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2010

"기도를 통한 영적 전쟁의 승리"

사사시대는 영적의 암흑기, 혼돈의 연속, 시스템이 깨어진 시대입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깨어질 때 회복되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회복의 시스템이 없는 시대입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상처 입었을 때에도 면역이 안되고 회복이 안되면 그것을 에이즈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시대를 영적인 에이즈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깨어지면 암흑기가 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 첫째는 기준이 다 깨어진 시대입니다. 기준이 변화된 시대입니다.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 해괴망측한 일들이 나옵니다. 17장과 18장에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잃어버린 돈을 찾았는데 다시 엄마한테 돌려주었고 어머니가 또 고맙다고 돌려주었더니 얼마 남긴 돈으로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집안에서 신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신상을 만들어 놓고 어머니가 또 이상한 짓을 하면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또 그 일에 제사장을 세우는 등 일종의 이단 종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8장에 넘어가면 단 지파와 결탁이 되어서 아주 거대한 이단 종파가 나오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 이것이 사사기 17장과 18장의 이야기입니다.
 
19장에 넘어가면 뚱딴지같이 레위사람이 하나 나옵니다. 레위 사람이라 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첩을 두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이 첩을 둔 것도 이상한데 이 두사람이 여행을 가다가 베냐민 지파를 만나는데 거기에서 이 첩을 두고 집단으로 강간을 하게 되고 죽게 됩니다. 이스라엘에 이렇게 해괴망측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참 이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레위 사람이 이 사건이 억울하다고 이 시신을 12토막을 내어서 12지파에게 보냈습니다. 이 또한 정말 이상합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에선 반성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11지파가 전쟁을 일으킵니다. 상대도 안되는데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또 베냐민 지파를 거의 다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가 매우 작은 지파가 된 것은 이 때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다 죽어서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은 상황,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지파가 베냐민 지파가 되어버린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혼돈 가운데 이야기들이 17-21장에 나옵니다. 이것이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는 이 정도로 혼란과 기준이 다 깨어진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이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대로 하였다.’ 라고 나옵니다. 이런 혼돈의 가장 큰 이유가 기준이 없기 때문에, 왕 되신 하나님이 없는 시대이므로 멋대로 사는 그런 시대, 혼란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같은 혼돈시대가 오는 이유는 ‘기준’이 사라지면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기준이 사라졌다’는 것을 좀 더 쉬운 말로 ‘세속화 되었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보면 ‘열심’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열심도 있고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뭐든 열심히 합니다. 열심과 열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정과 열심히 없습니까? 
각 교회들을 보십시오. 모두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는 게 무엇일까요? 


열심을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세상의 기준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싸워야 합니다. 잘 보십시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교회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돈을 좋아하니까 교회도 돈을 좋아하고, 세상이 명예를 좋아하니까 교회에서도 명예를 놓고 싸움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권력을 좋아하니까 교회에서도 누가 힘을 갖느냐 권력다툼을 합니다. 이러한 세상적 모습이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의 모습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세상이 박수소리를 좋아하니까 교회에서도 그 박수소리 얻겠다고 열심히 뛰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절대 아닙니다.) ‘세속화’는 다른게 아닙니다. 열심과 열정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달라진 것입니다.

 과거에 정말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우리의 싸움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눈물 흘리는 성도들을 보면 진실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금요일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에 재산을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기도’였습니다. 천국을 위한 기도, 그 때에는 하나님의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또 진실되게 하나님의 교회가 말씀 앞에서 온전하게 서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준을 놓고 열심히 기도했었읍니다.

 사실 이 미가의 제사장, 엉터리같은 신상 만들어놓고 이상한 일을 행했다,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러한 신상만들어놓고 엉뚱한 싸움 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교회가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 들 알고 계시는 것과 같이 기도는 호흡이며, 말씀은 양식이지 않습니까. ‘말씀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옳다고 하면 우리도 옳다고 나아가야 하고 성경이 강조하는 것을 우리도 강조해야 하고 예수님의 심장, 예수님이 가장 원하는 것을 우리도 원해서 나아가야 하는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움직이는 교회, 예수님이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예수님이 눈물짓는 것을 같이 눈물짓고 예수님이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우리 같이 열정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회개라는 것은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세속의 물결을 향해서 나아갔던 방향이 다시 주의 말씀의 물결로, 물줄기를 바꾸는 것입니다

- 두 번 째로 사사기 암흑시대의 특징은 예배라는 회복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회복 시스템, 우리는 모두 더럽습니다. 상수도가 있고 하수도가 있듯이 씻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회복시스템이 살아야 집안이 깨끗해지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우리가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회복해야 하는데 그 회복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느냐, 예배라는 회복 시스템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잠깐 사사가 나타나서 반짝 부흥은 일으켜도 금방 무너지고 회복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배의 붕괴가 얼마나 큰 재앙인지를 보여주는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리막길에서 무언가가 굴러 떨어질 때 중간에 그것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바닥까지 떨어져야 비로소 멈춥니다. 이게 추락하는 인생의 특징입니다.

 만약 추락하는 것이 바닥까지 가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그 내려가는 것에 브레이크 장치를 해놓던지 그러니까 내리막길에서 조정할 수 있게 하든지 그게 아니면 옛날 대관령에 보면 중간 중간에 턱이 있었습니다. 브레이크 조정장치가 고장났을때 그냥 그 턱에 부딪혀서 꽝하고 부딪히면 차는 좀 망가져도 생명엔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놓은 턱을 중간에 만들어 놓았었습니다. 브레이크 파열이 되어서 내리막길에서 죽지 않는 방법, 그 예상을 염두해 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항상 이기는 모드만 있는것이 아니라 지는 모드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에게 브레이크가 있던지 중간 턱이 있던지 회복되는 모습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복의 통로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주께 나와서 예배를 통해서 회복되는 것.

 우리 가운데 슬럼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날마다 새벽기도가 자기 인생에 기준인 사람은 하루 단위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슬럼프가 있다하더라도 오전 또는 오후 한 나절 슬럼프가 있다가 다시 새벽에 회복이 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회복 시스템이 있는 사람이 강력합니다. 또 그것이 아닐지라도 일주일 단위로 회복 시스템이 있습니다. 넘어지고 깨지더라도 또다시 주일에 새 힘을 얻고 일어서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주일마저도 이러한 시스템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몇 달이 지나다가 한 번, 몇 년에 한 번 회복됩니다. 예배가 깨어진 성도들, 예배가 깨어진 나라들에 가보면 그 특징이 슬럼프가 길다는 것입니다. 꼭 사사기 같습니다. 어느 때 가면 뜨거워졌다가 또 어느 때 가면 완전히 바닥을 헤매이곤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배에 목숨 거는 겁니다. 내리막 길을 가더라도 바닥까지 가서는 않되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모두 잃었다고 생각할 때 실제로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잃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려움을 당해봐야 5%, 10% 정도입니다. 남은 게 더 많거든요. 그 때에 멈추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일어서게 만듭니다.

 여러분 우울함과 우울증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울함은 그저 기분입니다. 한 때 밥 잘 안먹고 우울한 기분이었다가 그 다음날 다시금 밥 잘 먹고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우울한 모드가 2주 이상 가는 것입니다. 우울증, 우울증의 특징이 뭡니까? 우울증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 수 있습니다. 계속 우울함을 묵상하고 나누고 큐티하면 2주가 뭡니까? 두 달도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혜가 뭡니까? 예배를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씻겨 내고 다시금 약속의 말씀 붙들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 시스템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 세 번째는 영향력의 속도차이입니다.
사사기가 암흑 시대였던 이유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끔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확산이 안 되고 혼자 그저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성령의 능력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 능력이 확산이 되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무엘 시대에 모두가 미스바 광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여 그 은혜를 누리기 때문에 그 시대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누리고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무엘 가슴 속에 있었던 불꽃이 퍼져 나갔습니다. 반면에 사사기 시대의 특징은 섬과 같이 그냥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꽃이 있어도 여기 하나, 저기도 하나 정도의 불꽃이지 확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세속화의 속도와 영향력이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의 속도와 영향력이 있습니다. 더 센 곳이 이기겠지요. 그러므로 사사기같은 암흑시대를 깨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열심히 뿌리는 것입니다. 열심히 말씀 뿌리고 기도하고, 계속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낙심하고 좌절하더라도 계속하는 겁니다. 계속 하는 것. 바로 계속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말씀증거 해야 합니다. 성도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하나도 없든 계속해서 강단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계속해야 합니다. 계속하는 성도가 제일 중요한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무드와 컨디션에 관계없이 계속 나아가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에게 던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뭐 하냐, 컨디션 회복하고 영적으로 충만했을 때 무언가를 해야지 하면서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중단시킵니다. 그러면 회복될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4:2절에 보면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내 환경과 무드와 관계없이 계속하는 사람에게 강함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빛입니다. 빛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감당해야 합니다. 작은 빛이라도 그 빛을 만들어놓아야 합니다. 그럴때 이 땅에 암흑시대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계속하십시오. 여러분이 작아 보이지만 그 자리에서 말씀 전하고 기도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암흑시대는 물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의 회복과 예배시스템으로의 회복과 또 복음 증거의 계속함을 통해서 개인 암흑시대를 빛과 영광의 시대로 바꾸는 믿음의 성도 한 분 한분이 되게 해달라고 열심히 간구하겠습니다.

출처: Love and Truth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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