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2010
교회를 향한 가치관
사랑하는 하나님 Day 151(5월31일2010) - 마이크 비클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이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18:1-3)
사역을 시작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금방 지쳐버립니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사랑하며 기초를 단단히 세우기 전에,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연인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낙심과 지루함과 좌절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여인으로서 삶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노동의 대가입니다.
그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줄거움 입니다. 먼저 연인으로서 살면, 복음을 휘애 열심히 일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이 들어오거나, 무시당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늘 대피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생깁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아직도 푹 빠져들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에게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적인 즐거움입니다!
* 나의 기도 *
주님, 당신의 신부로서 당신과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야말로, 이 땅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저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 받도록 만드셨고, 그 사랑이 하나님께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창조하셨다.
사역을 시작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금방 지쳐버립니다. 하나님을 연인으로 사랑하며 기초를 단단히 세우기 전에, 사역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연인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낙심과 지루함과 좌절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여인으로서 삶을 즐기는 것이 우리의 노동의 대가입니다.
그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줄거움 입니다. 먼저 연인으로서 살면, 복음을 휘애 열심히 일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공격이 들어오거나, 무시당하거나, 혹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늘 대피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생깁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아직도 푹 빠져들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에게 부어 주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적인 즐거움입니다!
* 나의 기도 *
주님, 당신의 신부로서 당신과 친밀함을 나눌 수 있는 특권을 저에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야말로, 이 땅에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이룰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저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 받도록 만드셨고, 그 사랑이 하나님께 다시 흘러 들어가도록 창조하셨다.
5/28/2010
☆☆☆ 목숨을 건 기도 ☆☆☆ - 존 하이디
(Deborah Kang)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의 기도생활을 자부심했던 것에 대해 처음으로 회개기도 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님들께 부탁하는 것은 이 책을 꼭 사서 읽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908년 여름, 우리는 존에게 산으로 와서 함께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 집 한쪽 편에 있는 언덕 위 독방에 묵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방문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중보 기도를 하며 보냈습니다. 그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기도 제목을 놓고 열심히 중보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혼의 깊은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끼니를 거르기 일쑤었습니다. 그의 방에 가서 보니, 때로는 깊은 탄식을 하며 누워 있거나, 또는 마치 마음속의 불길이 그의 뼈를 살라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서성거리곤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49, 50)고 말씀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불길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존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금식은 하지 않았지만, 음식을 권할 때면 미소를 지으면서, “배가 고프지 않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영혼을 사르는 훨씬 더 큰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었죠. 그러한 영적인 굶주림 때문에 육체적인 굶주림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너희는 여기 있어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머물렀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자신과 함께 겟세마네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주셨던 것입니다.
존의 마음속에는 잃은 영혼들을 위해 고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신구약 성경 말씀을 인용하곤 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을 언급하곤 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그분의 양떼가 우리 안에 안전하게 들어오게 될 때까지 오래 기다리며 애쓰겠다고 맹세하셨다는 사실도 배놓지 않았다.
예를 들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22:18).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와 같은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사용하셔서 존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다. 존에게 있어서 이 무렵은 마치 구름이 간간이 뚫려 그 사이로 빛이 비치듯이, 영광받으신 주님의 빛이 고난과 수고의 신비를 그에게 드러내었던 시기였다. 주님께서는 땅 위에 계셨을 때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던 것처럼, 보좌에 앉아 계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여전히 고난을 당하시는 어린양이시다. 그러한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존 하이드는 주님께서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의 무거운 쪽을 짊어지고 가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이다. 존은 한 걸음씩 다른 사람을 위해 염려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았지만 밝고 명랑했다. 우리 아이들이 그에게 늘 큰 기쁨이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존 아저씨로 통했던 그는 아이들과 함께 자주 기도도 했고, 아이들은 항상 존을 사랑의 미소로 반겼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그런 아이들까지도 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아이들은 그 앞에서 얌전하고 조용히 굴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서 나는 광채를 통해 그가 다른 세상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은둔자와 같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보다 더욱더 그의 매력에 이끌렸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그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영적인 일에 관해 줄 수 있는 여유를 지녔고, 전보다 훨씬 더 참을 성 있게 사람들의 고통과 실망에 동참했다. 존은 자기 양떼를 위한 주님의 열망을 지긋이 나누어지는 듯해 보였다.
그가 깨어 금식하고 기도했던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의 연약한 몸이 과로로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간을 잘 견디어 냈다! 그는 때로 고통으로 침묵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눈앞에서 죽어 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고통은 항상 소망으로 빛났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의 소망,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의 소망으로 말이다.
존은 때로 주님의 한없는 사랑의 깊이를 측량해 보는 듯하다가, 그 사랑이 사무쳐 깊은 감동을 느낄 때면 찬양의 물결이 그의 심령에 밀려와 마치 땅에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듯한 순간을 경험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주님의 기쁨을 누리며 갑자기 소리 높여 찬양했다. 하지만 그의 찬양은 언제나 “영혼의 고뇌 속에서 부르는 찬양”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선교 구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 곧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마치 목구멍이 막혀 들어가는 듯한 음성으로 흐느끼며 탄원했다. 그는 그 고뇌로 인해 영혼 밑바닥까지 뒤흔들렸다. “아버지여, 이 영혼들을 구원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짊어졌던 무거운 기도의 짐이었다. 쓸모없이 녹슬어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불에 타 없어져 버리겠다는 심정에서 울어나온 그의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패터슨이 쓴 들 하나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존 하이드의 기도 생활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삶 자체가 기도였다는 것이 비결이다. 그의 모든 삶의 근원은 누구였는가? 바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이셨다. 그러면 어떻게 그분으로부터 그러한 삶을 허락받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의를 받아야 그렇게 된다. 나 스스로는 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있다고 해도 나의 의는 더러운 의복과 같다. 나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얻는다. 그렇게 될 때, 두 가지 결과가 생겨난다.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보고 내 의를 보지 않으시게 된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외면만을 감사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경우처럼 성령을 통해(요20:22) 우리의 존재 깊숙이 들어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왜 그와 같지 못한가? “위해”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살아서 우리를 ‘위해’, 즉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 내 기도는 항상 실패한다(나는 감히 내 기도 생활을 “생활”이라고 부르기도 두렵다). 나는 나의 실패를 고백하며, 결코 실패함 없는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간구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더욱이,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는” 응답이 주어진다. 그 결과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을 입는다. 그리스도의 기도의 삶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그분은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이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의 기도다. 그렇게 될 때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이다. 이 얼마나 큰 평안이며 위로인가!
기도의 삶을 살려고 인위적으로 애쓸 필요도 없고, 실패를 맛보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는 순간, 수고가 끝나고 우리가 원했던 곳에 다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잠잠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는 한편, 그분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시말해, 우리의 심령 속에 그분의 넘치는 중보 기도가 솟아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게” 되고, 참된 “연합”과 “교제”를 누리게 된다.
<잠들지않는기도의사도/존 하이드/생명의말씀사>
거룩한 삶의 능력 - 존 하이드
사랑하는 나의 친구 하이드의 생애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실과 사건 및 경험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가 지녔던 하나의 큰 특징이 거룩한 마음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그가 지녔던 하나의 큰 튿징이 거룩한 삶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가 충만한 기도 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그의 일생의 과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많은 영혼을 구원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함도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을 구원으로 이끄는 그의 능력은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닌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거룩함 없이는 누구도 위대한 영혼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드 자신도 분명히 말하기를, “자아가 죽어 보이지 않게 장사되어야 한다. 장사되지 못한 자아의 썩은 냄새는 영혼들을 놀라게 해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존 하이드는 개인적인 성화의 경험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의 살ㄻ 자체가 설교였다. 기도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기도했다. 그의 삶 자체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모든 죄를 깨끗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증거였다.
나는 존 하이드에 관한 증언들을 여러 경로를 통해 모아 보았다. 이제 함께 그러한 증언들을 들어 보자.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종이자 기도의 사람이었던 그의 거룩한 삶에 관한 증언들을 더 찾아보면 틀림없이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옥스퍼드 주교는 개인의 거룩한 삶에 관해 말하기를, “거룩한 삶의 능력만큼 강한 능력은 세상에 없다”고 했다. 은사와 재능이 있더라도 기회가 따라주지 않을 수도 있고, 고된 노력을 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거부할 수도 있지만, 거룩한 삶에서 나오는 영적인 힘은 기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닫힌 문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모두가 자기 유익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 이상하고 복잡하게 얽힌 인간 세상에서 아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 사람으로부터 신비롭고, 겸손하고, 조용하고, 또한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 뿜어 나왔다. 존 하이드의 신비한 능력과 위대한 영향력은 바로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드린 기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끓었다.
자신을 잊고 전적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당신의 형제인 그 사람입니다.(하이드의 누이가 받은 편지에서).
하이드 선교사님의 영성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그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기이한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 인도인)
하이드를 잃은 것은 특히 인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그의 신학교 동기)
그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친구를 대하듯 그리스도를 대했으며, 그분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셨기 때문에, 그 영혼이 언제나 밝게 빛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가 계시되었습니다. (어느 인도 선교사)
그는 인도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년 전에 지난 가을에 시알코트 집회에서 행했던 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르두어, 펀자브어, 영어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전하는 말씀은 진정한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인디언 위트니스 지)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말했던 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깨닫게 해준 말씀을 천천히, 조용힌 음성으로 명쾌하게 풀어냈습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앉아서 그가 강해하는 놀라운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느 인도 선교사) –
그는 단순히 선지자로서 말씀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 자체가 거룩해졌다. 어느 날, 한 선교사자 존 하이드를 알고 있는 한 젊은 힌두교인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힌두교인은 “선생님, 아시나요? 하이드 씨는 나에게 마치 신과 같은 분이세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힌두교 사고방식으로는 하이드는 마치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것과 같이 이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침대와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어요. 하지만 푹 쉬면서 많은 중보 기도를 하고 있고, 개인 사역을 할 기회도 적지 않아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마다 거룩한 광채가 밝게 빛납니다!”
그렇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존 하이드의 모든 말과 행위에 거룩한 광체가 밝게 빛난다.”
“외치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 존 하이드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역하는 동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다. 1912년 2월이야말로, 그가 죽음이란 원수와 마지막으로 부딪히게 된 시기였다. 그가 잉글랜드에 있을 때, 찰스 알렉산더가 그를 자기 주치의에게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전문의 한 사람과 두 명의 외과의사가 그곳에 있었다. 그 의사가 하이드에게 그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시키려고 애를 썼다. 물론, 하이드 자신도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놀랍도록 침착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의사도, 알렉산더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래전에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버렸다. 그에게는 이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나로서는 하이드의 생애 마지막 대목을 적절하게 묘사할 말이 없다. 그래서 연합 장로교에서 발행한 출판물(The Men’ Record and Missionary Review)에 실린 W.B. 앤더슨 박사의 글을 인용한다. 앤더슨 박사도 한때 몇 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으며, 시알코트 집회를 주도한 선교 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바 있다. 그는 존 하이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그는 인도의 고난을 향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인도를 구원하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원수들과 필사적인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싸움에 용감하게 뛰어든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승리의 비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약 4년 전 어느 날이었지요. 그는 인도를 위해 기도하는 동안 자신이 경험한 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그가 친한 친구들에게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경험을 허락했다네, 나는 여기 펀자브에서 겪고 있는 우리의 갈등을 넘어서 온 인도 땅에 하나님의 큰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네. 그 전쟁은 멀리 중곡과 일본과 아프리카에서도 진행되고 있었지. 나는 우리가 우리 나라, 우리 교단이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네.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저기에서 힘을 모으고, 전열을 정비하고 계셨네, 바야흐로 하나의 커다란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지,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네. 우리는 바로 이 커다란 세계 대전에 참여하고 있다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우리는 항상 모든 싸움터를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네. 각 사람이 제 역량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배치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네.”
그는 영적 싸움에 임할 때마다 항상 위대한 사령관이신 주님을 바라보았고, 그분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혹독한 고통을 겪은 뒤에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전갈이 인도에 있던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그가 승리의 환호 속에 왕이신 주님의 면전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생각에 젖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그가 “볼, 이수 마시흐, 키 야이!”(“외치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라는 말을 하면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우리 주님이 겪으신 그 끔찍한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원수들이 그분을 잡으려고 밀려들던 그 순간을 말이죠. 그분은 자신이 죽어야 할 시간이 가까이 이른 줄 아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달아나기 전, 곧 겟세마네와 갈보리에 이르기 전에 주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그 때가 이르자, 주님께서는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지요.
나는 하이드가 인도에서 죄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힘든 시간들이 지난 후에 그는 종종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몸을 일으켜 “볼, 이수 마시오, 키 야이!”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이 말은 편자브 교회의 전투 구호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위대한 승리자이신 주님의 면전에서 이 소리를 우리를 향해 크게 외칠 때, 우리는 그 소리가 온 세상에 메아리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외치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아멘!
<잠들지않는기도의사도/존 하이드/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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