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우리를 오래 전부터 지도력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보여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나갈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지도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도력이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역할의 권위에서 생겨난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조금 어려운 정의지요. 바비 클린턴은 그의 책 ‘지도자를 만드는 법’에서 지도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도력이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룹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다윗은 찬양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모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의 위치에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는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그것은 양들을 불러내는 조용한 훈련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섬김)를 위하여 우리의 성품을 준비시키시고 빚으시기 위하여 우리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긍정적인 삶의 경험을 이용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왕으로서 선택되는가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들레헴에 살던 이새에게 사무엘을 보냅니다. 이새의 여러 아들 중 하나가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계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주의 기름부음 받을 자가 여기 있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게서는 사무엘의 생각을 부인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그 많은 아들들을 심사한 뒤, 이들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없는가를 이새에게 물어야만 했습니다. 이새는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확실히 하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후에야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도 무시되었던, 양들과 함께 있던 다윗이 입장합니다. 그 때 주님은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택되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택되어지는 것도 똑같이 힘든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받지 못한다면 당신은 질투심으로 불탈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선택되어진다면, 불안과 좌절을 경험할 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간구하였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으며, 나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셨나이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아들의 성품을 우리가 따르고 우리도 그분처럼 정결하고, 순결케 하시는 방법을 아십니다. 만약에 그 분이 우리를 지도자가 되도록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도자로 선택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일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논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할지 당신이 정말로 아신다면, 당신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요.....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등등..”
다윗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때문에 지도자로서 선택함 받았고, 그가 양들과 홀로 있었을 때에, 그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계발되었기 때문에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있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예배(경배)를 개발하는 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일에 열심이십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같은 모든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부분의 사랑의 노래를 썼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 고독의 장소에서 당신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속에서 그 무언가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서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지도자로 쓰임 받을 때에도 동일하게 있게됩니다.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하였을 때 다윗이 보여준 대담한 용기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다윗의 시편에서 그 과정을 표현한 문장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오 주님. 나는 당신의 진리 가운데서 걸을 것입니다. 나에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을 주세요. 그래서 내가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겠나이다”(시86:11).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보여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 밖으로 나갈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나는 지도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도력이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역할의 권위에서 생겨난 주권적인 선택”이라고 말입니다. 조금 어려운 정의지요. 바비 클린턴은 그의 책 ‘지도자를 만드는 법’에서 지도력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도력이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룹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다윗은 찬양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모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과 민족의 지도자의 위치에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는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그것은 양들을 불러내는 조용한 훈련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섬김)를 위하여 우리의 성품을 준비시키시고 빚으시기 위하여 우리가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긍정적인 삶의 경험을 이용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왕으로서 선택되는가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들레헴에 살던 이새에게 사무엘을 보냅니다. 이새의 여러 아들 중 하나가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계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확실히 하나님 앞에서 주의 기름부음 받을 자가 여기 있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게서는 사무엘의 생각을 부인하셨습니다. 사무엘은 그 많은 아들들을 심사한 뒤, 이들 말고 또 다른 아들이 없는가를 이새에게 물어야만 했습니다. 이새는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확실히 하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후에야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도 무시되었던, 양들과 함께 있던 다윗이 입장합니다. 그 때 주님은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 그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택되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선택되어지는 것도 똑같이 힘든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선택받지 못한다면 당신은 질투심으로 불탈 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당신이 선택되어진다면, 불안과 좌절을 경험할 지도 모릅니다. 다윗은 간구하였습니다. “왜 나를 선택하셨으며, 나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하셨나이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아들의 성품을 우리가 따르고 우리도 그분처럼 정결하고, 순결케 하시는 방법을 아십니다. 만약에 그 분이 우리를 지도자가 되도록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도자로 선택하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일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 논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할지 당신이 정말로 아신다면, 당신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요.....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등등..”
다윗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때문에 지도자로서 선택함 받았고, 그가 양들과 홀로 있었을 때에, 그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계발되었기 때문에 선택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홀로 있는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당신의 예배(경배)를 개발하는 것은 어느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일에 열심이십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신 것같은 모든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부분의 사랑의 노래를 썼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 고독의 장소에서 당신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속에서 그 무언가를 개발해야 합니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서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가 지도자로 쓰임 받을 때에도 동일하게 있게됩니다.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에게 도전하였을 때 다윗이 보여준 대담한 용기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다윗의 시편에서 그 과정을 표현한 문장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오 주님. 나는 당신의 진리 가운데서 걸을 것입니다. 나에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을 주세요. 그래서 내가 당신의 이름을 경외하겠나이다”(시86:11).
“하나님 안에서 나는 신뢰합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하겠습니까?(시56:11)”
또 다른 확인을 통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도자의 위치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의 왕으로 선택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당신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나요? 혹은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음을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서라도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소명
사무엘상 후반부에서 우리는 다윗의 기름부음과 사울이 다윗을 왕궁으로 불렀던 사건과 함께 따라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와서 그를 섬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당신은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일하는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하나님! 왜 그들은? 내가 그들보다도 더 오래 당신과 함께 있었는데?” 당신은 강렬하게 지도력을 원했지만, 여전히 당신에게는 지도력이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지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당신 스스로 세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력의 정의(뜻)를 기억해보십시오. 지도자의 위치란 몸을 세우는 결정적인 직무상의 권위의 결과로 생긴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지도력은 당신의 필요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력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소위 긍정적 사고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감정적인 치료의 근원’으로서의 지도력을 봅니다.
당신은 생각하기를 “내가 친척관계 있기에 찬양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만약에 내가 우리 교회에서 최소한 찬양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면 그 때 나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라고 하나님께 확인 받은 때로부터 실제 사역을 시작하는 기간 사이에 40일 동안의 금식을 위해 광야로 갈 때도 성령으로 인도함 받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침례)를 받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양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길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 예수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는 곧바로 복음을 전하시던가 치유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40일 금식을 위해 광야로 가셨던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조급하고, 참을성 없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적인 부분들은 이러한 단계에서 성령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더욱 더 커져야하고 우리는 더 작아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음악가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더 어렵습니다. 나는 이 단계에서 나의 삶을 회고합니다. 일자리가 필요했을 때, 나는 고용되지 못했었고, 그래서 나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느꼈습니다. 처가댁 식구들은 나를 미쳤다고 여겼습니다. “너는 왜 대학에 가지 않느냐? 가서 학위를 받아라, 더 좋은 경력을 가져라. 그러면 혹시 아느냐?”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그렇게 하지 말라. 이것을 해라” 기다림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마침내 어느 정도의 지도력을 부어주셨고, 어쨌든 당신은 더 이상 지도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찬양 사역과 관련하여 우리 교회의 50-70명의 성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기다림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울해합니다. 그들은 음악 연주가로서 쓰임받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렇게 대략 2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마침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속에 있는 그것들(야망)을 다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지도력이 부어졌을 때, 스스로 세워지기 위한 우리의 필요성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몸을 세우려는 갈망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세워지려는 갈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세웁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세웁니다. 그것은 배려나 열매맺는 사역이 아닌 우리를 세우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임무
나는 지도력에 관하여 한가지 더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임무입니다. 당신은 준비되어졌고, 당신은 소명을 받았고, 오랫동안 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시는 지도자에 의해서와 사람 앞에서 당신은 임명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좋다. 나는 너를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하려고 한다” 이 말씀을 들은 당신은 일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다 새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을 새로운 믿음과 모험의 수준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심지어 은사주의적 경배와 많은 부흥의 경배에서 내가 발견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춥니다.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준비할 시간이다” 라고 그들에게 말하려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아니예요, 나는 다시 그런 과정을 통과할 수 없어요”
교회들을 방문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에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좋은 경배였지만, 끝(edge)이 어디 있지? 신선함은 어디에 있나?” 보통 그 자리에는 아마도 그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되어서 그들이 기꺼이 또 다른 모험을 감수하는 그 준비의 순환 과정에 다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준비하신 다른 사역으로 인도 받기 위해 모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양보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숙련되고 특별한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혹은 주께서 우리가 학생의 자세를 갖도록, 항상 배우는 자로, 항상 다음 일들의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 기꺼이 기다림의 자리로 되돌아가도록 부르셨습니까?
또 다른 확인을 통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도자의 위치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의 왕으로 선택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해 주셔서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적당한 때에 적당한 사람들을 만나서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당신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당신이 지도자가 되었나요? 혹은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음을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서라도 당신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소명
사무엘상 후반부에서 우리는 다윗의 기름부음과 사울이 다윗을 왕궁으로 불렀던 사건과 함께 따라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와서 그를 섬기기 시작했다” 때때로 당신은 누군가가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일하는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신은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하나님! 왜 그들은? 내가 그들보다도 더 오래 당신과 함께 있었는데?” 당신은 강렬하게 지도력을 원했지만, 여전히 당신에게는 지도력이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당신은 여전히 지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당신 스스로 세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력의 정의(뜻)를 기억해보십시오. 지도자의 위치란 몸을 세우는 결정적인 직무상의 권위의 결과로 생긴 주권적인 선택입니다. 지도력은 당신의 필요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지도력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소위 긍정적 사고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감정적인 치료의 근원’으로서의 지도력을 봅니다.
당신은 생각하기를 “내가 친척관계 있기에 찬양 지도자가 될 수 있으며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만약에 내가 우리 교회에서 최소한 찬양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되면 그 때 나는 어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라고 하나님께 확인 받은 때로부터 실제 사역을 시작하는 기간 사이에 40일 동안의 금식을 위해 광야로 갈 때도 성령으로 인도함 받았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침례)를 받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양으로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길 “이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한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 예수께서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그는 곧바로 복음을 전하시던가 치유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40일 금식을 위해 광야로 가셨던 것입니다.
본능적으로 조급하고, 참을성 없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인간의 본성적인 부분들은 이러한 단계에서 성령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더욱 더 커져야하고 우리는 더 작아져야만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음악가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더 어렵습니다. 나는 이 단계에서 나의 삶을 회고합니다. 일자리가 필요했을 때, 나는 고용되지 못했었고, 그래서 나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애써야만 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느꼈습니다. 처가댁 식구들은 나를 미쳤다고 여겼습니다. “너는 왜 대학에 가지 않느냐? 가서 학위를 받아라, 더 좋은 경력을 가져라. 그러면 혹시 아느냐?” 그때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그렇게 하지 말라. 이것을 해라” 기다림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마침내 어느 정도의 지도력을 부어주셨고, 어쨌든 당신은 더 이상 지도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찬양 사역과 관련하여 우리 교회의 50-70명의 성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여전히 야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기다림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울해합니다. 그들은 음악 연주가로서 쓰임받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렇게 대략 2년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들은 마침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속에 있는 그것들(야망)을 다룰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지도력이 부어졌을 때, 스스로 세워지기 위한 우리의 필요성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몸을 세우려는 갈망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세워지려는 갈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엇이 우리를 세웁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세웁니다. 그것은 배려나 열매맺는 사역이 아닌 우리를 세우는 그분의 사랑입니다.
임무
나는 지도력에 관하여 한가지 더 말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임무입니다. 당신은 준비되어졌고, 당신은 소명을 받았고, 오랫동안 잘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모시는 지도자에 의해서와 사람 앞에서 당신은 임명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좋다. 나는 너를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하려고 한다” 이 말씀을 들은 당신은 일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다 새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은 당신을 새로운 믿음과 모험의 수준으로 당신을 부르십니다. 심지어 은사주의적 경배와 많은 부흥의 경배에서 내가 발견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지도자가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춥니다.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준비할 시간이다” 라고 그들에게 말하려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아니예요, 나는 다시 그런 과정을 통과할 수 없어요”
교회들을 방문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에 나는 내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좋은 경배였지만, 끝(edge)이 어디 있지? 신선함은 어디에 있나?” 보통 그 자리에는 아마도 그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되어서 그들이 기꺼이 또 다른 모험을 감수하는 그 준비의 순환 과정에 다시 들어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준비하신 다른 사역으로 인도 받기 위해 모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양보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도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숙련되고 특별한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혹은 주께서 우리가 학생의 자세를 갖도록, 항상 배우는 자로, 항상 다음 일들의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서 기꺼이 기다림의 자리로 되돌아가도록 부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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