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TV를 거의 못보기도 하고 안보기도 하는 저입니다만, 제가 참 좋아하는 호주 TV 프로그램 중에 “보더 시큐리티(Boarder Security)”라는 것이 있습니다. Channel 7에서 하는 건데요, 말 그대로 이 나라의 경계, 즉 국경(boarder)을 탄탄하게 지키는 일과 그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내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검역관리(quarantine)와 출입국관리(immigration)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공항이나 항구, 혹은 우편물관리소 같은 곳에서 직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 나라를 외부의 병충해나 외국인들의 불법체류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가를 찍는 것이지요. 저의 아내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더 시큐리티’ 프로그램만 나오면 다른 채널로 돌려 버립니다. 재미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도 없는 사람인 저는 그 프로그램이 너무 재미 있습니다. 아내 농담처럼, 목회 안하면 공항 같은 데서 근무하면서 검역이나 출입국 관리요원으로 일하면 재미 있을 것만 같습니다.
요즘은 제가 많이 망가졌지만, 어려서부터 바르고 옳고 정의로운 일을 좋아했었습니다. 엄마 심부름하고서 잔돈 꼬불쳐 본 적 없던 아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런 ‘정의감’이 제 안에 있어서, 잘못된 것에 대해 고치고 싶어하는 욕망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따분한 프로그램에 흥분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목회자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세상의 편리’를 기막하게 좋아하는 융통성 넘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라는 불변의 가치를 고집있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목회자로 사명을 받고 세움을 받은 사람이라면, 아닌 것에 아니라고 말하고, 맞는 것에 맞다고 선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사람들 기분 때문에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해 주고, 사람들 비위 맞춰 주려고 분명히 아닌 것도 맞는 것으로 쳐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한이 있어도 목회자로서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여러 길 중에 ‘한 길(a way)’이 아니라 ‘그 길(the Way)’이며, 수많은 ‘아들들 중에 하나(a son)’가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the Son)’이기 때문입니다.
호주 들어오는 비행기를 타면 입국신고서를 적게 되는데, 서류를 작성하는 모든 승객이 틱(tick)해야 하는 질문 가운데 이런 문항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음식물(any kind of food)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좀 지나치게 규제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청정지역을 표방하는 호주로서는 그렇게 까다로운 검역과정을 통해서라도 나라를 깨끗하게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호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시드니나 멜번같은 국제공항을 들어오는 순간부터 까다로운 호주법의 적용을 받게 됩니다.
이 나라에서 제시하는 규칙을 준수할 용의가 없는 사람, 적어도 그럴만한 법적인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은 아예 받아 들이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보더 시큐리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던 나라에서는 어떻게 했든지간에, 호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중해야 하고, 지켜야 하고, 따라야 하는 ‘법’이라는 것이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그 법을 존중하지 않거나, 지키지 않거나, 따르지 않는다면 호주는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어떤 형태로든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요단강 건너편에서 앞두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애굽에서부터 이끌고 나온 지도자 모세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다는 메시지를 하나님께 들었지만,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현실적으로 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서 모세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8절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지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란 이 말을 하는 모세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너희’라는 것은 모세 자신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 즉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될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지난 40년 동안을 지낸 광야에서는 자기들 소견대로, 자기들 멋대로 살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감정에 충실해서 기분대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불평불만은 그들의 입에서 늘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숭배까지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무엇이 옳은지를 타협하지 않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광야에서는 우리 멋대로 지냈었지만, 이제 저기 가나안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뭘 잘 모르고 설쳐대로 까불었다지만, 이제부터는 알 건 알아야 하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삶과 요단강을 건넌 다음의 삶은 결코 같아서는 안된다.’ 이 말을 지금 노년의 모세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어젠가 인터넷에서 누가 그런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데 있어서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개신교의 보편적인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된 회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버릴 것 버리지 않고서, 바꿀 것 바꾸지 않고서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저도 100%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내 무거운 짐 벗어 버렸네. 죄중에 다시 방황할 일 전혀 없으니 저 생명시냇가에 살겠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요단을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요단을 건너지 않으면 가나안에 갈 수가 없고, 요단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그 귀한 복지에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금뺏지를 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몸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요단을 건너려고, 아니 될 수 있는대로 요단을 뛰어 넘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회개하지 않고 구원 얻는 법을 모색하며, 죽지 않고도 사는 길을 꿈꾸고, 과거의 더러운 죄악들을 최대한 누리면서도 가증스럽게도 예수의 보혈을 뻔뻔하게 수혈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 들어 가려면, 요단강 물에 몸을 담가야 합니다. 요단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곳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당신이 먼저 보여 주신 곳이란 말입니다. 기독교는 값싼 종교가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입으로 대충 고백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보더 시큐리티! 주님께서 보안요원이 되셔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나 하나 때문에 천국의 가치가 상실되지 않도록 믿음을 철저히, 그리고 수시로 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가 요단 건너 가나안에 합당한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Apr. 2nd, 2011 새벽예배 (본문/ 신명기 1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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