 악마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매일 겪는 육박전은 그들과의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하였으며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눈 이 먼 것처럼, 영적 생활도 끝없는 회심과, 낙오와, 다시 일어서는 것의 연속을 포함한다. 나는 항상 은총속에 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또 항상 고마워 하는 눈이 먼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능력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에 의사소통의 필요는 늘 있어 왔다. 다름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이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를 아는 깊이 만큼 성장한다. 오래된 친구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구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작정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냇다고 관게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알만한 기회가 없었다면 아무리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어도 관게는 여전히 서먹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오해가 있게 마련이다. 상대의 뜻을 헤라여 아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돕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으로 원활한 의사소통법을 가르친다.
이때 좋은 의사소통의 중요한 기초 두 가지를 말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상대방이 나를 알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며 둘째는 내가 아무리 상대의 뜻을 이해했다고 확신 하더라도 우해의 소지가 항상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상대의 말에 마음을 기울이는 태도이다. 이 기초와 빗대어 생각해 볼 때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된 의사소통의 문제는 내가 표현하지 않았으면서도 상대방이 나를 알아주리를 기대하는 마음과 상대방의 말을 깊이 듣기도 전에 내가 상대방을 안다고 넘겨 짚어 생각하는 버릇이다.
특히 관계 속에서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잘 사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이것 때문에 생기는 오해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자기 포기의 과정 깊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의사소통에는 그 자체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소지가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전하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미 경험해서 알게 된 어떤 사실들에 비추어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눈을 경험한 적이 없는 따뜻하 ㄴ나라에 사는 아이들에게 눈을 알게 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상대방의 표현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이 상처로 인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이때 느낀 아픔으로 인해 관점이 너무 강하게 고착되면 의사소통에 장애를 일으키기 쉽다.
이런 경우는 상대방고 관계한다 하면서도 자신의 고착된 관점을 상대방에게 투영하여 관계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상대방과 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연못에 투영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즘의 일종으로 단지 확대된 자신과 관계하고 있을 뿐이다.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를 바로 알 수 있어야 하며 의미 있는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제한된 모습을 깨뜨리며 성숙을 향해 나갈 수 있는 방편을 얻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경험하는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자기 포기의 과정이 필수적인 일이다. 자신의 기준과 감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기준과 관점으로는 이렇게 밖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감각에 어긋나 보이는 상대를 신뢰해 주는 것이다. 이런 의사소통의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다스려야 할 책임과 이에 따른 권위를 우리에게 위임하셨다.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기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아야 할 필요는 명백하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공유할 수 있는 내면의 전제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일이 우리 인간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여전히 우리 경험의 한계가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인격으로 경험하여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나의 경험을 초월하여 그 분 스스로의 표현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내 맘속에 굳어진 관점으로 인해 생기는 나의 감각을 포기하고 내 감각에 옳지 않아 보이더라도 그 분을 신뢰하며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은 내 마음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표현에 마음을 기울이는 순종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 준 - 의사 출신의 선교사
‘나’를 비워야 ‘주님’으로 채워집니다!
상담실을 찾은 내담자 중의 상당수가 심각한 나르시시즘의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보통 ‘자기애적 성격장애(나르시시즘)’라고 부르는 이 병은 정신과 병원에서도 치료하기가 매우 어려운 정신질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타인과의 마찰이 가장 큰 신호입니다. 그 마찰을 통해 교훈을 얻고 성숙해지지 못하는 이들이 바로 성격 장애자라는 것입니다. 일생을 나밖에 모르는 유아적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에 성격 장애는 정신 질환, 즉 정신병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성격 장애자들의 가장 큰 불행은 ‘성숙’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다는 점입니다. 어른의 탈을 쓴 어린이 같은 이들의 욕구는 자신의 욕구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욕구보다 중요하며 다른 사람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대가 좌절되면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거나 심한 좌절감에 빠집니다다.
나르시시즘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자신감을 북돋워주고, 다른 이들과 정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질입니다. 그러나 자기애적 성격 장애자들은 병적인 자기애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지나친 데다 성격적인 응집력도 탄탄해서 누구의 충고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자기애는 남들보다 훨씬 민감한 ‘수치심’에서 비롯된 산물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내면은 너무나 허약하고 쉽게 무너지는 약한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향한 충고를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온 몸에 날을 세우고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수치심을 건드리는 상황을 참지 못하며,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완벽한 인물인 것처럼 연기를 하기도 합니다.
더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는, 아주 긴밀한 관계인 가족 중에 이러한 성격장애를 가진 경우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 특히 정서적 교류가 가장 예민하게 이루어지는 엄마가 성격 장애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자녀의 삶은 매우 팍팍하고 고달프게 됩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특징이 자기자신의 잘못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엄마로서의 자기 행동을 성찰하기보다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녀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도 똑같이 자기애적 성격장애나 경계선 성격장애 등의 질환을 안고 살아가게 합니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는 나르시시즘에 갇힌 성격 장애자들은 공감 능력이 절대적으로부족하기 때문에 자녀들과의 감정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거나 자기가 원하는 성취를 해주기를 바라는 미성숙한 엄마들로 인해서 자녀들이 또다시 성격장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자기로 가득 차 있는 이러한 성격장애를 가지게 되면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기도 매우 힘이 듭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고 좋아하고 칭찬해주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아 교회도 열심히 다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교회 다니는 것 마저 시들해집니다. 사는 재미가 없고, 교회 가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점점 신앙생활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자기애를 가득 가진 자기 안의 ‘자기’를 버리고 ‘주님’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 형성된 일그러지고 말라비틀어진 자아상을 직면해야합니다. 그런 후에 그러한 ‘나’를 버리고 ‘주님’으로 채우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딤후3:1-2) 크리스천투데이
시련과 연단에 대한 신자의 태도
시련과 연단에 대한 신자의 태도 고난 또는 시련의 의미에 대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연단 혹은 시련이 오게 되므로 이런 것들이 전혀 없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연단이 전혀 없는 사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은 없다. 그렇다면 연단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시련은 우리의 잘못을 교정하는 회초리의 역할도 하 지만 그것을 통해 성도의 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섭리적 목적도 있다. 인간의 죄성은 꺼지지 않는 불과 같으며 설사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예외 가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살펴보고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 해 깊이 살펴보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다.
먼저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 교정하고 죄악에서 떠나도록 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래 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 67)고 말한다. 성도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한 채 찍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 의 자리에서 떠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채찍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릇 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며 살 것인가.
이러한 채찍을 통해 우리를 교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반면에 성경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 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히 12: 11)고도 말씀하신다.
고통을 겪을 때는 너무 힘들고 어려워 제발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간구하게 되지만 연단의 기간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시간들 이 참으로 유익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이와 관련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고통스러운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신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돌아보고 추함과 연약함, 나태함,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연단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신의 비참한 실체를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그분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 게 되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에게 있어 이처럼 근원적인 복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자신의 악함과 추함, 죄악 됨을 직시하는 자만이 근본적인 구원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거울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로서 마땅하지만 그것이 무능하고 부패한 인간본성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직시하게 하 시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은혜는 고난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고난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소망과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하시 는 하나님은 분명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 또 연단의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더욱 강해진다.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 하심과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과 은혜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에 있어서도 우리가 견디고 승리하게 됨을 알게 된다. 예전엔 작은 어려움과 연단 앞에도 어찌할 바를 몰라 했지만 이젠 어지간한 어려움과 고통은 힘들게 느끼지 않는다. 연단을 통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어제 나와 함께 하여 주셨던 하나님께서 오늘과 내일도 나와 함께 해 주시리 란 것을 확신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교회된 우리들은 하나님을 배우고 알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깨달아가며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기에 연단을 통해 성도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더 깊이, 더 온전히 알아간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면 연단을 통해 당신을 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그의 백성들은 참으로 복되다. 동시에 연단의 시간들은 우리를 더욱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든다.
특히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적 성숙을 연단과 눈물의 시간들을 통해 얻게 된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이름과 영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은 거친 광야와 험준하고 깊은 골짜기를 힘겹게 걸어가는 가운데 확고해진다. 연단은 신자들 모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비록 괴롭고 힘들더라도 우리는 연단의 시간들을 감사하면서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 에 있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삶의 역설이며 기쁨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러한 삶의 역설에 대해 과연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궁금하다. <개혁신보사설>
누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는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누가 돌판에 십계명을 새겼습니까? 모세가 새겼습니까? 아닙니다. 신명기 5:22절에 보면 모세는 십계명을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가운데, 구름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 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그런데 산 위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분이 나서 그 돌 판을 깨뜨려버립니다. 그 후 다시 돌 판을 만들어서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그때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돌 판에 십계명을 새겨주셨습니다. 신명기 10: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이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즉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글을 쓸 때 무엇으로 쓰십니까? 손으로 쓰지요.
그런데 누가복음 11:20절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손”이라고 묘사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모세는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으라(출12:3)고 명령했는데, 이 어린양은 고난 받으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돌비에 율법을 새기신 것은 유월절로부터 정확히 50일 후였습니다(출31:18, 신16:9~)
그런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후 정확하게 오십일 후에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즉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돌에 글을 새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새기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유월절 후 정확히 50일 후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또한 성령님은 오순절에 강림하신 것입니다.
산 위에는 돌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산에 있는 아무 돌맹이나 바위에 십계명을 새겼습니까? 아닙니다. 두 번 다 모세가 정성 들여 다듬고 깎아서 가지고 간 돌판에 십계명을 새겼습니다. 돌판은 인간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즉 “육의 심비”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중에서… - 변승우목사
하나님의 때 - 시기를 분별하는 일
하나님의 때 - 시기를 분별하는 일
☆ 종종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바르게 찾아 올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은 시시각각 전진해간다. 이스라엘의 한 부족인 잇사갈의 자손들은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졌었다.(대상12:32).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아는 통찰력이 바로 때를 아는 그들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는 적이 종종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다니엘서 2:20-21절을 묵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영으로 이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다.” 즉각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시도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는 시간과 때, 즉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고 인식하기를 바란다.
다음 이사야서의 세 구절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기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이사야 48:6절 2)이사야 43:19절 3) 이사야 42:9절 - 꼭 찾아보셔요.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두 구절에서 “시작되다(sprung forth)”라는 구에 주목하라. 이 단어는 시간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께 물으신다. 종종 그 분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르게 찾아 올 수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이 단어도 변화의 시기를 뜻한다.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의 희랍어 단어가 “새로운”으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은 같아도 두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다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오스’(neos)란 단어는 숫자상으로는 새롭지만 다른 것들과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의 다른 희랍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 단어는 숫자상으로 새로울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네오스와 카이노스라는 두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우리가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네오스인 어떤 사물의 복사품이나 모사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의미에서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다. 우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변화시키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거듭났을 때 몇 가지만 변화한 이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속사람이 완전히 새로워진 카이노스이다. 마태복음 9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두 가지 희랍어 단어들을 모두 사용하셨다.
새(neos) 포도주는 새(kainos) 부대에 담겨질 필요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성령의 새 포도주는 뭔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분 자신을 더욱 많이 우리에게 부어주길 원하신다. 비록 포도주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포도주 분대는 변화할 필요가 있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더욱 많이 부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변화해야만 한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 질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새로운 “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변화의 과정들을 겪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한다면 성령님은 그분 자신인 그 분의 영을 우리 속에 더욱 많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새(neos) 포도주를 새(kainos) 부대에 부으실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때를 위해 준비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 분은 계속해서 우리가 더 많은 포도주 – 더 많은 성령의 부어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이런 변화는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더라도 언제나 좋은 것임은 분병하다. 제자도란 그리스도께 헌신됨을 의미하는데, 그 분께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명하실 때 우리는 변화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하고, 그리고 우리의 “껍질”을 뒤에 남겨 놓아야 합니다. “새로운”으로 쓰이는 이 두 희랍 단어는 또한 “새롭게 함”이란 단어로도 쓰인다. 영어의 “re”와 같은 전치사로서 전치사 “ana”를 이 단어들에 첨가하면 다른 두 개념의 “새롭게 함”이 생긴다. ‘아나네오’ (ananeoo)는 숫자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가져다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쾌함이 있는 새롭게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시거나 우리가 이전에 누렸던 신앙의 상태를 되찾도록 하신다. 다른 단어는 질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인 ‘아나카이노’(anakainoo)이다. 이 형태의 새로워짐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워짐의 다음 단계로 이끄시며, 우리는 이전의 우리와 달라져 있다. 이 과정은 우리는 회복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옛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신선한 새로운 자리로 소생케 하신다. 그 분의 일이 완수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달라졌으며 더 많은 성령의 포도주를 담기 위한 변화에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는 당신을 위해서도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그 분은 때와 시기를 변화시키신다. 민감하고 용퉁성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포도주 부대가 새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막 부어주시려는 새로운 포도주를 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변화에 대한 준비를 갖추어라! <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 더치 쉬츠>
☆ 종종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바르게 찾아 올수 있다. 하나님의 시간은 시시각각 전진해간다. 이스라엘의 한 부족인 잇사갈의 자손들은 때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졌었다.(대상12:32).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를 아는 통찰력이 바로 때를 아는 그들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는 적이 종종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다니엘서 2:20-21절을 묵상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영으로 이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다.” 즉각적으로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시도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는 시간과 때, 즉 하나님의 때를 이해하고 인식하기를 바란다.
다음 이사야서의 세 구절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기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이사야 48:6절 2)이사야 43:19절 3) 이사야 42:9절 - 꼭 찾아보셔요. 그래야 이해가 됩니다. 두 구절에서 “시작되다(sprung forth)”라는 구에 주목하라. 이 단어는 시간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새로운 어떤 일을 막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께 물으신다. 종종 그 분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신다. 그러나 일단 그 분께서 일하기 시작하시면, 그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변화시기는 어쩌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빠르게 찾아 올 수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이 단어도 변화의 시기를 뜻한다. 신약성경에는 두 가지의 희랍어 단어가 “새로운”으로 번역되어 있다. 번역은 같아도 두 단어의 의미는 다르다. 이 다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오스’(neos)란 단어는 숫자상으로는 새롭지만 다른 것들과 구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의 다른 희랍어는 ‘카이노스’(kainos)인데, 이 단어는 숫자상으로 새로울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네오스와 카이노스라는 두 단어의 차이를 구분하는 일은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우리가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네오스인 어떤 사물의 복사품이나 모사품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의미에서 새로운(Kainos) 피조물이다. 우리는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새로운 성품을 주시고, 변화시키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주셨다. 우리는 거듭났을 때 몇 가지만 변화한 이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속사람이 완전히 새로워진 카이노스이다. 마태복음 9장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 두 가지 희랍어 단어들을 모두 사용하셨다.
새(neos) 포도주는 새(kainos) 부대에 담겨질 필요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성령의 새 포도주는 뭔가 다른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그분 자신을 더욱 많이 우리에게 부어주길 원하신다. 비록 포도주가 다른 것은 아니지만, 포도주 분대는 변화할 필요가 있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포도주 부대인 우리는 카이노스, 즉 질적으로 새로워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더욱 많이 부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변화해야만 한다.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 질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새 포도주를 담을 능력이 없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새로운 “때”를 놓치게 될 것이다. 이런 불행을 막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변화의 과정들을 겪게 하신다. 만약 우리가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한다면 성령님은 그분 자신인 그 분의 영을 우리 속에 더욱 많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새(neos) 포도주를 새(kainos) 부대에 부으실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때를 위해 준비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그 분은 계속해서 우리가 더 많은 포도주 – 더 많은 성령의 부어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이런 변화는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더라도 언제나 좋은 것임은 분병하다. 제자도란 그리스도께 헌신됨을 의미하는데, 그 분께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명하실 때 우리는 변화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하고, 그리고 우리의 “껍질”을 뒤에 남겨 놓아야 합니다. “새로운”으로 쓰이는 이 두 희랍 단어는 또한 “새롭게 함”이란 단어로도 쓰인다. 영어의 “re”와 같은 전치사로서 전치사 “ana”를 이 단어들에 첨가하면 다른 두 개념의 “새롭게 함”이 생긴다. ‘아나네오’ (ananeoo)는 숫자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가져다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상쾌함이 있는 새롭게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첫사랑을 회복하도록 하시거나 우리가 이전에 누렸던 신앙의 상태를 되찾도록 하신다. 다른 단어는 질적으로 새로워진다는 뜻인 ‘아나카이노’(anakainoo)이다. 이 형태의 새로워짐에서는 하나님께서 새로워짐의 다음 단계로 이끄시며, 우리는 이전의 우리와 달라져 있다. 이 과정은 우리는 회복시킬 뿐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옛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신선한 새로운 자리로 소생케 하신다. 그 분의 일이 완수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과 같은 모습이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달라졌으며 더 많은 성령의 포도주를 담기 위한 변화에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께는 당신을 위해서도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 그 분은 때와 시기를 변화시키신다. 민감하고 용퉁성이 있어야 한다. 당신의 포도주 부대가 새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막 부어주시려는 새로운 포도주를 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변화에 대한 준비를 갖추어라! < 하나님의 타이밍을 포착하라 – 더치 쉬츠>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장죠셉목사님]
우리는 뒤로 몰러가 침륜(άπώλεία )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침륜이라는 άπώλεία 라는 뜻은 ‘이미 얻은 것이 황폐해 지거나 또는 이미 얻었던 것이 없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즉시 또는 어느 기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허물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는 경험을 했다며 기뻐서 외치는 사람들의 간증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거듭났습니다.
이제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완전한 구원을 얻었노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νουθεσίαν)로 기록하였노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πέσῃ) 조심(βλεπέτω)하라.(고전10:11~12)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말씀 중에서 경계(νουθεσίαν)는 νουθεσία의 목적격으로서 ‘경고, 훈계나 책망’입니다.
넘어짐으로 표기된 πέση는 πίπτω의 2인칭으로서 ‘떨어지다, 망하다, 죄에 빠지다, 있는 것이 없어지다’등입니다. 그리고 조심으로 표기된 βλεπέτω는 βλέπω의 명령형 능동으로서 ‘주의하다, 깨닫다, 식별하다, 삼가다’등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요? 거듭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듭난 후에 거듭남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서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배우지 못해서 혼란스럽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라는 것은 지각(知覺)으로 인식하한 것뿐이지 육신(70%라는 물)이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의 옳지 못한 인성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으로 정욕과 욕심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지각으로 인식하고 말로만 하는 것은 압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육신에서 일어나는 죄의 뿌리가 되는 지난날의 옳지 않았던 성품, 성질, 인식, 말하는 언어, 등이 바꾸어진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음이지, 자기의 육체가 요구하는 소욕에 맡겨서 인성이 바꾸어지지 않은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바울 사도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육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는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육체라는 세포(유전자)나 후천성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소욕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변하도록 살아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것으로써 육체로 이루는 체질이 완전무결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기”라는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거듭남을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면 그 순결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옛 성품이라는 인성이 바꾸어지고, 오로지 성령님의 지배만을 받는 생이 거듭남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은 그렇게 사십니까?” 하고 반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반문이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성품이 바꾸어졌으면 그렇게 반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바꾸어야 할 점이 누구보다도 많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깝기 때문에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해서는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성품을 개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있는 것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개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거듭난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성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자기 인성을 선한 쪽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는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렵니다!” 죄를 용서받고 회개의 경험을 통하여 다시 태어난 기쁨과 감격스러움 속에서 그렇게 행복하게 외칩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경험을 한 후에 다시 빠지게 되는 갈등과 좌절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험을 시작하는 첫걸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완전한 구원을 얻었노라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이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뒤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νουθεσίαν)로 기록하였노라.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πέσῃ) 조심(βλεπέτω)하라.(고전10:11~12)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말씀 중에서 경계(νουθεσίαν)는 νουθεσία의 목적격으로서 ‘경고, 훈계나 책망’입니다.
넘어짐으로 표기된 πέση는 πίπτω의 2인칭으로서 ‘떨어지다, 망하다, 죄에 빠지다, 있는 것이 없어지다’등입니다. 그리고 조심으로 표기된 βλεπέτω는 βλέπω의 명령형 능동으로서 ‘주의하다, 깨닫다, 식별하다, 삼가다’등입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뿌듯하고 행복한 경험을 했음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죄의 소욕과 욕심이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이런 욕심과 생각이 다시 머리를 드는 걸까요? 거듭남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합니다. 거듭난 후에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듭난 후에 거듭남을 유지하도록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는지 어떻게 죄에서 승리하며 성화의 길을 걸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배우지 못해서 혼란스럽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거듭났다”라는 것은 지각(知覺)으로 인식하한 것뿐이지 육신(70%라는 물)이 거듭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거듭난 이후에 올바른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자신의 옳지 못한 인성이 과거와 같이 육신의 타락으로 정욕과 욕심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이지, 지각으로 인식하고 말로만 하는 것은 압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육신에서 일어나는 죄의 뿌리가 되는 지난날의 옳지 않았던 성품, 성질, 인식, 말하는 언어, 등이 바꾸어진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음이지, 자기의 육체가 요구하는 소욕에 맡겨서 인성이 바꾸어지지 않은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바울 사도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고 육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는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육체라는 세포(유전자)나 후천성으로 배양된 습관들이 계속 남아있으므로 육신에 속한 소욕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변하도록 살아야 할 것을 주문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거듭난 것으로써 육체로 이루는 체질이 완전무결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신앙생활을 위해 첫발자국을 내디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린 아기”라는 말입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먼저 기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거듭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 거듭남을 어떻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면 그 순결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나의 옛 자아가 죽고, 옛 성품이라는 인성이 바꾸어지고, 오로지 성령님의 지배만을 받는 생이 거듭남입니다. 언젠가 어느 분이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은 그렇게 사십니까?” 하고 반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반문이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성품이 바꾸어졌으면 그렇게 반문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바꾸어야 할 점이 누구보다도 많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깝기 때문에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해서는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나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모든 악한 성정과 욕심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성품을 개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있는 것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으면서 품성을 개발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거듭난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한 성화가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날마다 자기 인성을 선한 쪽으로 개발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듭나는 순서를 바꾸지 마세요[장죠셉목사]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성경에 거듭남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정확한 곳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물”과 “성령” 둘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에서도 “물”이 먼저요, 다음이 “성령”이라 합니다.
이 뜻은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로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잘못 인식하고 자기 스스로 속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늘은 진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교파마다 물로 거듭남에 대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줄 압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침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예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그대로 남아있고, 못된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고, 악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형식적인 예식은 물로 거듭남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에 앞서 “물로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1. 물로 거듭남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καινόs ανθρωποs)을 입으라.(엡4:22-2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물로 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순서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육체는 세포와 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중에서 물이 70%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aνθρωπο 앞에 형용사 παλαιόs는 낡고, 오래 된, 옛 이라는 뜻은 이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흙이라는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들어진 존재를 “사람(aνθρωποs)”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육체는 30억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생각과 죄에 끌려가는 연약한 세포가 육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한계(界限)를 갖게 되며, 이것이 옛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 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육체로 바꾸는 것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νοus)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롭12:2)
마음이란 νοὔs는 이해력, 태도, 생각, 사상, 판단, 개념, 등 이런 것들을 지니고 태어난 죄 성을 의지적으로 자기의 지.정.의.라는 패턴을 바꾸어서 새롭게, 또는 새로 만듬이 καινόs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패턴으로 바꾸어짐(μεταμορϕόω)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의 지정의를 바꾸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옳지 못한 성품이라는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안 바꾸는 것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되는 독자적인 가치로서 인정되는 자격, 본체에 대한 인성을 갖춘 품격, 본체를 이루는 주체인 지정의로서 나타나는 품격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성령님도. 인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려는 사람도 인격자라야 됩니다.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이루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게 지음을 받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이러한 인격문제는 윤리적인 정의와 심리적인 정의로 보게 되는데, 거듭남은 윤리적이 아니라, 심적인 측면이 변해져야 진정으로 거듭남이 됩니다.
지성(知性) =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인 법으로서 이성에 관하여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지각(知覺)을 바탕으로 정신인 인식을 형성시키는 지적기능입니다. 인식은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으로부터 대상을 분별하는 지각입니다. 따라서 지각으로 이동되는 인식은 육체 밖에서의 것들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져서 깨닫게 합니다.
정성(情性)=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느끼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황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이 밖으로부터 받아지는 쾌활과 불쾌를 의식(意識)하여 일어나는 정적기능입니다. 의식(意識)은 각성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나타내고 판단하는 감정입니다. 감정(感情)으로 이동되는 의식은 대상에게서 느끼고 일어나는 심정으로 의지로 표출하게 합니다.
의지(意志)=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되는 정신적 작용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으로 사려(思慮)를 선택해서 결정하고 실행으로 나타내는 기능입니다. 사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각(知覺)으로 받아진 인식(認識)을 의식적으로 쾌활과 불쾌를 구분하고,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의지로 행동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성되고 성장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로 자라게 됩니다. 지정의가 옳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대부분이 성장하면서 인격을 그릇된 방향으로 틀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의지로 성품을 바꾸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바꾸며 사는 생이 물로 거듭나는 과정이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 합니다. 그러나 사려선택에서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도 있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되면 물로 거듭난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으면 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물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으로 구성시키는 지각(知覺)이 바꿔지지 않으면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십니다.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이 바꿔지지 아니하고 항상 부정적인 식별로 있으면 이러한 인격자에게는 인격적인 성령은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라도 올바른 의지로 행하지 않아서 물(성품)로 거듭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성령이 그에게 들어갑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갖추어질 때에 지정의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려면 지나날 자신이 좋아하고 익숙했던 습관이 바꾸어져야 됩니다. 자기에게 익숙했던 습관은 육신(물)이 요구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에 의해 유전되는 예수 믿기 이전의 육체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지정의가 바꿔지지 않았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새롭게 되라’는 뜻은 세포와 함께 물로 이뤄진 것을 바꿈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성경에서 구습은 형용사 파라이온(παλαιόν)이며, 뜻은 ‘오래되고 낡은 옛것’이라는 파라이오스(παλαιόs)의 목적격입니다. 새로움은 같은 형용사 카이논(καιύόν)이며, ‘다시 만들어서 새로움을 나타냄’이라는 카이노스(καινόs)의 주격입니다. 정리하면 ‘오래되고 낡은 사고방식을 다시 새롭게 바꾸라’는 말입니다. 나를 지배하던 자신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새로운 성품으로 바꾸는 생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새롭게 바꾸어(μεταμορϕόω)졌을 때 온전히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πνευματικόs)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니고데모에게 하신 권면은 물로 거듭난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가 먼저는 물이요 다음이 성령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물”로 거듭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πνευματικόs는 ‘영적인 사람, 영에 속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령을 모신) 사람’이므로, 물이라는 성품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성령의 사람, 곧 성령을 모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나’라는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는 생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몇 곳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합니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면서도 마음(νοὔs)의 변화(μεταμορϕόω)가 없는 비인격적인 성품의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성품이 변화하지 못해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주변이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도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못하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만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물로 거듭났는지부터 점검해 보아여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지못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십일조 생활과 봉사하고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또는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고 있는데, 집사요 장로요, 목사인데 하겠지요. 그런 것은 성품의 변화와는 별개입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상대를 비방하며, 험담하며, 시기하며, 질투하며, 악담까지 하는 성품의 사람이라면 성령은 고사하고 물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자신의 강한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자신의 성품, 옛 사람을 마꾸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이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물로 거듭남을 먼저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대로 심판받고, 행함대로 형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장죠셉 목사>
이 뜻은 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로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잘못 인식하고 자기 스스로 속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다. 오늘은 진정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설명하려 합니다. 교파마다 물로 거듭남에 대하여 각기 다르게 가르치고 있는 줄 압니다. 말씀을 듣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침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예식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아가 그대로 남아있고, 못된 성질이 그대로 남아있고, 악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형식적인 예식은 물로 거듭남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기”에 앞서 “물로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1. 물로 거듭남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καινόs ανθρωποs)을 입으라.(엡4:22-2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물로 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순서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먼저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인간의 육체는 세포와 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중에서 물이 70%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aνθρωπο 앞에 형용사 παλαιόs는 낡고, 오래 된, 옛 이라는 뜻은 이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흙이라는 먼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만들어진 존재를 “사람(aνθρωποs)”이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육체는 30억이라는 세포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왔고, 그때부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생각과 죄에 끌려가는 연약한 세포가 육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한계(界限)를 갖게 되며, 이것이 옛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죄 성을 가지고서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육체로 바꾸는 것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νοus)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롭12:2)
마음이란 νοὔs는 이해력, 태도, 생각, 사상, 판단, 개념, 등 이런 것들을 지니고 태어난 죄 성을 의지적으로 자기의 지.정.의.라는 패턴을 바꾸어서 새롭게, 또는 새로 만듬이 καινόs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패턴으로 바꾸어짐(μεταμορϕόω)을 물로 거듭남이라 합니다. 왜 사람들은 자기의 지정의를 바꾸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옳지 못한 성품이라는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안 바꾸는 것은 명령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자기 틀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권리나 의무의 주체가 되는 독자적인 가치로서 인정되는 자격, 본체에 대한 인성을 갖춘 품격, 본체를 이루는 주체인 지정의로서 나타나는 품격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십니다. 성령님도. 인격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려는 사람도 인격자라야 됩니다.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이루는 부분이 하나님을 닮게 지음을 받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입니다. 이러한 인격문제는 윤리적인 정의와 심리적인 정의로 보게 되는데, 거듭남은 윤리적이 아니라, 심적인 측면이 변해져야 진정으로 거듭남이 됩니다.
지성(知性) =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사회적인 법으로서 이성에 관하여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지각(知覺)을 바탕으로 정신인 인식을 형성시키는 지적기능입니다. 인식은 대상을 감지하는 감각으로부터 대상을 분별하는 지각입니다. 따라서 지각으로 이동되는 인식은 육체 밖에서의 것들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바르게 분별하고 알아져서 깨닫게 합니다.
정성(情性)=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느끼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상황판단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이 밖으로부터 받아지는 쾌활과 불쾌를 의식(意識)하여 일어나는 정적기능입니다. 의식(意識)은 각성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여 나타내고 판단하는 감정입니다. 감정(感情)으로 이동되는 의식은 대상에게서 느끼고 일어나는 심정으로 의지로 표출하게 합니다.
의지(意志)=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도덕적인 행위의 주체가 되고, 객체가 되는 정신적 작용을 말합니다.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마음으로 사려(思慮)를 선택해서 결정하고 실행으로 나타내는 기능입니다. 사려는 여러 가지일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각(知覺)으로 받아진 인식(認識)을 의식적으로 쾌활과 불쾌를 구분하고, 그 하나를 결정하는 의지로 행동하게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형성되고 성장되는 과정에서 이 세 가지로 자라게 됩니다. 지정의가 옳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나 그릇된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면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대부분이 성장하면서 인격을 그릇된 방향으로 틀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의지로 성품을 바꾸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바꾸며 사는 생이 물로 거듭나는 과정이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 합니다. 그러나 사려선택에서 자신의 의지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변화될 수도 있고,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되면 물로 거듭난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으면 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틀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물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으로 구성시키는 지각(知覺)이 바꿔지지 않으면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십니다. 받아들이는 의식(意識)이 바꿔지지 아니하고 항상 부정적인 식별로 있으면 이러한 인격자에게는 인격적인 성령은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을지라도 올바른 의지로 행하지 않아서 물(성품)로 거듭나지 아니하는데 어떻게 성령이 그에게 들어갑니까? 그러므로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이 갖추어질 때에 지정의를 새롭게 바꾸는 것이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심령(νοus)으로 새롭게 되려면 지나날 자신이 좋아하고 익숙했던 습관이 바꾸어져야 됩니다. 자기에게 익숙했던 습관은 육신(물)이 요구하는 욕심이었습니다. 옛 사람은 아담에 의해 유전되는 예수 믿기 이전의 육체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지정의가 바꿔지지 않았으면 옛 성품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새롭게 되라’는 뜻은 세포와 함께 물로 이뤄진 것을 바꿈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성경에서 구습은 형용사 파라이온(παλαιόν)이며, 뜻은 ‘오래되고 낡은 옛것’이라는 파라이오스(παλαιόs)의 목적격입니다. 새로움은 같은 형용사 카이논(καιύόν)이며, ‘다시 만들어서 새로움을 나타냄’이라는 카이노스(καινόs)의 주격입니다. 정리하면 ‘오래되고 낡은 사고방식을 다시 새롭게 바꾸라’는 말입니다. 나를 지배하던 자신을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새로운 성품으로 바꾸는 생이 물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지정의가 새롭게 바꾸어(μεταμορϕόω)졌을 때 온전히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πνευματικόs)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예수님께서 두 번째 니고데모에게 하신 권면은 물로 거듭난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십니다. 거듭남의 순서가 먼저는 물이요 다음이 성령입니다.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물”로 거듭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πνευματικόs는 ‘영적인 사람, 영에 속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령을 모신) 사람’이므로, 물이라는 성품이 거듭난 사람이라야 성령의 사람, 곧 성령을 모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거듭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물로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나’라는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는 생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몇 곳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합니다.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는 옛 사람(παλαιόs aνθρωποs)에서 새 사람으로 변화(μεταμορϕόω)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났다 하면서도 마음(νοὔs)의 변화(μεταμορϕόω)가 없는 비인격적인 성품의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성품이 변화하지 못해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자아의 그루터기가 완전히 잘라지지 않은 채 올라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신뢰할 수 없는 육신의 감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세상의 상식과 학문으로 터득한 전공분야로 항변하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주변이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생각과 감정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냥 휘둘려버리는 사람이라면 그도 물로 거듭난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멈추지 못하고 육신에서 올라오는 감정과 충동적인 생각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라면 물로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만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물로 거듭났는지부터 점검해 보아여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침을 받지못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십일조 생활과 봉사하고 있는데, 성가대원으로 또는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고 있는데, 집사요 장로요, 목사인데 하겠지요. 그런 것은 성품의 변화와는 별개입니다.
지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상대를 비방하며, 험담하며, 시기하며, 질투하며, 악담까지 하는 성품의 사람이라면 성령은 고사하고 물로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품의 변화는 자신의 강한 의지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만, 자신의 성품, 옛 사람을 마꾸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문제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이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물로 거듭남을 먼저 강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대로 심판받고, 행함대로 형벌이 주어진다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에 무엇부터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장죠셉 목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정동수 목사]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닦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십니다.” “네! 이 열차를 놓쳤으면 네 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릴 뻔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뜁니다. 하지만 영원한 미래를 생각하며 참된 길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자동차나 비행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다 설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먼지 가루를 땅바닥에 놓고 아무리 수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도 자동차나 비행기가 저절로 생겨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롭게 이루어진 인간이란 존재가 우연히 생겨날 수 있을까요? 인간과 온 우주를 우연의 결과로 돌리는 진화론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가설과 이론뿐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브리서 3장 4절) 성경은 말합니다. 우주 만물을 보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위엄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1장 20절).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해와 달과 별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충돌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시계 부품을 통에 넣고 흔든다고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설계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분을 무시하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장 21-23절).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지 않습니까? 이교도들은 돌덩어리를 깎고 나무를 새겨서 만든 각종 형상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__________슬픔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세상에 슬픔과 혼돈이 가득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스스로 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이사야서 59장 1절) 인간이 제멋대로 행한 죄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성연애로 인한 에이즈(AIDS)의 만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 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로마서1장 27절)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므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 물건을 검사하여 설계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다 폐기시키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도 창조물인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존재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더불어 공의를 집행하십니다.
◆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면서도 눈앞의 일에만 빠져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고 쉴 새 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이 치닫고 있는 방향은 보지 못합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브리서 9장 27절)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파멸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영원의 문제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같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방향 없는 인생, 떠돌다 끝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부담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선하고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까맣게 잊고 있던 일과 자신도 모르던 마음의 의도까지 낱낱이 다 밝혀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로마서 3장 10-11절). TV나 신문에 나오는 흉악한 범죄자들만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죄인이면 마땅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애써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철학에 몰두하고 종교에 심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심판을 잊게 해주거나 조잡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는 그 어떤 노력에도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모든 사람의 죄의 대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로마서 5장 8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9장 13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조물인 우리 사람은 창조주께서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듯이 지금 이 글을 읽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잊은 채 살아 가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ww.KeepBible.com www.CBCK.org www.KACR.or.kr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준비해 놓으신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온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당신은 이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어떤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막 떠나려는 기차에 가까스로 올라탔습니다. 아직도 숨이 가빠 헐떡이며 땀을 닦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놓칠 뻔했는데 천만다행이십니다.” “네! 이 열차를 놓쳤으면 네 시간이나 무료하게 기다릴 뻔했습니다.” 짧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뜁니다. 하지만 영원한 미래를 생각하며 참된 길로 가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자동차나 비행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다 설계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입니다. 먼지 가루를 땅바닥에 놓고 아무리 수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도 자동차나 비행기가 저절로 생겨날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자동차나 비행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신비롭게 이루어진 인간이란 존재가 우연히 생겨날 수 있을까요? 인간과 온 우주를 우연의 결과로 돌리는 진화론은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가설과 이론뿐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집마다 지은 자가 있으되 모든 것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브리서 3장 4절) 성경은 말합니다. 우주 만물을 보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권능과 위엄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로마서 1장 20절). 저 하늘을 보십시오. 해와 달과 별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충돌하지 않고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을까요? 시계 부품을 통에 넣고 흔든다고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설계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분을 무시하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져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짐승이나 해와 달 같은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로마서 1장 21-23절).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지 않습니까? 이교도들은 돌덩어리를 깎고 나무를 새겨서 만든 각종 형상에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 세상의 __________슬픔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왜 세상에 슬픔과 혼돈이 가득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스스로 죄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의 손이 짧아져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그분의 귀가 둔하여서 듣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이사야서 59장 1절) 인간이 제멋대로 행한 죄악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지 않습니까? 동성연애로 인한 에이즈(AIDS)의 만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이와 같이 본래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를 향해 욕정이 불 일 듯 하여 남자가 남 자와 더불어 보기 흉한 짓을 행함으로 자기 잘못에 합당한 보응을 자기 속에 받았느니라.”(로마서1장 27절)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므로 모든 사람을 무조건 사랑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건을 만드는 사람마다 자기 물건을 검사하여 설계대로 되지 않은 것은 다 폐기시키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도 창조물인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 행하면서 창조주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공의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존재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더불어 공의를 집행하십니다.
◆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멸망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면서도 눈앞의 일에만 빠져있습니다. 시간이 아깝다고 쉴 새 없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인생이 치닫고 있는 방향은 보지 못합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브리서 9장 27절) 부디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파멸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영원의 문제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나중으로 미루지 마십시오. “미루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같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방향 없는 인생, 떠돌다 끝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 선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죄에 대한 부담을 느낄 때 사람들은 흔히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선하고 낫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까맣게 잊고 있던 일과 자신도 모르던 마음의 의도까지 낱낱이 다 밝혀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도 자신 있으십니까? 우리의 창조주요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합니다(로마서 3장 10-11절). TV나 신문에 나오는 흉악한 범죄자들만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죄인이면 마땅히 죄의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행을 하려고 애써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철학에 몰두하고 종교에 심취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심판을 잊게 해주거나 조잡한 변명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는 그 어떤 노력에도 구원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받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모든 사람의 죄의 대가를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로마서 5장 8절)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내가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9장 13절).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같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조물인 우리 사람은 창조주께서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이제 당신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우연이 아니듯이 지금 이 글을 읽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잊은 채 살아 가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기 원하시는 분은 다음의 사이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www.KeepBible.com www.CBCK.org www.KACR.or.kr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준비해 놓으신 은혜의 선물을 받으십시오. 온 우주를 지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태복음 11장 28절) 당신은 이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 사랑과 은혜가 가득한 선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아 주는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구조하였도다, 하시나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9/28/2009
믿음의 신자들이 진정으로 자유하는 길
믿음의 신자들이 진정으로 자유하는 길
진정한 자유함 이라는 글이 있길래 생각이 나서 우리들 믿음의 신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몇자 올리고자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요한복음 8:32) 진리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말씀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머리에 각인된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오기 까지는 각 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말씀이 머리에서 마음(가슴)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10년 20년이 되어 교회에 나와 주일날마다 예배는 드리지만 아직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가 그냥 이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분인데도 그 말씀을 깨달아 자기의 삶에 적용을 시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지식으로 머리에만 담아두면서 알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아 안타갑기만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알고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구절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서 깨닫게 되면 진정으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20)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6:6) 이 두 구절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이면 태어날 때부터 존재적인 죄인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달린 2000년 전의 십자가에 나의 육신이 달려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옛 구습을 좇는 썩어질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또 그와 함께 나의 육신이 비록 살아있지만 육신도 함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내가(나의 옛사람과 육신 모두)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잉태치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와 좌정하지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주님만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신은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많은 신자들이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인인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주님만 십자가에서 죽고 자신은 죽지 않는다면 계속 죄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 죄의 종노릇하다가는 정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알고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니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내가 자유할려고 한다면 내가 죽은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생명]이 나에게 들어와 좌정할 때 내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세상속에서 내 육체가운데 살지만 나의 영혼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나의 육신의 혈기와 시기, 질투, 이기심,등 이러한 옛사람의 구습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달렸던 그 십자가에 내가 함께 죽은 십자가라고 마음으로 믿으면 나의 허물과 죄 그리고 고난과 역경, 질병등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고 가신 것이기에 나는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있는것 같은데 자기 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을 통제를 잘 못합니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자극이나 주위의 환경이 자기를 압박을 할 때 자기 마음에서 불쑥 올라오는 충동을 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올라오는 그대로 그 감정을 표현하고 표출합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파탄이 나고 불행해지지만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때는 늦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또는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혈기를 부리면서 심한 욕설과 행패를 부립니다. 그런데 행한 자기는 곧 이를 후회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면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계속되면서 서로간의 불신은 증폭되면서 참다운 주님의 사랑이 식은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안과 교회밖에서의 생활이 다른 신자들이 우리 주위에서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믿어면서도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것에서 해방되면서 자유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진실로 십자가의 공로로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옛사람의 구습(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당신의 옛사람도 함께 못박혔음을 믿고 또 십자가에 당신의 육신도 달렸음을 진정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당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 것은 이는 당신의 본성적인 모든 성품을 다 못박았다는 것으로서 당신의 육신안에 있는 선한 성품(선한 자아, 착한 행실, 정이 많음)도 또는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왜곡된 성품(쓴 뿌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전부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당신의 육신 속에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당신의 옛사람의 구습(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올라옴으로 자신의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올라오는 그대로 행합니다. 이 얼마나 우둔한 행위입니까? 성경은 무슨 고전 소설이나 아니면 무슨 위인전이 아니고 영서(靈書)입니다.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의 속임수에 속고 있습니다. 사탄이 성경의 말씀의 믿음으로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서 때때로 격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당신의 것인 것 같지만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인정할 때 주님의 십자가에 당신의 옛사람의 행실도 다 못박혔습니다. 즉 당신의 옛사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당신은 실상 새사람이 되어 있는데 사탄마귀는 생각을 통해 그것을 회석시키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복13:2).
당신도 괴롭다구요? 그렇겠죠, 아주 괴로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가고는 있는데 욱 하는 성질을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하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 말씀에 권위를 주고 인정하십시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마귀에게 승리하셨습니다.(골로새서2:5) 그러므로 당신도 오직 2000년 전에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당신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생각을 통해서 역사를 합니다(요한13:2) 마귀의 생각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생각으로 지은 죄를 참소하며, 용서를 하지 못하게 하며, 생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당신은 철저하게 거절해야만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합니까? 그 올라오는 생각을 즉시 즉시 거절하고 거부하십시요. 당신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왜곡된 성품, 즉 자신의 쓴 뿌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주지 아니하고 무시해서이지 그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사탄마귀가 가면으로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마귀에게 속아서 계속 질 수 밖에 없습니다.그 사탄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당신의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생각도 아닙니다. .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통해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야 승리하고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되는데 오늘 이 시간 이런 영적인 성경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는 이것 또한 당신에게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고 신앙생활에서 자유하며 하나님께 더 이상 죄를 짓지를 않을려면 이렇게 하십시요
1. (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 이런 생각이 올라오면 나의 생각이 아님을 알고 그 생각 즉시 자체를 거부히십시요. 이제 당신의 마음에서 그런 옛사람의 구습이 올라올 때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2. 올라오는 것은 곧 죄가 올라오는 것임으로 "나는 이미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었다 "라고 큰 소리로 선포하며 외치십시요. 그리고 "내안에는 예수께서 사신다" 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3. 사탄마귀의 생각을 거절하면서 "마귀야 너는 이제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너와는 관계가 끊어졌다" 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마귀를 향해 대적하고 거절하면 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4. 당신이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할 일은 마귀의 생각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 성경의 말씀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며, 진짜 중요한 부분은 당신이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으로 갈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은 용서를 받았으면서 정작 당신은 용서치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상대방을 용서하지않는다면 당신은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동시에 죄아래에서 허덕이며 계속 주님앞에 죄를 짓게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용서하고 그동안 용서하지 아니한 그 죄도 주님께 기도하면서 진솔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야 치유가 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오직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받아들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계속되어지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온전히 주님만 생각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수고를 그치면서 진정으로 자유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때 우리는(나는)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 에벤에셀교회 - 박찬호 목사
진정한 자유함 이라는 글이 있길래 생각이 나서 우리들 믿음의 신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몇자 올리고자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요한복음 8:32) 진리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가 영접하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말씀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머리에 각인된 말씀이 마음으로 내려오기 까지는 각 개인에 따라 다릅니다. 말씀이 머리에서 마음(가슴)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은지 10년 20년이 되어 교회에 나와 주일날마다 예배는 드리지만 아직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가 그냥 이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분인데도 그 말씀을 깨달아 자기의 삶에 적용을 시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지식으로 머리에만 담아두면서 알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아 안타갑기만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알고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구절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서 깨닫게 되면 진정으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20)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6:6) 이 두 구절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진실로 받아들이면 태어날 때부터 존재적인 죄인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달린 2000년 전의 십자가에 나의 육신이 달려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옛 구습을 좇는 썩어질 나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또 그와 함께 나의 육신이 비록 살아있지만 육신도 함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내가(나의 옛사람과 육신 모두)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믿음이 자신의 마음에 잉태치 않으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들어와 좌정하지 못합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에 나오는 신자들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주님만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알고 있으며 자신은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다시말해 많은 신자들이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면서도 죄인인 자신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알고 주님만 십자가에서 죽고 자신은 죽지 않는다면 계속 죄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 죄의 종노릇하다가는 정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알고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니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내가 자유할려고 한다면 내가 죽은 십자가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생명]이 나에게 들어와 좌정할 때 내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세상속에서 내 육체가운데 살지만 나의 영혼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나의 육신의 혈기와 시기, 질투, 이기심,등 이러한 옛사람의 구습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음으로 내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달렸던 그 십자가에 내가 함께 죽은 십자가라고 마음으로 믿으면 나의 허물과 죄 그리고 고난과 역경, 질병등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고 가신 것이기에 나는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받았다는 믿음은 있는것 같은데 자기 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을 통제를 잘 못합니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자극이나 주위의 환경이 자기를 압박을 할 때 자기 마음에서 불쑥 올라오는 충동을 억제를 못합니다. 그래서 올라오는 그대로 그 감정을 표현하고 표출합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파탄이 나고 불행해지지만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야 후회를 합니다.
하지만 그 때에는 때는 늦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또는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혈기를 부리면서 심한 욕설과 행패를 부립니다. 그런데 행한 자기는 곧 이를 후회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면서 자책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 다람쥐 채바퀴 돌듯이 계속되면서 서로간의 불신은 증폭되면서 참다운 주님의 사랑이 식은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안과 교회밖에서의 생활이 다른 신자들이 우리 주위에서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믿어면서도 자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것에서 해방되면서 자유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진정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진실로 십자가의 공로로 당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옛사람의 구습(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당신의 옛사람도 함께 못박혔음을 믿고 또 십자가에 당신의 육신도 달렸음을 진정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당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 것은 이는 당신의 본성적인 모든 성품을 다 못박았다는 것으로서 당신의 육신안에 있는 선한 성품(선한 자아, 착한 행실, 정이 많음)도 또는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왜곡된 성품(쓴 뿌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전부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당신의 육신 속에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당신의 옛사람의 구습(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은 당신 것이 아닙니다.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올라옴으로 자신의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올라오는 그대로 행합니다. 이 얼마나 우둔한 행위입니까? 성경은 무슨 고전 소설이나 아니면 무슨 위인전이 아니고 영서(靈書)입니다.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탄의 속임수에 속고 있습니다. 사탄이 성경의 말씀의 믿음으로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에서 때때로 격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당신의 것인 것 같지만 당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인정할 때 주님의 십자가에 당신의 옛사람의 행실도 다 못박혔습니다. 즉 당신의 옛사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당신은 실상 새사람이 되어 있는데 사탄마귀는 생각을 통해 그것을 회석시키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복13:2).
당신도 괴롭다구요? 그렇겠죠, 아주 괴로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나가고는 있는데 욱 하는 성질을 제대로 통제를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하고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 말씀에 권위를 주고 인정하십시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마귀에게 승리하셨습니다.(골로새서2:5) 그러므로 당신도 오직 2000년 전에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당신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생각을 통해서 역사를 합니다(요한13:2) 마귀의 생각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생각으로 지은 죄를 참소하며, 용서를 하지 못하게 하며, 생각으로 현재의 상황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그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당신은 철저하게 거절해야만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유하기를 원합니까? 그 올라오는 생각을 즉시 즉시 거절하고 거부하십시요. 당신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왜곡된 성품, 즉 자신의 쓴 뿌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혔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음을 주지 아니하고 무시해서이지 그 말씀은 진리인 것입니다. 사탄마귀가 가면으로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마귀에게 속아서 계속 질 수 밖에 없습니다.그 사탄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당신의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생각도 아닙니다. . 이렇게 성경의 말씀을 통해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야 승리하고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되는데 오늘 이 시간 이런 영적인 성경의 말씀을 알게 되었다는 이것 또한 당신에게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고 신앙생활에서 자유하며 하나님께 더 이상 죄를 짓지를 않을려면 이렇게 하십시요
1. (혈기, 시기, 질투, 이기심, 증오, 미움 등) 이런 생각이 올라오면 나의 생각이 아님을 알고 그 생각 즉시 자체를 거부히십시요. 이제 당신의 마음에서 그런 옛사람의 구습이 올라올 때는 단호히 그것을 거절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2. 올라오는 것은 곧 죄가 올라오는 것임으로 "나는 이미 죄에 대해 십자가에 죽었다 "라고 큰 소리로 선포하며 외치십시요. 그리고 "내안에는 예수께서 사신다" 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3. 사탄마귀의 생각을 거절하면서 "마귀야 너는 이제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나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내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너와는 관계가 끊어졌다" 라고 외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마귀를 향해 대적하고 거절하면 마귀가 심어주는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4. 당신이 용서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할 일은 마귀의 생각을 거절하는 것이며, 또 성경의 말씀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며, 진짜 중요한 부분은 당신이 상대방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으로 갈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은 용서를 받았으면서 정작 당신은 용서치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상대방을 용서하지않는다면 당신은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동시에 죄아래에서 허덕이며 계속 주님앞에 죄를 짓게 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용서하고 그동안 용서하지 아니한 그 죄도 주님께 기도하면서 진솔히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야 치유가 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오직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받아들일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계속되어지면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온전히 주님만 생각하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수고를 그치면서 진정으로 자유하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때 우리는(나는) 진정으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 에벤에셀교회 - 박찬호 목사
왜 첫째와 둘째 사망이 있습니까? [ 장죠셉 목사님]
왜 첫째와 둘째 사망이 있습니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구속의 경륜을 알리시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가 두 번째 기회이며 이 기회를 주신 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은혜로운 사실을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은혜에 대하여 잘못인식하고 은혜를 주신 주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ἵπποs λευκόs)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活-τόξον)을 가졌고 면류관(στέϕανοs)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6:1~2) 성자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두움과 싸우는 내용입니다. 아담 때 빼앗겼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세상에 와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십자가 사건이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유럽으로 전달하면서 온 세계로 전파되는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믿음의 승리를 보여 왔고, 그 결과는 오늘날의 복음세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내용들을 보면, 첫째는 ‘흰말을 탄자가 적그리스도이며, 그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움의 권세’다. 둘째는 ‘흰말은 희다는데서 성결을 말하지만 면류관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가장하는 어두움의 속임수’다. 셋째는 ‘손에 활을 가지고 이기려하므로 주님이 누구와 싸우시겠다고 활을 받았겠느냐? 만물을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이 아니라 원수’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한국교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흰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τόξον)을 가졌고....(2) 살 활(活-life)로 해석될 ‘토쏜(τόξον)’을 영어와 한글성경은 ‘활(弓-bow)’로 잘못 번역되었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어 ‘엨온(ἔχων)’은 ‘얻음’이므로, ‘活(τόξον)’은 생명(Relief)을 살림입니다.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를 ‘그(리스도)가 살리는 생명을 가졌고’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라고 성경은 교훈한다.(요3:17)
활(τόξον)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만세전부터 “살리는 생명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τόξον입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육신으로 오실 때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ἔχων)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가 “아담 때 빼앗겼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고 자신이 지상에 온” 뜻이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흰말을 탄자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흰말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자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결코 성결할 수 없고, 또한 면류관(στέϕανοs)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활을 가지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하더라는 말씀은 일찍이 인류에게 주어진 생명이 아담 때 빼앗긴 것을 다시 찾으시려는 그리스도의 노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할 조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은총을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에서 구원하심(Justification)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인류의 "원죄를 사해(Justification)" 주셨다고 해서 "완전한 구속(Glorification)"을 이뤄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함으로써 하나님 스스로의 존엄성과 권위를 유지하며, 동시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삶의 기간을 연장시킨 후에 죽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아닌 첫 번째 죽음에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서서 죽기 전에 자신의 생애 동안에 개인적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답해야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영원한 운명은 두 번째 시험이었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Sanctification)의 조건을 어떻게 이루었느냐(성화)에 따라서 하늘나라와 연단장(Bema)으로 결정될 것이며, 같은 하늘나라일지라도 첫째하늘(Paradais), 둘째하늘(Baselleia), 셋째하늘(Sion), 예루살렘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시험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죽음(유황불 못)이 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인류는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망입니다. 이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을 뿐이지 이 자체만으로 인간을 성화시켜 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삶을 얻었다”하지 않으시고 “삶을 얻으리라(ζωοποιηθηονται)”하셨는데, 이 단어는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므로 개인적인 삶의 결과(성화)에 따라서 완전한 구원(Sanctification)이 결정된다는 말씀을 오역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계획 속에서 첫째사망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삶이 연장되도록 하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기초한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 유황불 못에 던져 죽이려고 악인들을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고 독재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 그들을 그냥 첫째사망의 권세아래 놔두시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은 아담의 후손인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결정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그래서 행함대로 심문받고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기에 성화가 이뤄지지 않은 원죄사함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구속의 경륜을 알리시고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가 두 번째 기회이며 이 기회를 주신 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은혜로운 사실을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은혜에 대하여 잘못인식하고 은혜를 주신 주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ἵπποs λευκόs)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活-τόξον)을 가졌고 면류관(στέϕανοs)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6:1~2) 성자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어두움과 싸우는 내용입니다. 아담 때 빼앗겼던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서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세상에 와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복음이 세계로 전파되게 하였습니다. 그의 십자가 사건이후에 사도들과 제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유럽으로 전달하면서 온 세계로 전파되는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당시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박해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로서 믿음의 승리를 보여 왔고, 그 결과는 오늘날의 복음세계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내용들을 보면, 첫째는 ‘흰말을 탄자가 적그리스도이며, 그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어두움의 권세’다. 둘째는 ‘흰말은 희다는데서 성결을 말하지만 면류관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가장하는 어두움의 속임수’다. 셋째는 ‘손에 활을 가지고 이기려하므로 주님이 누구와 싸우시겠다고 활을 받았겠느냐? 만물을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이 아니라 원수’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이 한국교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흰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τόξον)을 가졌고....(2) 살 활(活-life)로 해석될 ‘토쏜(τόξον)’을 영어와 한글성경은 ‘활(弓-bow)’로 잘못 번역되었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주어 ‘엨온(ἔχων)’은 ‘얻음’이므로, ‘活(τόξον)’은 생명(Relief)을 살림입니다.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를 ‘그(리스도)가 살리는 생명을 가졌고’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라고 성경은 교훈한다.(요3:17)
활(τόξον)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만세전부터 “살리는 생명을 가지셨습니다.” 이것이 τόξον입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육신으로 오실 때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ἔχων)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자 예수가 “아담 때 빼앗겼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고 자신이 지상에 온” 뜻이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흰말을 탄자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고 흰말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자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결코 성결할 수 없고, 또한 면류관(στέϕανοs)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활을 가지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하더라는 말씀은 일찍이 인류에게 주어진 생명이 아담 때 빼앗긴 것을 다시 찾으시려는 그리스도의 노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야 할 조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은총을 통하여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 것입니다.
이것이 원죄에서 구원하심(Justification)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시험에 실패한 결과를 변경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아담으로부터 유전되는 인류의 "원죄를 사해(Justification)" 주셨다고 해서 "완전한 구속(Glorification)"을 이뤄주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첫 번째 실패에 대한 형벌인 죽음을 집행함으로써 하나님 스스로의 존엄성과 권위를 유지하며, 동시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놀랍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의롭게 살든지, 또는 악하게 살든지를 불문하고 제한된 삶의 기간을 연장시킨 후에 죽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첫 번째 죽음은 첫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한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아닌 첫 번째 죽음에서 생명이 연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서서 죽기 전에 자신의 생애 동안에 개인적으로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답해야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영원한 운명은 두 번째 시험이었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Sanctification)의 조건을 어떻게 이루었느냐(성화)에 따라서 하늘나라와 연단장(Bema)으로 결정될 것이며, 같은 하늘나라일지라도 첫째하늘(Paradais), 둘째하늘(Baselleia), 셋째하늘(Sion), 예루살렘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시험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은 “둘째 사망”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죽음(유황불 못)이 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인류는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망입니다. 이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셨을 뿐이지 이 자체만으로 인간을 성화시켜 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삶을 얻었다”하지 않으시고 “삶을 얻으리라(ζωοποιηθηονται)”하셨는데, 이 단어는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므로 개인적인 삶의 결과(성화)에 따라서 완전한 구원(Sanctification)이 결정된다는 말씀을 오역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의 계획 속에서 첫째사망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이 삶이 연장되도록 하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기초한 심판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지 유황불 못에 던져 죽이려고 악인들을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고 독재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왜 그들을 그냥 첫째사망의 권세아래 놔두시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죽음은 아담의 후손인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위와 결정에 따라 심판을 받는 것이 공정한 처사입니다. 그래서 행함대로 심문받고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기에 성화가 이뤄지지 않은 원죄사함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그릇된 생각 세가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그릇된 생각 세가지
1. 율법주의(legalism) 율법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과오는 이미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성령은 바울을 감동시켜 영혼을 죽이는 이러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쓰게 했으며, 이 편지가 로마서이다.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은혜로 된다는 내용이다. 이 논쟁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성구로 결론을 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 반율법주의(antinomiamism) 율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주장으로,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성령을 죽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령은 신약성경 중의 한 책을 쓰게 했으며, 이것이 야고보서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율법에서 구함을 받았으나 율법 없이 그저 내버려지거나 율법 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 즉 생명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을 자유의 법이라고 하며,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랑의 법이다.
이 법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얻거나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얻는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 사실을 야고보는 다음 구절에서 요약해 말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수 있는가? 정말로 그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이 성경 말씀을 다른 성경 말씀처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그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가? 그리고,
둘째로 그 말씀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법칙을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에 적용시켜 보자.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죄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지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앞에" 즉 "하나님 보시기에" 라는 말이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겠는가? 그 대답은 분명하다.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람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행위"로 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그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고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 "뿌리"이며 행위는 그 "열매"이다. 바울이나 야고보는 다 같이 아브라함의 생활을 예로 들어서 믿음으로 또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했다. 바울은 야고보와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일에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약속한 사실을 믿었을 때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다는 예로 삼았는데, 여러해가 지난 다음 아브라함의 생활에 나타난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야기를 인용했다. 거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위는 바로 그의 믿음의 겉으로 드러낸 결과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증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이 말씀 가운데 그 아들을 "드릴 때에" 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아브라함은 이미 30년 전 하나님을 믿은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이제 그가 그의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의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반율법주의" 즉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장에 대해 답변해 주는 말씀이다. 이러한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심각한 과오중의 하나이다.
3. 갈라디아주의(Galatianism) 이 명칭은 이것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 영혼의 원수의 교묘한 속임수이다. 율법에서 해방된 우리에게 다시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있다고 속임으로써 우리를 율법에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그릇된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성령은 사도 바울에게 한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부분적으로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일축했다. 그 서신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믿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아, 아니오.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믿음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그 구원은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 의해 보존되는 것이오. 당신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예리하게 반박을 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 3)"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은혜로 구원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는 그 구원의 선물을 여러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려고 애쓰고, 잃어버릴까 벌벌 떨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분이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여러분의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다음 단어들에 특별히 주의하면서 다시 한번 갈라디아서 3:10 을 읽어 보라. "누구든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도 역시 사도 바울이 질문한 대로 그러한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은 왜 그처럼 어리석은가? 성령으로(은혜로) 시작되었는데 이제 와서 당신은 율법의 행위로 완전하게 된다(보존된다)는 것인가?
[출처 : 율법이냐 은혜냐 (엠알 디한 저), 생명의 말씀사 중]
1. 율법주의(legalism) 율법주의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위를 하고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러한 과오는 이미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성령은 바울을 감동시켜 영혼을 죽이는 이러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편지를 쓰게 했으며, 이 편지가 로마서이다.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은혜로 된다는 내용이다. 이 논쟁에 대해 바울은 다음의 성구로 결론을 짓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 반율법주의(antinomiamism) 율법주의와는 정반대 되는 주장으로, 은혜로 구원받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든 어떤 행동을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성령을 죽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성령은 신약성경 중의 한 책을 쓰게 했으며, 이것이 야고보서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율법에서 구함을 받았으나 율법 없이 그저 내버려지거나 율법 없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 즉 생명의 법 아래 있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것을 자유의 법이라고 하며,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랑의 법이다.
이 법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얻거나 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구원얻는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 사실을 야고보는 다음 구절에서 요약해 말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바울이 말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하신 말씀과 모순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행위가 아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고 하는 바울의 가르침과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어떻게 조화시킬수 있는가? 정말로 그 말씀들은 서로 모순되는 말씀인가? 이 성경 말씀을 다른 성경 말씀처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그 말씀은 누구에게 하는 말씀인가? 그리고,
둘째로 그 말씀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법칙을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에 적용시켜 보자. 바울은 로마서에서 한 죄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워지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의 앞에" 즉 "하나님 보시기에" 라는 말이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겠는가? 그 대답은 분명하다.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람 앞에 의롭다 함을 받겠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도 역시 분명하다. 그것은 "행위"로 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그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고는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앞에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그 "뿌리"이며 행위는 그 "열매"이다. 바울이나 야고보는 다 같이 아브라함의 생활을 예로 들어서 믿음으로 또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했다. 바울은 야고보와는 전혀 다른 각도의 일에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약속한 사실을 믿었을 때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행위로 말미암아 의로워졌다는 예로 삼았는데, 여러해가 지난 다음 아브라함의 생활에 나타난 경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해서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이야기를 인용했다. 거기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행위는 바로 그의 믿음의 겉으로 드러낸 결과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증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 이 말씀 가운데 그 아들을 "드릴 때에" 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아브라함은 이미 30년 전 하나님을 믿은 그 때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이제 그가 그의 아들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그의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반율법주의" 즉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장에 대해 답변해 주는 말씀이다. 이러한 "반율법주의"는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심각한 과오중의 하나이다.
3. 갈라디아주의(Galatianism) 이 명칭은 이것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 중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에 절대 순종해서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주장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 영혼의 원수의 교묘한 속임수이다. 율법에서 해방된 우리에게 다시 궁극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있다고 속임으로써 우리를 율법에 얽매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는 그릇된 교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성령은 사도 바울에게 한 편지를 쓰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부분적으로 율법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는 그릇된 교리를 일축했다. 그 서신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믿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 "아, 아니오.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믿음으로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받은 다음에 그 구원은 당신들 자신의 행위에 의해 보존되는 것이오. 당신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못하느냐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예리하게 반박을 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1, 3)"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은혜로 구원해 놓으시고, 그 다음에는 그 구원의 선물을 여러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구원을 자신의 행위로 유지하려고 애쓰고, 잃어버릴까 벌벌 떨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여러분 가운데 어느 분이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여러분의 구원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다음 단어들에 특별히 주의하면서 다시 한번 갈라디아서 3:10 을 읽어 보라. "누구든지"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나도 역시 사도 바울이 질문한 대로 그러한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은 왜 그처럼 어리석은가? 성령으로(은혜로) 시작되었는데 이제 와서 당신은 율법의 행위로 완전하게 된다(보존된다)는 것인가?
[출처 : 율법이냐 은혜냐 (엠알 디한 저), 생명의 말씀사 중]
집안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기도
집안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기도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을 대표하여 기도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과 믿음으로 하나님 앞과 어두운 세력 앞에서 내 가족을 대표합니다. 이제부터 나의 기도와 믿음으로 하는 명령과 선포에 성령님과 천사가 역사 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저주를 초래하게 한 나와 나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회개합니다.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 미신, 잡신을 섬긴 것, 굿, 타종교를 믿은 것, 마술, 주술, 점과 점성술에 참여한 것, 악령에 의한 마법, 사주팔자, 관상, 제사, 간음, 호색, 타인을 학대한 것, 살인, 기만, 거짓말 등의 죄를 회개하며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죄 씻음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여준 배우자와의 혼인관계 외에 일어난 모든 성적 관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으로부터 힘과 유익과 권리를 구하였고 얻은 것을 회개합니다. 나와 나의 자녀들을 조상의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분리시켜 주옵소서. 은혜로운 주여,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아버지와 어머니 가계에서 각각 일어난 모든 죄 위에 뿌려주옵소서. 내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로 내 가계에 임한 모든 종류의 죄의 결과 및 저주를 차단하고 제거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의 죄가 나에게 영향을 준 모든 종류의 가계적 속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한다. 나는 부모님으로 온 것 중에서 하나님께로 온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하고 복으로 돌려보낸다. 사랑의 하나님 나와 나의 조상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나 후손을 저주한 것을 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해서 이 모든 저주를 차단합니다.이로 인해 사단이 획득한 모든 권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취소한다. 임신부터 삶에 미친 모든 저주의 효력을 박탈한다.
주님, 저주가 나와 후손에게 이미 효력을 발생한 것이 있으면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피해로부터 회복시켜 주옵소서. 반면에 나와 조상이 타인에게 저주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죄악으로 인해 피해 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우리를 용서케 하시고 저들이 우리에게 한 저주를 취소케 하옵소서. 한편 우리에게 날아온 모든 저주를 복으로 돌려보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종류의 저주를 하나님의 복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와 조상이 저주를 불러들이는 맹세를 한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와 나의 조상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으로 한 모든 맹세를 파기한다. 또한 나의 조상이 한 모든 거짓맹세를 파기한다.
나는 이 모든 맹세가 이제부터 아무효력이 없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조상이 한 모든 맹세를 통해 내 삶을 묶고있는 사단의 모든 결박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끊어버린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가계를 통해 침입한 악한 영들과 그들의 모든 활동을 대적한다. 나는 현재와 과거, 우리집안 식구들이 특히 미신, 잡신, 우상숭배를 통해 맹세하고 서약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기한다. 우리 집안이 다른 집안을 지배하거나 망하게 하려고 걸어 놓았던 모든 마법, 저주, 주문, 마술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차단하고 무효임을 선포하고 이것을 복으로 돌려보낸다.
이제 아버지 집안을 통해 들어온 아버지집안 귀신과 어머니집안을 통해 들어온 어머니집안 귀신을 각각 예수님이 예비한 장소로 추방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을 통해 침입한 모든 영들을 성령의 줄로 묶어 예수님이 예비한 장소로 추방한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 하노니 우리집안에 역사하는 죽음, 폭력, 배척, 교만, 반항, 거역, 분노, 분리, 고립, 두려움, 호색, 마술, 가난, 궁핍, 부채, 파산, 이혼, 이별, 중독, 불의의사고, 이간질, 불화, 우울증, 비관, 고독, 방랑벽, 한과 슬픔, 학대의 영과 유전병, 정신이상, 광기, 암,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을 가져온 모든 영들은 가져온 질병과 함께 떠나라.
이미 나간 영들, 비슷한 영들 및 우리집안을 공격하기 위해 지정된 모든 영들이 우리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피로 금지한다. 죄악을 통해 사단에게 열어놓은 모든 문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닫아버리고 집안 및 가족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한다. 조상으로부터 온 모든 저주를 복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복만이 자손들에게 내려갈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하나님 아버지, 나와 나의 가정을 조상의 죄악 및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심을 인해 감사 드립니다. 이 시간 죄와 저주와 사단이 점령했던 부분을 성령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삶과 나의 가정의 식구들 각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삶과 나의 가정을 축복합니다.나와 나의 가정 안에 새로운 성품이 심어지고 복된 언어를 사용케 하소서.나와 나의 가정을 의의병기로 주님 앞에 재 헌신합니다.정결케 하시고 마음껏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을 대표하여 기도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과 믿음으로 하나님 앞과 어두운 세력 앞에서 내 가족을 대표합니다. 이제부터 나의 기도와 믿음으로 하는 명령과 선포에 성령님과 천사가 역사 하게 하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나는 저주를 초래하게 한 나와 나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회개합니다.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 미신, 잡신을 섬긴 것, 굿, 타종교를 믿은 것, 마술, 주술, 점과 점성술에 참여한 것, 악령에 의한 마법, 사주팔자, 관상, 제사, 간음, 호색, 타인을 학대한 것, 살인, 기만, 거짓말 등의 죄를 회개하며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죄 씻음을 구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여준 배우자와의 혼인관계 외에 일어난 모든 성적 관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으로부터 힘과 유익과 권리를 구하였고 얻은 것을 회개합니다. 나와 나의 자녀들을 조상의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분리시켜 주옵소서. 은혜로운 주여,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아버지와 어머니 가계에서 각각 일어난 모든 죄 위에 뿌려주옵소서. 내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로 내 가계에 임한 모든 종류의 죄의 결과 및 저주를 차단하고 제거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의 죄가 나에게 영향을 준 모든 종류의 가계적 속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한다. 나는 부모님으로 온 것 중에서 하나님께로 온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차단하고 복으로 돌려보낸다. 사랑의 하나님 나와 나의 조상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나 후손을 저주한 것을 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사용해서 이 모든 저주를 차단합니다.이로 인해 사단이 획득한 모든 권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취소한다. 임신부터 삶에 미친 모든 저주의 효력을 박탈한다.
주님, 저주가 나와 후손에게 이미 효력을 발생한 것이 있으면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피해로부터 회복시켜 주옵소서. 반면에 나와 조상이 타인에게 저주를 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이 있으면 주님께서 그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죄악으로 인해 피해 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옵소서. 주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우리를 용서케 하시고 저들이 우리에게 한 저주를 취소케 하옵소서. 한편 우리에게 날아온 모든 저주를 복으로 돌려보냅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종류의 저주를 하나님의 복으로 바꾸어 주옵소서. 사랑의 하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와 조상이 저주를 불러들이는 맹세를 한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이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와 나의 조상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으로 한 모든 맹세를 파기한다. 또한 나의 조상이 한 모든 거짓맹세를 파기한다.
나는 이 모든 맹세가 이제부터 아무효력이 없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조상이 한 모든 맹세를 통해 내 삶을 묶고있는 사단의 모든 결박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끊어버린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가계를 통해 침입한 악한 영들과 그들의 모든 활동을 대적한다. 나는 현재와 과거, 우리집안 식구들이 특히 미신, 잡신, 우상숭배를 통해 맹세하고 서약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기한다. 우리 집안이 다른 집안을 지배하거나 망하게 하려고 걸어 놓았던 모든 마법, 저주, 주문, 마술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차단하고 무효임을 선포하고 이것을 복으로 돌려보낸다.
이제 아버지 집안을 통해 들어온 아버지집안 귀신과 어머니집안을 통해 들어온 어머니집안 귀신을 각각 예수님이 예비한 장소로 추방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집안을 통해 침입한 모든 영들을 성령의 줄로 묶어 예수님이 예비한 장소로 추방한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 하노니 우리집안에 역사하는 죽음, 폭력, 배척, 교만, 반항, 거역, 분노, 분리, 고립, 두려움, 호색, 마술, 가난, 궁핍, 부채, 파산, 이혼, 이별, 중독, 불의의사고, 이간질, 불화, 우울증, 비관, 고독, 방랑벽, 한과 슬픔, 학대의 영과 유전병, 정신이상, 광기, 암, 당뇨, 고혈압 등의 질병을 가져온 모든 영들은 가져온 질병과 함께 떠나라.
이미 나간 영들, 비슷한 영들 및 우리집안을 공격하기 위해 지정된 모든 영들이 우리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수님의 피로 금지한다. 죄악을 통해 사단에게 열어놓은 모든 문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닫아버리고 집안 및 가족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한다. 조상으로부터 온 모든 저주를 복으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복만이 자손들에게 내려갈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하나님 아버지, 나와 나의 가정을 조상의 죄악 및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심을 인해 감사 드립니다. 이 시간 죄와 저주와 사단이 점령했던 부분을 성령으로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의 삶과 나의 가정의 식구들 각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과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의 삶과 나의 가정을 축복합니다.나와 나의 가정 안에 새로운 성품이 심어지고 복된 언어를 사용케 하소서.나와 나의 가정을 의의병기로 주님 앞에 재 헌신합니다.정결케 하시고 마음껏 사용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의 원리 - 정동수 교수
구원의 원리
* 필요성: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을 판단하여 폐기 처분합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습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흙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가 그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때가 있습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시킵니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폐기 처분되는 것을 ‘유황 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계20:10).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내게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방해물: 사람과 물건의 차이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사람을 부적격자로 판정내리는 근거가 죄라고 말하는데 근본적으로 죄란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며 사람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 의지를 이용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는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롬3:23). 첫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라는 독은 사람의 핏줄을 타고 전 인류에게 퍼졌습니다(창5:3; 롬3:10).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따라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인 사망이 임했고(롬6: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 불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티끌만큼의 죄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과연 나는 죄인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계획: 설사 펜 공장에서 나오는 펜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자기 자신이 혹은 그 옆의 펜이 그 펜을 고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죄의 병은 똑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등이 고칠 수 없습니다. 펜을 설계한 메이커가 펜을 고칠 수 있듯이 사람의 설계자인 하나님 즉 사람과 차원이 다른 외부의 존재만이 사람의 죄의 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행4:12).
* 확신: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습니까? 그 사람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곧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창조주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기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 을 믿습니다(요14: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 초청: 인생은 마치 달리는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 몇 시간을 아끼려고 열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역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이라는 무궁한 시간을 아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히3:13).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오늘 그 시간이 닥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베푸시는 방법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벧전1:23).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누구나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값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수 있습니다.
* 필요성: 모든 물건에는 그것들을 만든 존재 즉 메이커가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펜, 의자, 자동차, 책 등이 모두 메이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메이커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을 판단하여 폐기 처분합니다. 이와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도 메이커가 있습니다. 물건도 메이커가 있는데 하물며 물건을 설계하는 고등 존재인 사람이 흙에서 그냥 생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을 만든 메이커가 그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때가 있습니다(행17:31; 히9:27). 이 같은 심판에서 부적격자로 드러난 사람은 메이커가 폐기시킵니다. 성경은 이 같은 메이커를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폐기 처분되는 것을 ‘유황 불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계20:10).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내게 메이커가 있는가, 없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방해물: 사람과 물건의 차이는 사람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사람을 부적격자로 판정내리는 근거가 죄라고 말하는데 근본적으로 죄란 ‘목표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사람을 만드시며 사람이 자신의 영광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유 의지를 이용하여 고의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는 그분의 목적에서 벗어나 그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롬3:23). 첫 사람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 죄라는 독은 사람의 핏줄을 타고 전 인류에게 퍼졌습니다(창5:3; 롬3:10).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따라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육체적인 사망이 임했고(롬6:23)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져서 지옥 불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티끌만큼의 죄도 차마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므로 구원받기 원하는 사람은 “과연 나는 죄인인가, 아닌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계획: 설사 펜 공장에서 나오는 펜이 자기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해도 자기 자신이 혹은 그 옆의 펜이 그 펜을 고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죄의 병은 똑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 즉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등이 고칠 수 없습니다. 펜을 설계한 메이커가 펜을 고칠 수 있듯이 사람의 설계자인 하나님 즉 사람과 차원이 다른 외부의 존재만이 사람의 죄의 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행4:12).
* 확신: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말을 믿습니까? 그 사람의 신실함에 근거해서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 곧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분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창조주 그분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기에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 을 믿습니다(요14:6).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니라”(롬6:23).
* 초청: 인생은 마치 달리는 기차역을 향해 달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 몇 시간을 아끼려고 열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역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원이라는 무궁한 시간을 아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은 언제 닥칠지 모릅니다(히3:13). 나이와 직업과 성별과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오늘 그 시간이 닥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베푸시는 방법을 그대로 믿고 수용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태어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벧전1:23).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그분께서 약속하신 대로 누구나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값없이 구원의 기쁨을 누릴수 있습니다.
열뿔과 외교협의회(CFR) - 장죠셉 목사님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계13:1)
요한계시록에 짐승, 붉은 용, 일곱 머리, 열 뿔, 등은 지난날에는 그때 당시의 정황들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종말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으므로 지금 지구정부주의(Globalism)자들이 적그리스도정부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를 알아야 된다. 지금 어두움의 세력에 잡혀있는 지구주의자(Globalist)들이 무엇을 추진시키고 있는가? 세계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1) 정치통합(Political Unity)을 시킨다.
2) 경제통합(Economical Unity)을 위해서는 무역관세협정(GATT)으로서,
금융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지금은 세계 무역기구(WTO)로 바꾸어졌다.
3) 종교통합(Religion Unity)을 위하여 단일종교(URO)를 만들었다.
4) 군사통합(Military Unity)을 위하여 UN평화유지군 정책을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치하고 법적으로 구속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에서 중요한 부분만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열 뿔에 대하여 EU가 10개국이 될 때를 말했으나 지금은 27개국으로 확장되었고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시대주의자라 말할지 모르겠으나 성경은 마지막 때를 알려면 “시대를 분별하라(마16:3. 눅12:56)”하였으므로 시대적인 상황에서 열 뿔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The concept of a one-world community stretches back far beyond the twentieth century, but became concentrated in the granddaddy of the modern American secret societies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 The council began as an outgrowth of a series of meetings conducted during World War I. 세계정부사회의 폭넓은 개념에서 21세기를 뒤돌아보게 보면, 그 설립의 원조는 미국의 은밀한 조직인 오늘의 외교협의회(CFR)에 이르게 된다. 협의회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회의에서 자연적으로 발달되었다. In 1917 New York, Colonel Edward Mandell House, President Woodrow Wilson's confidential adviser, had gathered about one hundred prominent men to discuss the postwar world. They were globalist in nature, calling for the removal of "all economic barriers" between nations, "equality of trade conditions," and the formation of "a general association of nations." 1917년 뉴욕에서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Edward Mandel. House)대령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의 핵심 참모였고, 사람들을 만나서 100여 가지 두드러진 전후문제를 함께 논의하였다. 지구주의자들은 나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경제장벽을 없애자며, 총체적인 나라들의 연합체가 형성되려면 평등한 무역의 조건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하였다. Colonel House, along with both British and American peace conference delegates, met in Paris's Majestic Hotel on May 30, 1919, and resolved to form an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with one branch in the United States and one in England. The England branch became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 This institute was to guide public opinion toward acceptance of one-world government or globalism. The U.S. branch was incorporated on July 21, 1921, as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1919년 5월 30일, 하우스 대령은 미국대표로서 혼자 파리(Paris)의 화려한 호텔에서 있었던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미국에서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RIIA) 지부를 만들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CFR는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 지부로 된 것이다. 지구주의자들은 이 연구소를 단일-세계정부쪽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1919년 Edward Mandel House 대령은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대통령의 핵심참모였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서 전쟁후의 두드러진 100여 가지 문제점을 함께 논의하면서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CFR)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7월 29일, 외교협의회(CFR)는 Edward Mandel House가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을 고문으로 앉히고 시작됐다. 그는 1919년 불란서 Paris회의 후에 작업을 시작하여 1921년에 설립하였다. 하우스의 사상은 독일의 칼 하인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k:1818-1883)가 주창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외교협의회(CFR) 본부는 58 East 68 Street. New York, New York. 10021에 있다.
Source: http://www.dfr.org/ 1921년 7월 21일에 영국왕실국제연구소(RIIA) 미국지부가 시작된 것이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이다. 새로 만들어진 외교협의회 설립조항에 명시된 2장에는 CFR 회의에 관한 세부내용은 누설치 못하게 했으며, 누구든지 CFR 규정에 위반하는 사람은 회원에서 제명시키는 것은 CFR의 은밀한 비밀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 했다. Nearly every CIA director since Allen Dulles has been a CFR member, including Richard Helms, William Colby, George Bush, William Webster, James Woolsey, John Deutsch, and William Casey. Many researchers have alleged that the CIA, in fact, serves as a security force, not only for corporate America, but for friends, relatives, and fraternity brothers of the CFR. 밀접하게 일했던 CIA국장들엔 Allen Dulles를 시작으로 CFR 회원들에는, Richard Helms를 포함하여 William Colby, George Bush, William Webster, James Woolsey, John Deutsch, 그리고 William Casey. 등이다. CIA에 관한 많은 연구자들의 주장은 사실, 그들의 봉사는 무력에 대한 보안으로 미국만의 조직이 아니라 CFR은 친구들, 친척들과 협동적인 단체들의 형제를 보호한다. [CFR researcher James] Perl off warned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that a monumental battle is sharping up between the Kingdom of Christ and "an evil, one-world government; the kingdom of the Antichrist.....Many notables of the American Establishment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one side in this conflict, and it is not the side the ancient scriptures recommend.... 외교협의회(CFR)를 연구하는 제임스는,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악을 위한 단일정부 사이에서 날카로운 생존적인 전쟁에서 엄청난 싸움을 해야 될 것’으로 전망했다. 주목할 것은 많은 ‘미국사람들은 기성권력기구와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성경, 둘 사이에서 어느 한편을 택할 것인지 싸와야 할 것’이다. CFR을 설립하는데 적극적이고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그들은 J.P. Morgan, David Rockefeller, Bernard Baruch, Paul Warburg, Otto Kehn, Jacob Schiff, 등이다. 하우스는 영국이 1799년에 조직하여 식민정책으로써 세계를 장악하고 200년 동안 대영제국으로 일어서게 했던 ‘영국왕실국제연구소(Royal institute International of Affair-RIIA)’ 정책의 전례를 표방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영국과 함께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체가 외교협의회(CFR)이다. 세계정부를 위한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 작업은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 뿔은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보아야 된다. House는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을 앞세우고 1,500여 명의 동조자들과 조직을 확대시켰다. 그후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행정부가 시작되던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외교협의회(CFR)와 Why A Bankrupt America? pp~27. Author, Devvy Kidd 1994과, Political dominance 4-Administration 1998년. 세 곳에서 외교협의회(CFR)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계속)
이러한 종합적인 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치하고 법적으로 구속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것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에서 중요한 부분만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열 뿔에 대하여 EU가 10개국이 될 때를 말했으나 지금은 27개국으로 확장되었고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시대주의자라 말할지 모르겠으나 성경은 마지막 때를 알려면 “시대를 분별하라(마16:3. 눅12:56)”하였으므로 시대적인 상황에서 열 뿔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The concept of a one-world community stretches back far beyond the twentieth century, but became concentrated in the granddaddy of the modern American secret societies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 The council began as an outgrowth of a series of meetings conducted during World War I. 세계정부사회의 폭넓은 개념에서 21세기를 뒤돌아보게 보면, 그 설립의 원조는 미국의 은밀한 조직인 오늘의 외교협의회(CFR)에 이르게 된다. 협의회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회의에서 자연적으로 발달되었다. In 1917 New York, Colonel Edward Mandell House, President Woodrow Wilson's confidential adviser, had gathered about one hundred prominent men to discuss the postwar world. They were globalist in nature, calling for the removal of "all economic barriers" between nations, "equality of trade conditions," and the formation of "a general association of nations." 1917년 뉴욕에서 에드워드 맨델 하우스(Edward Mandel. House)대령은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의 핵심 참모였고, 사람들을 만나서 100여 가지 두드러진 전후문제를 함께 논의하였다. 지구주의자들은 나라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경제장벽을 없애자며, 총체적인 나라들의 연합체가 형성되려면 평등한 무역의 조건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하였다. Colonel House, along with both British and American peace conference delegates, met in Paris's Majestic Hotel on May 30, 1919, and resolved to form an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with one branch in the United States and one in England. The England branch became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 This institute was to guide public opinion toward acceptance of one-world government or globalism. The U.S. branch was incorporated on July 21, 1921, as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CFR) 1919년 5월 30일, 하우스 대령은 미국대표로서 혼자 파리(Paris)의 화려한 호텔에서 있었던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미국에서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RIIA) 지부를 만들 것을 결심하였다. 따라서 CFR는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 지부로 된 것이다. 지구주의자들은 이 연구소를 단일-세계정부쪽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공개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1919년 Edward Mandel House 대령은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대통령의 핵심참모였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서 전쟁후의 두드러진 100여 가지 문제점을 함께 논의하면서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CFR)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7월 29일, 외교협의회(CFR)는 Edward Mandel House가 우드로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을 고문으로 앉히고 시작됐다. 그는 1919년 불란서 Paris회의 후에 작업을 시작하여 1921년에 설립하였다. 하우스의 사상은 독일의 칼 하인릭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k:1818-1883)가 주창했던 사회주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외교협의회(CFR) 본부는 58 East 68 Street. New York, New York. 10021에 있다.
Source: http://www.dfr.org/ 1921년 7월 21일에 영국왕실국제연구소(RIIA) 미국지부가 시작된 것이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이다. 새로 만들어진 외교협의회 설립조항에 명시된 2장에는 CFR 회의에 관한 세부내용은 누설치 못하게 했으며, 누구든지 CFR 규정에 위반하는 사람은 회원에서 제명시키는 것은 CFR의 은밀한 비밀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라 했다. Nearly every CIA director since Allen Dulles has been a CFR member, including Richard Helms, William Colby, George Bush, William Webster, James Woolsey, John Deutsch, and William Casey. Many researchers have alleged that the CIA, in fact, serves as a security force, not only for corporate America, but for friends, relatives, and fraternity brothers of the CFR. 밀접하게 일했던 CIA국장들엔 Allen Dulles를 시작으로 CFR 회원들에는, Richard Helms를 포함하여 William Colby, George Bush, William Webster, James Woolsey, John Deutsch, 그리고 William Casey. 등이다. CIA에 관한 많은 연구자들의 주장은 사실, 그들의 봉사는 무력에 대한 보안으로 미국만의 조직이 아니라 CFR은 친구들, 친척들과 협동적인 단체들의 형제를 보호한다. [CFR researcher James] Perl off warned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that a monumental battle is sharping up between the Kingdom of Christ and "an evil, one-world government; the kingdom of the Antichrist.....Many notables of the American Establishment have given themselves over to one side in this conflict, and it is not the side the ancient scriptures recommend.... 외교협의회(CFR)를 연구하는 제임스는,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악을 위한 단일정부 사이에서 날카로운 생존적인 전쟁에서 엄청난 싸움을 해야 될 것’으로 전망했다. 주목할 것은 많은 ‘미국사람들은 기성권력기구와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성경, 둘 사이에서 어느 한편을 택할 것인지 싸와야 할 것’이다. CFR을 설립하는데 적극적이고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들은 이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그들은 J.P. Morgan, David Rockefeller, Bernard Baruch, Paul Warburg, Otto Kehn, Jacob Schiff, 등이다. 하우스는 영국이 1799년에 조직하여 식민정책으로써 세계를 장악하고 200년 동안 대영제국으로 일어서게 했던 ‘영국왕실국제연구소(Royal institute International of Affair-RIIA)’ 정책의 전례를 표방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영국과 함께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한 조직체가 외교협의회(CFR)이다. 세계정부를 위한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 작업은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 뿔은 이때부터 나타났다고 보아야 된다. House는 프랭크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을 앞세우고 1,500여 명의 동조자들과 조직을 확대시켰다. 그후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행정부가 시작되던 1929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외교협의회(CFR)와 Why A Bankrupt America? pp~27. Author, Devvy Kidd 1994과, Political dominance 4-Administration 1998년. 세 곳에서 외교협의회(CFR) 설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계속)
단일정부를 위한 열 뿔(지역) - 장죠셉 목사님
단일정부를 위한 열 뿔(지역)
영상보기▶ http://www.youtube.com/v/JPlvdSQ6cAM&hl=ko
외교협의회(CFR)의 설립목적은 세계를 단일화시키는데 있다고 CFR의 문서에서, It means control establishment on media라 했다. MEDIA는 고대영어에서는 왕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왕국을 설립(Establishment)하여 지배(Control)하려 하는가? 외교협의회 설립문서에 따르면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의 미주태평양지부 격으로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만들기 위해 설립했다고 하였다.
1) 1979년 상원의원 Barry M. Goldwater의 ‘With No Apologies’ 126페이지에서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is the American branch of a society with organization in England (and) believes national boundaries should be obliterated and one world rule established. 미국 외교협의회는 영국왕실국제연구소 태평양지부역할로서....나라와 경계선을 없애고 단일정부체제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시작할 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방식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논쟁이 있었지만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면 사람, 물건, 건물, 재산, 사람의 지능까지 장악하기 위한 통제가 따라야 된다. 사회주의방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개인의 소유나 재산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계정부태동을 위해 만든 제도가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계13:1)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 정책은 지구를 10지역으로 나누어서 단일정부를 만들고 있는 외교협의회(CFR)가 짐승의 열 뿔의 역할이다. 대부분이 EU를 열 뿔로 인식해 왔었다. EU는 한 지역일 뿐이지 지구전체를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다. EU는 세계정부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경제질서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EU는 27개국으로 그 숫자는 늘어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나라들이 가입하게 된다. 그렇다면 EU가 열 뿔이라는 인식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EU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외교협의회(CFR)이다.
제1지역 = 북미주 제6지역 = 동유럽 (구 사회주의 권)
제2지역 = 중남미(라틴어 권) 제7지역 = 중동(모슬렘. 아랍권)
제3지역 = 서태평양과 일본 제8지역 = 중앙아프리카
제4지역 = 대양주 제9지역 = 아시아(히말라야 산맥남부)
제5지역 = 서유럽(구 자유주의 권) 제10지역 = 중앙아시아(히말라야 북)
이렇게 지구사회를 10지역으로 나누어 놓고 단일정부를 만들고 있는 것을 "열 뿔"이라 한다. 이 10지역을 총괄하는 기구가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이기에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뿔의 역할은 CFR이 되는 것이다.
영상보기▶ http://www.youtube.com/v/JPlvdSQ6cAM&hl=ko
외교협의회(CFR)의 설립목적은 세계를 단일화시키는데 있다고 CFR의 문서에서, It means control establishment on media라 했다. MEDIA는 고대영어에서는 왕국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왕국을 설립(Establishment)하여 지배(Control)하려 하는가? 외교협의회 설립문서에 따르면 영국의 왕실국제연구소의 미주태평양지부 격으로 단일세계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만들기 위해 설립했다고 하였다.
1) 1979년 상원의원 Barry M. Goldwater의 ‘With No Apologies’ 126페이지에서
The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is the American branch of a society with organization in England (and) believes national boundaries should be obliterated and one world rule established. 미국 외교협의회는 영국왕실국제연구소 태평양지부역할로서....나라와 경계선을 없애고 단일정부체제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시작할 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방식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논쟁이 있었지만 세계를 하나로 만들려면 사람, 물건, 건물, 재산, 사람의 지능까지 장악하기 위한 통제가 따라야 된다. 사회주의방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개인의 소유나 재산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계정부태동을 위해 만든 제도가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계13:1)
새세계질서(New world order) 정책은 지구를 10지역으로 나누어서 단일정부를 만들고 있는 외교협의회(CFR)가 짐승의 열 뿔의 역할이다. 대부분이 EU를 열 뿔로 인식해 왔었다. EU는 한 지역일 뿐이지 지구전체를 움직이는 조직은 아니다. EU는 세계정부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경제질서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의 EU는 27개국으로 그 숫자는 늘어났고, 앞으로도 더 많은 나라들이 가입하게 된다. 그렇다면 EU가 열 뿔이라는 인식은 설득을 얻을 수 없다. EU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외교협의회(CFR)이다.
제1지역 = 북미주 제6지역 = 동유럽 (구 사회주의 권)
제2지역 = 중남미(라틴어 권) 제7지역 = 중동(모슬렘. 아랍권)
제3지역 = 서태평양과 일본 제8지역 = 중앙아프리카
제4지역 = 대양주 제9지역 = 아시아(히말라야 산맥남부)
제5지역 = 서유럽(구 자유주의 권) 제10지역 = 중앙아시아(히말라야 북)
이렇게 지구사회를 10지역으로 나누어 놓고 단일정부를 만들고 있는 것을 "열 뿔"이라 한다. 이 10지역을 총괄하는 기구가 "외교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CFR)"이기에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뿔의 역할은 CFR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 정동수교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주신 가장 큰 사명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교회의 존재 목적 중 가장 큰 목적은 ‘영혼 구원’(Soul winning)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확신 있게 제시해야 합니다. 본 부록은 믿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썼습니다. 믿고 구원받으신 분들은 다시 한번 복음을 확인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안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숙지한 뒤에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면 매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혹시 구원받지 못한 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부디 오늘 예수님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받아들여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느끼시기 바랍니다. 다른 영혼을 구원하려는 사람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지혜이심을 기억하고 사명에 임하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영혼을 사랑하여 구령의 열정을 가진 성도들에 게 복음 선포의 권능을 충만하게 부여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그분의 복음을 제시하기에 앞서 당신은 먼저 하늘과 땅의 창조주 되시는 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성경의 첫 구절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창1:1; 행4:24; 골1:16; 계10:6).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전능자 하나님께서 손수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시계나 핸드폰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계나 핸드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우주만물 그리고 사람은 결코 우연히 생길 수 없으며 고도의 설계자가 정교한 청사진을 만들어 창조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말씀으로 해와 달과 별들과 동물, 식물 등 온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을 엿새 동안에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물 중 으뜸이 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하나님께서 친히 온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곧 당신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바로 그분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히1:3). 하나님은 당신과 온 세상과 상관없이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당신과 온 세상은 매 순간 그분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셨으므로 당신은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께서 당신에 대하여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창조의 진리는 다른 많은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초석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렇다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먼저 그분은 절대적으로 영원하신 존재입니다(신33:27; 시90:2; 93:2). 다시 말해 그분께는 시작이 없으며 또한 생명이 다하는 때도 없습니다. 욥은 그분의 연수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욥36:26). 이것은 곧 그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신 적은 결코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사야 대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나 외에 신이 있느냐? 참으로 신은 없나니 나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하노라.”(사44:6, 8) 그분은 항상 존재해 오신 분이며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 무궁히 계실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4:24).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영적존재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체의 본질은 곧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물질적 요소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곧 그분께서 본질적으로 우리같이 눈에 보이는 몸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민23:19; 사31:3; 눅24:39; 요4:24).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으며(롬1:20; 딤전1:17) 따라서 그분의 형체를 그려 볼수도 없고(신4:15-23; 사40:25) 물리적 수단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요4:24; 행17:25).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한 곳에만 묶여 있을 수도 없습니다(왕상8:27; 행7:48, 49; 17:24).또한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므로 그분의 앞을 떠나 숨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시139:7-12; 렘23:23, 24). 당신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보시며다 알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6; 잠15:3; 사46:10; 요일3:20).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 중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의 유한한 지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확실한 말씀인 성경은 한 하나님이 존재함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신6:4; 사43:10; 44:6, 8; 45:5, 6, 21, 22, 46:9; 막12:28-32; 고전8:4; 딤전2:5; 약2:19). 그런데 한 하나님은 세 분 즉 아버지, 아들(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이십니다(마28:19; 요1:1, 2, 14; 5:18; 20:28; 행5:3,4; 요일5:7; 요이9). 이 세 분은 본질, 권능, 영광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신데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며 과거도 시간이며 현재도 시간이고 미래도 시간입니다. 그런데 결코 세 개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단 하나입니다. 동시에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분이 다 하나님이며 이 세 분 중 하나라도 없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조금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의존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작가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진리를 가리켜 ‘크리스천 신앙의 최종적이고도 지고한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쥐고 계십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 자연 만물, 사람과 그들의 행동을 다 다스리시며 심지어 사탄 역시 그분의 권능과 제재 하에 있습니다. 성경은이 세상에 생기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욥1:7-12; 시107:25-29; 잠21:1, 31; 단2:21-22; 나1:3-6; 마4:10, 11; 엡1:11). 성경의 하나님께는 그 어떤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언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아무도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이 무엇을 하나이까? 하지 못하리라.”(단4:35; 참조 시115:3; 렘32:17; 마19:26; 눅1:37)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분되어 있음을 뜻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곧 그분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과 다르고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순수하며 선하며 의로우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요일1:5)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며 또 차마 불법을 보지 못하시므로 더럽거나 악한 것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합1:13). 정결하게 씻을 것을 규정한 모세의 율법체계; 성막의 구분;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짐승의 희생물을 바칠 것;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신 것(출3:5; 수5:15); 고라, 다단, 아비람의 죽음(민16:1-33);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레10:1-3)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그분의 거룩함을 새겨 주기 위한 교훈들이다(R. A.토레이).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의 왕좌 위에 서 있는 스랍들은 계속해서 밤낮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사6:3;계4:8).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친히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창18:25)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공의로우시며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은 다 의롭습니다. 이처럼 공의로우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와 불법을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룩하지 못한 죄와 불법을 묵과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온 세상을심판하실 것입니다(사45:21; 요5:30; 행17:31; 계15:3).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제 당신이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에대해서 생각해보면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친절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푸시며 사랑을 보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엡2:4-5; 참조 마5:45; 요3:16).
사람과 첫 번째 죄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완전한 곳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 알아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만이 유일한 제약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숙하게 명령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런데 이브는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좋은 것을 보고 그 열매를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러 행한 첫 번째 죄요, 반역이었습니다. 바로 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온 인류는 죄성을 지닌 채 태어나 영적으로 죽었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결국 육체적인죽음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롬5:12, 18; 엡2:1).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소위 십계명이라 불리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 2.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 3.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너는 살인하지 말라. 7. 너는 간음하지 말라. 8.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9.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10.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죄는 한 마디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이런 율법조항 중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입니다(롬3:20; 갈3:10-12; 요일3:4; 약2:10-11). 예수님께서는 신약 성경에서 율법을 더 엄격하게 해석하셨으며 율법의 두 가지 핵심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사랑하라.”(눅10:27; 참조 마5:21-32; 막12:30-31)
나와 당신은 모두 죄인입니다! 이제 십계명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열 가지를 다 어기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어겼음을 곧 인정하실 것입니다. 죄 문제의 심각성은 당신이 고의로 이런 율법들을 어겼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이며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또한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행한 사람입니다(시51:5; 사64:6; 롬3:9-19, 23; 엡2:2,3). 당신의 죄들로 인해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당신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 같은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치유할 수 없습니다(사64:7; 렘10:23; 13:23; 요1:12, 13; 롬7:18).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죄인들에게 분노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를 범하는 혼은 반드시 죽습니다(시7:11; 겔18:4, 20; 롬6: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롬1:18). 따라서 당신이 죽기 전에 그분의 진노를 되돌리지 않으면 당신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마25:31-46; 요3:36; 롬1:18; 계20:11-15;21:8).
지옥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 없어지고 만다고 말하며 어떤 이들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연옥을 마련해서 죽은 이후에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중 어떤 의견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영화롭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앞을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사람이 영원토록 형벌 받는 장소를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 지옥은 사실입니다. 지옥은 결코 그리스도인들 이 상상해서 만들어 낸 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천국보다 지옥에 대해 더 상세히 말하며 그곳이 실제 장소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경은 지옥의 정죄와 또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 지옥은 두려운 곳입니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요, 용광로요, 꺼지지 않는 불이 영원토록 타는 곳입니다. 이곳은 고통을 받는 장소로서 사람들이 슬피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또 이곳에는 밤낮으로 영원히 안식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옥은 무서운 곳이며 지옥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모든 좋은 것에서부터 격리되어 안식과 평안이 없이 거할 것입니다. * 지옥은 최종 장소입니다. 지옥에 이르는 길들은 다 일방통행입니다. 다시 말해 출구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깊게 갈라진 틈이 있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지옥의 공포나 외로움 혹은 고통은 사람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 지옥은 정당한 곳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그분께서 믿지않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아주 의로운 일인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거부했으며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그들을 거부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기 원하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이 선택한 것을 영원토록 확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이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보면서 이제 당신은 신약시대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피하겠느냐?”(마23:33).
종교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사람은 종교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종교 및 윤리 백과사전」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 백 가지 방법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 달, 별, 지구, 물,불을 숭배해 왔으며 또 돌, 나무, 금은 등으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경배해 왔고 또 물고기, 새, 짐승 등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수많은 신이나 영을 상상해내어 그것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물, 예식, 성사, 봉사등을 통해 참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의 죄 문제를 풀수 없습니다. * 첫째로 종교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종교는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거기에는 흠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받으실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의 이 같은 노력은 허사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사64:6). 거룩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며 사람의 종교는 결코 이것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 둘째로 종교는 결코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선행은 결코 악행을 없애지 못합니다. 당신의 미덕은 결코 당신의 악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 해도 행위를 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유아 세례, 견진 성사, 침례, 세례, 주의 만찬, 교회 참석, 기도, 헌금, 성경읽기, 기도 등과 같은 종교 행위나 경험은 결코 여러 분의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 셋째로 종교는 결코 사람의 죄성을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죄로 인한 현상이지 죄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문제의 핵심은 사람의 속마음에 있으며 본질적으로 사람의 속마음은 부패되고 변질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교회에 가서 종교 행위에 참여하면 기분은 좋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가 당신을 선한 사람으로, 의인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누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욥14:4) 위에서 언급한 종교 행위 중 어떤 것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당신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행위들을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위들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오히려 당신의죄와 저주만 늘어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처한 상태가 이처럼 비참하기 때문에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남자 없이 마리아의 태 속에서 기적적으로 수태되시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처녀탄생). 이렇게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었으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마1:18-25; 요1:1-14; 딤전3: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을 나사렛이란 이름 없는 촌에서 사셨습니다. 비록 그분께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고 사람들처럼 사셨지만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그분 속에 죄가 없으셨 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을 수도 없었고 짓지도 아니하셨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법을 성취하였습니다(히4:15; 7:26; 벧전2:22).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이 되셨을 때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 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며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통해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종교를 버리고 자신을 향해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같이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와 또 죄로 인한 형벌에서 그들을 구해내려고 계획하셨기때문입니다(마1:21; 요8:23; 행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셨지만 그것이 곧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당신은 죄를 범했고 당신의 죄로 인해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모든 죄를 징계하 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루시기 위해 두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사람들이 자기 죄들로 인해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으로 지옥이며 최종 적으로는 지옥이 통째로 던져지게 될 불 호수입니다. 두 번째 장소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갈보리 십자가입니다. 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다 당하시고 세상의 죄들을 제거 하셨습니다(엡2:16; 골2:13,14; 벧전2:24).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된 소식을 뜻하는 복음은 매우 복된 것이요, 값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죄 없는 짐승이 희생물이 되어 죄 값을 지불하고 대신 속죄 즉 대속(代贖)을 이루었지만 그런 희생물은 완전하지 못하므로 매해 계속해서 희생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로 인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셔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일시에 완전하게 충족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세상의 죄들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셨으며 이러한 화해 헌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사53:5, 10-12; 롬3:25; 고전15:3; 갈1:4; 딛2:14; 히1:3; 9:26-28; 10:12; 요일4:10). 이러한 완전 속죄로 인하여 당신과 나 같은 죄인들이 정죄와 저주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화해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3:18; 참조 롬5:10; 고후5:18; 히2:17). 이것이야말로 엄청나게 복된 소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속죄물로 지정하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 죄들을 제거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밝히 보여 주셨으나 사람이 이런 선물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런 엄청난 은혜가 은혜가 되지 못하며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일을 안 해도 사랑으로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넘치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예수님께서는 대신 속죄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했습니다. 이 부활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셨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났음을 절대 확실한 증거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나타나자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참조 마28:6; 행1:3; 롬4:25; 벧전1:21) 부활하신 뒤 사십 일이 지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의 눈앞에서 올리브 산을 떠나 승천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행1:11; 딤전2:5; 3:16; 요14:6).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일들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그분께서 성취하고 계신 직분 중 하나는 대언자의 직분입니다. 대언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동행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며 내적으로는 성령님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대언자가 되시며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계셔서 직무를 수행하고 계시므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대언자가 없습니다(신18:15; 마21:33-46; 요7:40; 행3:22-26; 히1:1,2). 그리스도께서 성취하고 계신 또 다른 직무는 대제 사장의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자기 자신을 죄로 인한 희생물로 드림으로써 제사장의 직무를 완수했으며 지금 이 시간에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중보 역할을 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유대교나 천주교에 존재하는 제사장이나 제사장 체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속해서 대제사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요17:20; 히3:1; 7:21-25; 히8:1-6; 벧전1:5).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 이제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떻게 내게 적용됩니까?”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내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 죄들이 많은데 과연 하나님께서 나같은 사람도 받아 주실까요?” “구원받기 전에 무슨 의식이나 예식 같은 것을 행해야만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특별한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까?” 이런 질문들은 다 좋은 질문들이며 성경적인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구원의 문은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지 못할 정도로 추하고 더러운 죄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돈 주고 구원을 사거나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받기 전에 무슨 황홀경에 이르는 감정같은 것을 경험할 필요도 없고 무슨 예식이나 의식을 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오직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욘2:9; 롬6:23; 엡2:8-9; 빌2:13; 딛3:5). 구원받기 원하신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이 죄인이며 죄의 형벌이 있음을 인정하고 죄들을 회개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 주님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죄로부터의 회개 회개란 죄에 대해 완전히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먼저 당신이 죄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반역자 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당신의 더럽고 추한 죄에 대해 수치를 느끼고 슬퍼해야 합니다. 그 뒤에 당신은 죄를 기꺼이 버릴 태세가 되어야 하고 당신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에 합당한 일 들을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버리고자 하지 않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삶의 방향을 180도 틀어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전심을 다해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 믿음(Faith)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아는 것(knowing)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 십니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말 그대로 믿는 것(believing)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하면 또한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고 하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신뢰하는 것(trusting)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구원자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으면서 당신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 즉 당신을 구원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을 그분께서 하실 수 있다고신뢰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개념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고 죄 값을 치르셨다는 대신 속죄의 개념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속(代贖)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만심이 있고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내 자신을 부인하고 완전히 예수님만을 신뢰하여 구원자로, 주님으로 맞아들이게 될 때 당신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배구 시합에서 한 쪽이 공을 서브(serve)하면 다른 쪽이 공을 리시브(receive)하면서 게임이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공을 서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그 공을 리시브하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물을 마련하시고 큰 은혜를 베푸시려 해도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며 동시에 의롭게 만드십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법적인 용어로서 ‘의로운 사람으로 판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을 보시고 그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그 시간부터 의인으로 부르겠다고 선포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칭의(稱義)라 합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할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한자 ‘의’(義)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의(義)입니까? ‘양’(羊) 밑에 ‘나’(我)라는 존재가 있을 때 의롭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믿음으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그리스도께 나오면 그들의 죄들을 제거하시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주십니다.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1:29)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없이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들어갈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구의의를 갖고 싶습니까? 불완전하여 더러운 누더기와 같은 당신의 의입니까?(사64:6), 아니면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의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8-9)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稱義)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의를 소유하게 되며 이러한 완전한 의가 당신 자신의 의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100% 확실한 사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죽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죽은 이후에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행17:31).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분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 들어가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면 영원토록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누릴 것입니다(계20:10-22:5). 이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기 원하시닙까? 이 만큼 읽은 시점에서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싶습니까?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읽은 것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되돌아가서 지금까지 읽은 부분을 다 시 천천히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진리를 보여 주실 것을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필요를 보여주셔서 구원받아야겠다는 욕망을 주셨으면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하며 가장 좋은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입니다. 당신은 이제 죄에 싫증이 났습니까? 죄를 떠나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피하고 지금 이 시간 죄 용서를 받아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친구로 맞아들여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시간 주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유창한 말에 관심을두시지 않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먼저 당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죄들로 인해 영원히 형벌 받 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십시오. 당신 스스로 당신을 구원시킬 수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당신을 구원하고 당신 삶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다음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행16:31)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의를 신뢰하는 사람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구원받은 뒤에는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이 없으면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해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신 책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책입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먼저 신약성경의 네 번째 책인 요한복음과 끝 부분에 있는 요한일서를 몇 차례 읽기 바라며 또한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읽기 바랍니다. 그 뒤에 전체 성경을 꾸준히 정독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경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크리스천 친구들을 만나 좋은 교제를 나누고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약교회는 이 책자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만일 그런 교회를 발견하기 어려우면 이 책 뒤에 있는 주소로 연락하기 바랍니다. 셋째로 당신은 물속에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침례는 결코 여러분을 구원시키지 않으며 죄를 씻어 주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침례의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침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아 옛사람이 죽었고 묻혔으며 새사람으로 살아났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침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천사들에게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 알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구원 받은 이후에 마귀는 종종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심하게 합니다. 이때마다 다음의 글을 읽고 성경 말씀만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갑판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네와 몹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네. 자네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하던데….” “예, 저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구원받은 것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좀 교만한 말이 아닌가? 사실 나도 한 때는 성실하게 교회에 다녔네. 하지만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만 사실 위선자가 많아.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지.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가끔 기독교에 어떤 진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지.” “저는 그 말씀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았다는 말과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반장님, 이 배수구의 둘레는 얼마입니까?” “배수구의 둘레는 48센티미터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것을 묻지?” “반장님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 책에 의거하여 확신할 수 있지. 이 책은 본사에서 보내온 것으로 이 배에 대한 설명서가 아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구원받은 것을 아는 방법과 같습니다. 저는 성경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하늘의 본부에서 보내 온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성경말씀 안에서 제가 정죄 받은 죄인이라는 것과(롬3:23) 지옥의 불 호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계21:8). 하지만 저는 또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롬5:8)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저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벧전2:24).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 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이 말씀대로 저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며 장차 있을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제가 구원받았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교만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그분의 복음을 제시하기에 앞서 당신은 먼저 하늘과 땅의 창조주 되시는 저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성경의 첫 구절이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창1:1; 행4:24; 골1:16; 계10:6). 지금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전능자 하나님께서 손수 계획하시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시계나 핸드폰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이 우연히 생겼다고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시계나 핸드폰보다 훨씬 더 복잡한 우주만물 그리고 사람은 결코 우연히 생길 수 없으며 고도의 설계자가 정교한 청사진을 만들어 창조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말씀으로 해와 달과 별들과 동물, 식물 등 온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을 엿새 동안에 친히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물 중 으뜸이 되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하나님께서 친히 온 우주 만물을 만들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곧 당신과 온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바로 그분께서 지금 이 시간에도 당신을 지탱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히1:3). 하나님은 당신과 온 세상과 상관없이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당신과 온 세상은 매 순간 그분께 의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셨으므로 당신은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께서 당신에 대하여 권리를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창조의 진리는 다른 많은 진리에 다다를 수 있는 초석이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렇다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요? 먼저 그분은 절대적으로 영원하신 존재입니다(신33:27; 시90:2; 93:2). 다시 말해 그분께는 시작이 없으며 또한 생명이 다하는 때도 없습니다. 욥은 그분의 연수를 파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욥36:26). 이것은 곧 그분께서 하나님이 아니신 적은 결코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사야 대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니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나 외에 신이 있느냐? 참으로 신은 없나니 나는 다른 신을 알지 못하노라.”(사44:6, 8) 그분은 항상 존재해 오신 분이며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 무궁히 계실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은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4:24).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영적존재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인격체의 본질은 곧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본질적 측면에서 볼 때 물질적 요소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말은 곧 그분께서 본질적으로 우리같이 눈에 보이는 몸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민23:19; 사31:3; 눅24:39; 요4:24).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므로 눈에 보이지 않으며(롬1:20; 딤전1:17) 따라서 그분의 형체를 그려 볼수도 없고(신4:15-23; 사40:25) 물리적 수단으로 그분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요4:24; 행17:25).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한 곳에만 묶여 있을 수도 없습니다(왕상8:27; 행7:48, 49; 17:24).또한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므로 그분의 앞을 떠나 숨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시139:7-12; 렘23:23, 24). 당신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시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보시며다 알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1-6; 잠15:3; 사46:10; 요일3:20).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 중에는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우리의 유한한 지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더 이상 하나님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확실한 말씀인 성경은 한 하나님이 존재함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신6:4; 사43:10; 44:6, 8; 45:5, 6, 21, 22, 46:9; 막12:28-32; 고전8:4; 딤전2:5; 약2:19). 그런데 한 하나님은 세 분 즉 아버지, 아들(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이십니다(마28:19; 요1:1, 2, 14; 5:18; 20:28; 행5:3,4; 요일5:7; 요이9). 이 세 분은 본질, 권능, 영광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신데 세 하나님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으며 과거도 시간이며 현재도 시간이고 미래도 시간입니다. 그런데 결코 세 개의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단 하나입니다. 동시에 이 셋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분이 다 하나님이며 이 세 분 중 하나라도 없으면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조금 모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의존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작가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진리를 가리켜 ‘크리스천 신앙의 최종적이고도 지고한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쥐고 계십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온 우주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 분으로서 자신의 창조 세계, 자연 만물, 사람과 그들의 행동을 다 다스리시며 심지어 사탄 역시 그분의 권능과 제재 하에 있습니다. 성경은이 세상에 생기는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것임을 보여 줍니다(욥1:7-12; 시107:25-29; 잠21:1, 31; 단2:21-22; 나1:3-6; 마4:10, 11; 엡1:11). 성경의 하나님께는 그 어떤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언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의 모든 거주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 안에서든지 땅의 거주민들 가운데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나니 아무도 그분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그분께 이르기를, 당신이 무엇을 하나이까? 하지 못하리라.”(단4:35; 참조 시115:3; 렘32:17; 마19:26; 눅1:37)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거룩함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분되어 있음을 뜻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곧 그분께서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과 다르고 그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순수하며 선하며 의로우십니다. “그런즉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밝히 드러내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는 것이라.”(요일1:5)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시므로 차마 악을 보지 못하시며 또 차마 불법을 보지 못하시므로 더럽거나 악한 것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합1:13). 정결하게 씻을 것을 규정한 모세의 율법체계; 성막의 구분;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짐승의 희생물을 바칠 것;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신 것(출3:5; 수5:15); 고라, 다단, 아비람의 죽음(민16:1-33);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레10:1-3) 등은 모두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에 그분의 거룩함을 새겨 주기 위한 교훈들이다(R. A.토레이).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의 왕좌 위에 서 있는 스랍들은 계속해서 밤낮으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사6:3;계4:8).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친히 행하시는 모든 일에서 공평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창18:25)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공의로우시며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은 다 의롭습니다. 이처럼 공의로우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와 불법을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룩하지 못한 죄와 불법을 묵과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온 세상을심판하실 것입니다(사45:21; 요5:30; 행17:31; 계15:3).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제 당신이 또 다른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에대해서 생각해보면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친절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원수들에게도 선을 베푸시며 사랑을 보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엡2:4-5; 참조 마5:45; 요3:16).
사람과 첫 번째 죄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완전한 곳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 알아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만이 유일한 제약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엄숙하게 명령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런데 이브는 그 나무가 먹음직도 하고 눈으로 보기에도 좋으며 지혜롭게 할 만큼 좋은 것을 보고 그 열매를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러 행한 첫 번째 죄요, 반역이었습니다. 바로 이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온 인류는 죄성을 지닌 채 태어나 영적으로 죽었으며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결국 육체적인죽음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롬5:12, 18; 엡2:1).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소위 십계명이라 불리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취하지 말라. 2. 너는 너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라. 3.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너는 살인하지 말라. 7. 너는 간음하지 말라. 8. 너는 도둑질하지 말라. 9. 너는 네 이웃을 대적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10.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죄는 한 마디로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이런 율법조항 중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입니다(롬3:20; 갈3:10-12; 요일3:4; 약2:10-11). 예수님께서는 신약 성경에서 율법을 더 엄격하게 해석하셨으며 율법의 두 가지 핵심 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사랑하라.”(눅10:27; 참조 마5:21-32; 막12:30-31)
나와 당신은 모두 죄인입니다! 이제 십계명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열 가지를 다 어기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한 가지는 어겼음을 곧 인정하실 것입니다. 죄 문제의 심각성은 당신이 고의로 이런 율법들을 어겼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이며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또한 의도적으로 이런 일을 행한 사람입니다(시51:5; 사64:6; 롬3:9-19, 23; 엡2:2,3). 당신의 죄들로 인해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당신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 같은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치유할 수 없습니다(사64:7; 렘10:23; 13:23; 요1:12, 13; 롬7:18).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죄인들에게 분노하고 계심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를 범하는 혼은 반드시 죽습니다(시7:11; 겔18:4, 20; 롬6: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 안에서 진리를 붙잡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과 불의를 대적하여 하늘로부터 계시되었나니”(롬1:18). 따라서 당신이 죽기 전에 그분의 진노를 되돌리지 않으면 당신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 던져져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마25:31-46; 요3:36; 롬1:18; 계20:11-15;21:8).
지옥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 없어지고 만다고 말하며 어떤 이들은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연옥을 마련해서 죽은 이후에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중 어떤 의견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영화롭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앞을 떠나 영존하는 파멸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사람이 영원토록 형벌 받는 장소를 지옥이라고 부릅니다. * 지옥은 사실입니다. 지옥은 결코 그리스도인들 이 상상해서 만들어 낸 곳이 아닙니다. 성경은 천국보다 지옥에 대해 더 상세히 말하며 그곳이 실제 장소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성경은 지옥의 정죄와 또 지옥에 갈 사람들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 지옥은 두려운 곳입니다. 지옥은 고통의 장소요, 용광로요, 꺼지지 않는 불이 영원토록 타는 곳입니다. 이곳은 고통을 받는 장소로서 사람들이 슬피울며 이를 가는 곳입니다. 또 이곳에는 밤낮으로 영원히 안식이 없습니다. 참으로 지옥은 무서운 곳이며 지옥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모든 좋은 것에서부터 격리되어 안식과 평안이 없이 거할 것입니다. * 지옥은 최종 장소입니다. 지옥에 이르는 길들은 다 일방통행입니다. 다시 말해 출구가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깊게 갈라진 틈이 있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지옥의 공포나 외로움 혹은 고통은 사람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징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 지옥은 정당한 곳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다시말해 그분께서 믿지않는 죄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은 아주 의로운 일인 것입니다.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거부했으며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그들을 거부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기 원하므로 그분께서는 그들이 선택한 것을 영원토록 확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이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보면서 이제 당신은 신약시대의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피하겠느냐?”(마23:33).
종교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사람은 종교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종교 및 윤리 백과사전」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 백 가지 방법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 달, 별, 지구, 물,불을 숭배해 왔으며 또 돌, 나무, 금은 등으로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경배해 왔고 또 물고기, 새, 짐승 등을 숭배해 왔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수많은 신이나 영을 상상해내어 그것들을 숭배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물, 예식, 성사, 봉사등을 통해 참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아무리 진지하다 해도 다음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의 죄 문제를 풀수 없습니다. * 첫째로 종교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종교는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거기에는 흠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받으실 수 없으며 따라서 사람의 이 같은 노력은 허사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사64:6). 거룩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며 사람의 종교는 결코 이것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 둘째로 종교는 결코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선행은 결코 악행을 없애지 못합니다. 당신의 미덕은 결코 당신의 악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 해도 행위를 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유아 세례, 견진 성사, 침례, 세례, 주의 만찬, 교회 참석, 기도, 헌금, 성경읽기, 기도 등과 같은 종교 행위나 경험은 결코 여러 분의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 셋째로 종교는 결코 사람의 죄성을 바꾸지 못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죄로 인한 현상이지 죄 문제 자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문제의 핵심은 사람의 속마음에 있으며 본질적으로 사람의 속마음은 부패되고 변질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교회에 가서 종교 행위에 참여하면 기분은 좋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가 당신을 선한 사람으로, 의인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누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욥14:4) 위에서 언급한 종교 행위 중 어떤 것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가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당신이 구원받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행위들을 통해 구원받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위들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이런 것들을 의지하면 오히려 당신의죄와 저주만 늘어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처한 상태가 이처럼 비참하기 때문에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남자 없이 마리아의 태 속에서 기적적으로 수태되시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처녀탄생). 이렇게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었으며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마1:18-25; 요1:1-14; 딤전3:16).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애의 대부분을 나사렛이란 이름 없는 촌에서 사셨습니다. 비록 그분께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고 사람들처럼 사셨지만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으며 그분 속에 죄가 없으셨 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과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을 수도 없었고 짓지도 아니하셨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법을 성취하였습니다(히4:15; 7:26; 벧전2:22).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이 되셨을 때에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 곳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며 많은 기적들을 행하시고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통해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종교를 버리고 자신을 향해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질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같이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 가운데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와 또 죄로 인한 형벌에서 그들을 구해내려고 계획하셨기때문입니다(마1:21; 요8:23; 행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을 행하셨지만 그것이 곧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당신은 죄를 범했고 당신의 죄로 인해 당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모든 죄를 징계하 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루시기 위해 두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첫 번째 장소는 사람들이 자기 죄들로 인해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곳으로 지옥이며 최종 적으로는 지옥이 통째로 던져지게 될 불 호수입니다. 두 번째 장소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갈보리 십자가입니다. 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죄가 되셔서 하나님의 저주를 다 당하시고 세상의 죄들을 제거 하셨습니다(엡2:16; 골2:13,14; 벧전2:24).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된 소식을 뜻하는 복음은 매우 복된 것이요, 값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죄 없는 짐승이 희생물이 되어 죄 값을 지불하고 대신 속죄 즉 대속(代贖)을 이루었지만 그런 희생물은 완전하지 못하므로 매해 계속해서 희생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흠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로 인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셔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일시에 완전하게 충족시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세상의 죄들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셨으며 이러한 화해 헌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사53:5, 10-12; 롬3:25; 고전15:3; 갈1:4; 딛2:14; 히1:3; 9:26-28; 10:12; 요일4:10). 이러한 완전 속죄로 인하여 당신과 나 같은 죄인들이 정죄와 저주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화해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3:18; 참조 롬5:10; 고후5:18; 히2:17). 이것이야말로 엄청나게 복된 소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속죄물로 지정하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 죄들을 제거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밝히 보여 주셨으나 사람이 이런 선물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런 엄청난 은혜가 은혜가 되지 못하며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가 남아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일을 안 해도 사랑으로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넘치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일하는 자는 품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느니라.”(롬4:4-5)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예수님께서는 대신 속죄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후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했습니다. 이 부활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셨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살아났음을 절대 확실한 증거들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나타나자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을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참조 마28:6; 행1:3; 롬4:25; 벧전1:21) 부활하신 뒤 사십 일이 지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의 눈앞에서 올리브 산을 떠나 승천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그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행1:11; 딤전2:5; 3:16; 요14:6).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일들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그분께서 성취하고 계신 직분 중 하나는 대언자의 직분입니다. 대언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에게 그들이 구원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동행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며 내적으로는 성령님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대언자가 되시며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계셔서 직무를 수행하고 계시므로 오늘날에는 더 이상 대언자가 없습니다(신18:15; 마21:33-46; 요7:40; 행3:22-26; 히1:1,2). 그리스도께서 성취하고 계신 또 다른 직무는 대제 사장의 직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자기 자신을 죄로 인한 희생물로 드림으로써 제사장의 직무를 완수했으며 지금 이 시간에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중보 역할을 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와 구원을 베푸시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유대교나 천주교에 존재하는 제사장이나 제사장 체계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계속해서 대제사장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요17:20; 히3:1; 7:21-25; 히8:1-6; 벧전1:5).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 이제 어쩌면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떻게 내게 적용됩니까?”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으며 내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내 죄들이 많은데 과연 하나님께서 나같은 사람도 받아 주실까요?” “구원받기 전에 무슨 의식이나 예식 같은 것을 행해야만 합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어떤 특별한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까?” 이런 질문들은 다 좋은 질문들이며 성경적인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구원의 문은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지 못할 정도로 추하고 더러운 죄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은 돈 주고 구원을 사거나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구원받기 전에 무슨 황홀경에 이르는 감정같은 것을 경험할 필요도 없고 무슨 예식이나 의식을 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오직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욘2:9; 롬6:23; 엡2:8-9; 빌2:13; 딛3:5). 구원받기 원하신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이 죄인이며 죄의 형벌이 있음을 인정하고 죄들을 회개하며 예수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원자로, 주님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죄로부터의 회개 회개란 죄에 대해 완전히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먼저 당신이 죄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반역자 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서 당신의 더럽고 추한 죄에 대해 수치를 느끼고 슬퍼해야 합니다. 그 뒤에 당신은 죄를 기꺼이 버릴 태세가 되어야 하고 당신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회개에 합당한 일 들을 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버리고자 하지 않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삶의 방향을 180도 틀어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전심을 다해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 믿음(Faith)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아는 것(knowing)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계 십니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말 그대로 믿는 것(believing)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알아야 하면 또한 그분께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고 하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신뢰하는 것(trusting)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구원자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으면서 당신은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 즉 당신을 구원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을 그분께서 하실 수 있다고신뢰해야 합니다. 구원받기 위해 당신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개념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고 죄 값을 치르셨다는 대신 속죄의 개념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대속(代贖)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만심이 있고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내 자신을 부인하고 완전히 예수님만을 신뢰하여 구원자로, 주님으로 맞아들이게 될 때 당신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배구 시합에서 한 쪽이 공을 서브(serve)하면 다른 쪽이 공을 리시브(receive)하면서 게임이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공을 서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그 공을 리시브하지 않으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물을 마련하시고 큰 은혜를 베푸시려 해도 사람이 그것을 받지 않으면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며 동시에 의롭게 만드십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법적인 용어로서 ‘의로운 사람으로 판정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오는 죄인을 보시고 그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그 시간부터 의인으로 부르겠다고 선포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칭의(稱義)라 합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죄인들을 위해 그들이 지불해야 할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한자 ‘의’(義)를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의(義)입니까? ‘양’(羊) 밑에 ‘나’(我)라는 존재가 있을 때 의롭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믿음으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그리스도께 나오면 그들의 죄들을 제거하시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주십니다.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1:29)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없이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들어갈 수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구의의를 갖고 싶습니까? 불완전하여 더러운 누더기와 같은 당신의 의입니까?(사64:6), 아니면 모든 면에서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의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의 손실을 입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율법에서 난 내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한 의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3:8-9)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稱義)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의를 소유하게 되며 이러한 완전한 의가 당신 자신의 의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100% 확실한 사실 궁극적으로 당신은 죽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죽은 이후에는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나니”(히9:27; 행17:31).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여 그분의 의를 덧입지 않으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호수에 들어가 영원토록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당신의 구원자와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면 영원토록 하늘의 영광과 존귀를 누릴 것입니다(계20:10-22:5). 이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기 원하시닙까? 이 만큼 읽은 시점에서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구원받기 원하십니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싶습니까?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직도 당신이 읽은 것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되돌아가서 지금까지 읽은 부분을 다 시 천천히 주의 깊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진리를 보여 주실 것을 간구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의 필요를 보여주셔서 구원받아야겠다는 욕망을 주셨으면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하며 가장 좋은 것은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입니다. 당신은 이제 죄에 싫증이 났습니까? 죄를 떠나 거룩한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피하고 지금 이 시간 죄 용서를 받아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구원자로 주님으로 친구로 맞아들여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지 않으십니까?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시간 주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유창한 말에 관심을두시지 않으며 겸손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먼저 당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십시오. 당신의 죄들로 인해 영원히 형벌 받 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십시오. 당신 스스로 당신을 구원시킬 수 없음을 고백하십시오.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당신을 구원하고 당신 삶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다음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고 네 집이 받으리라.”(행16:31)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의를 신뢰하는 사람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더라.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홀로 이렇게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내가 다른 사람들 곧 착취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람이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구원받은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구원받은 뒤에는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일을 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이 없으면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해 주시고 섭리로 보존해 주신 책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책입니다.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먼저 신약성경의 네 번째 책인 요한복음과 끝 부분에 있는 요한일서를 몇 차례 읽기 바라며 또한 구약성경의 창세기를 읽기 바랍니다. 그 뒤에 전체 성경을 꾸준히 정독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당신은 경배를 드리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크리스천 친구들을 만나 좋은 교제를 나누고 은혜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신약교회는 이 책자 안에 담겨 있는 복음의 진리들을 가르치고 영혼 구원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만일 그런 교회를 발견하기 어려우면 이 책 뒤에 있는 주소로 연락하기 바랍니다. 셋째로 당신은 물속에서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침례는 결코 여러분을 구원시키지 않으며 죄를 씻어 주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침례의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처럼 침례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아 옛사람이 죽었고 묻혔으며 새사람으로 살아났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침례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천사들에게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히 알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 구원 받은 이후에 마귀는 종종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심하게 합니다. 이때마다 다음의 글을 읽고 성경 말씀만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갑판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네와 몹시 대화를 나누고 싶었네. 자네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하던데….” “예, 저는 구원받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구원받은 것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좀 교만한 말이 아닌가? 사실 나도 한 때는 성실하게 교회에 다녔네. 하지만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왜냐하면 나는 진정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든.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지만 사실 위선자가 많아. 그래서 나는 교회에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지.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가끔 기독교에 어떤 진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곤 하지.” “저는 그 말씀에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았다는 말과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반장님, 이 배수구의 둘레는 얼마입니까?” “배수구의 둘레는 48센티미터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것을 묻지?” “반장님은 그것을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 책에 의거하여 확신할 수 있지. 이 책은 본사에서 보내온 것으로 이 배에 대한 설명서가 아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구원받은 것을 아는 방법과 같습니다. 저는 성경말씀에 의해서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하늘의 본부에서 보내 온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성경말씀 안에서 제가 정죄 받은 죄인이라는 것과(롬3:23) 지옥의 불 호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계21:8). 하지만 저는 또 하나님께서 죄인인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과(롬5:8) 그래서 자신의 유일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저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벧전2:24). 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 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이 말씀대로 저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으며 장차 있을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제가 구원받았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교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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