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2010

거짓 겸손 – 크리스 밸런턴


교회에 주어졌던 예언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도 예언이 교회 안에 돌아다니고 있다. 예언은 이렇다. “마지막 때의 부흥은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세대 의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예언이 분명 하나님은 유명하든 무명하든 그것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실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 정확한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 우리 모두를 통해 세상을 흔들기를 원하신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종종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예언들이 여전히 거지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며, 그것은 거짓 겸손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결코 작은 자나 무명한 자가 없다. 그곳에는 정복자보다 뛰어난 아들과 딸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작은자(무명한 ) 사용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있다고 말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들 모두에게 왕의 자녀로의 부르심을 상기시켜 주어야만 한다.

결국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적 사건을 담당할 그의 백성들을 세대를 거쳐 만들고 발굴하셨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도 인류의 족보에 근거하여 요셉의 전체 가계에 그의 이름을 올리도록 하셨다(요셉은 그분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지만).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예언은 부흥이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말한다. 거짓 겸손은 우리의 이름을 흠쳐가고 우리의 정체성을 빼앗아 가버려, 결국 우리로 하여금 어둠의 세력 앞에 무력한 자로 만들어버린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로 우리를 부르실 , 그분은 결코 우리의 작고 보잘 없음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반면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너는 강한 용사다. 너는 열방의 아버지야. 너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자다라는 엄청난 찬사를 보내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과는 달리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문화는 스스로를 작고 보잘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다. 결과 우리는 대적 마귀보다 작은 존재로 여겨져서 진정한 정체성이나 권위를 잃어버린 마귀와 싸우도록 방치되어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부르심을 붙잡아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 1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거룩하지 못한 낮은 자존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정체성을 회복한 후에는, 과거에는 희미했던 삶의 목적으로 곧바로 나아가는 것을 수없이 있다. 기드온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운명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낮은 자존감으로 인하여 거짓 겸손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보잘 없이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보자.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이니다”(6:12-15)

천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기드온의 자존감을 불러일으킬 있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알았다. 기드온 처럼, 많은 이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악한 것들에 싫증이 있으면서도, 정작 기도하고 있는 기적이 이미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용사라고 부르셨을 , 비로서 기드온은 그토록 갈망했던 정의 실현이라고 하는 부르심으로 걸음 나아갈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이 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압제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진짜 억압은 바로 기드온 내면에 있었던 이다.

천사의 말에 대한 기드온의 내면을 보면 그의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를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지극히 약하고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작은 자가 아닙니까.” 그의 문제는 그의 대적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얼마나 작은 자라는 있었다. 당신은 문제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크게 낙담하는 가를 보면 사람의 정체성의 크기가 얼마나 작은지를 있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디안과 싸울 때에 외치기를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7:20)라고 말한 것을 보면 흥미롭다. 기드온이 하나님이 그에게 작정하셨던 지도자의 위치 오르자, 사람들은 하나님과 기드온에게  동시에 충성하게 것이다.

거짓 겸손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현재 만연해 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놀라운 찬양을 부른 직후 우리는 흔히 이런 장면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훌륭한 찬양이었다며 칭찬을 하면 보통 사람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제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종종 당신 오늘 별로 부르지 못했어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어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기 때문에, 칭찬을 받을 애써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사실 이런 마음 자세가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기드온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일종의 억압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내면에서의 싸움에서 승리할 다른 전쟁이 우리 주변에서 시작되는 , 그것은 바로 원수가 두려움을 통해 우리를 무력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느헤미야의 삶이 이것을 아주 보여주고 있다. 기드온과는 달리 느헤미야는 그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의 부르심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건축하고 이스라엘 정부를 재건함으로써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동안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원수들이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어 다시금 뒤로 물러가도록 만들어버렸다. 느헤미야와 그를 비난하는 자들의 대화를 살펴보자.

오노(Ono) 의미하며, 그것은 바로 적의 세력이 있는 골짜기를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적의 계략에 빠져서 그의 세력이 있는 골짜기로 내려가지 않는 이다. 만약 당신이 그래도 모험을 감수하면서 그곳으로 내려간다면, 그곳이 (Oh No!)’라고 불리는지를 알게 것이다. 느헤미야는 문제의 골짜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그의 대적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한다. “내가 이제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떠나 정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6:3). ! 이것은 결코 교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그리고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자신감 바로 그것이다.

나중에 원수는 느헤미야를 붙잡으려고 거짓 예언으로 유혹한다. “저희가 너를 죽이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있고 문을 닫자 저희가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6:10). 그때 느헤미야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르기를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저는 하나님의 보내신 바가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내게 이런 예언을 함이라 저희가 뇌물을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 하나님이여 도비야와 산발랏과 여선지 노아다와 남은 선지자들 무릇 나를 두렵게 하고자 자의 소위를 기억하옵소서 하였노라”(6:11-14)

거짓 겸손과 낮은 자존감의 늪에서 뒹글 우리는 사단의 공습을 저지할 능력이 없게 된다. 사단은 겸손의 교리 들고서 우리의 자신감을 뭉개어버리며, 하나님의 사람들을 마비시켜 버린다. 거짓 교리가 가르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자신감 자체를 교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믿음의 시스템이 결국 이런 말을 하도록 만든다. “그건 제가 아니에요. 바로 주님이세요.” 그러나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일하도록 위임을 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다스리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원수는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노아댜예언을 가지고 오늘날 예언사역의 공기를 많이 오염시키고 있다. 소위 노아댜 같은 예언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어둠의 메시지를 예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겁먹은 어린 아이들로 만들어버리고 있다.

사단은 교회가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여 타락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계속 우리 가운데 역사하며 온갖 거짓말로 훼방하고 있다. 거짓으로 훼방하는 말들은 얼마나 교회가 연약하며, 얼마나 세상이 어두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화가 있으신가 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엉터리 거짓말에 속아서는 된다!

겸손을 정의하면 나는 여기서 자만이나 교만 혹은 건방짐을 조장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싶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이 스스로 뭔가 것인 생각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은 자체가 고통이다. 반면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나쁜 감정을 갖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결국 자신을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버린다이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인가를 떠들고 다니는 사람의 교만과 거의 진배가 없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며, 충만한 감사의 마음 안에서 자라나고, 그분의 우리를 향한 열정적인 사람에 대한 경외함 안에서 성숙되어진다. 기도는 겸손의 행동이나.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의 필요성을 깨닫는 사람이면, 창조주와의 교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만의 극치이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아버지의 필요성을 아는 것이다.

겸손은 또한 다른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는 사람을 겸손하게 하되 비굴하지 않게 하며, 사람을 높이되 교만하지 않게 한다!”

<왕의 자녀의 초자연적인 /크리스 밸러턴/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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