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2010

옛 사람의 죽음 - 스티브 맥베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질을 얻었다면 옛 본질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악한 개성이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변한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의 본질이 완전히 변화됨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옛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1. 옛사람은 아담에게 물려받은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죄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언제 죄인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영적으로 죄인이라고 합니다.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에덴동산에서부터 죄인입니다.

아담 안에 이미 우리가 존재하였기에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이미 죄인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생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아버지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유전자가 이미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할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셨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존재할 수 없습니다. 5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내가 죽은 것이요, 우리 아버지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유전자적으로 그 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 나도 죽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볼 때 아담이 태초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불복종하였을 때 이미 우리도 그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5:12)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처음 범했을 때 비로소 죄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첫 번째 죄를 지은 이유는 우리 본질이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궁 안에서 죄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거짓말을 할 줄 압니다. 거짓말을 어디서 배웠다는 말입니까?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 아이들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이 받은 죄의 씨앗은 나에게 받은 것이고 올라가서는 아담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거짓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장남을 바라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그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오고 그 아기를 우리 침대에서 같이 재웠습니다. ‘이제 아이를 자기 방에 두고 우리 둘이서 자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아기 방으로 옮겼습니다. 우리가 아기에게 허리를 숙이고 잘 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침실로 돌아와서 자려고 하는데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침대에서 떨어졌나? 나무 사이에 머리가 끼었나? 아내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엄마를 보자마자 웃었습니다. 아이가 울었던 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기는 거짓말쟁이! 4명의 자녀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스스로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잘합니까? 어떻게 이런 것을 배우죠? 우리가 죄의 본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히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부 죄의 본질로 태어납니다.

2) 성경은 우리가 지옥에 갈 운명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이 되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아기가 태어난 것입니다. 태어날 때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일도 할 일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 것도 안하고 있으면 지옥에 갑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미 우리는 지옥행으로 낙인이 찍힌 것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5:18)

우리는 한 사람의 범죄로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3:17)

그분은 이 세상에 왔고 그는 정죄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정죄를 받게끔 되어있습니다.

3) 우리가 믿고 거듭나기 전에 우리는 죄악성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질이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2:1-2)

성경은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왜 죄인들이 죄를 짓는 줄 아십니까? 본질상 죄를 짓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죄가 없게 하자’라는 구호를 만듭니다. 그래서 알콜 중독자에 걸린 사람을 구원해 보려고 합니다. 마약 중독자를 구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목표는 이러한 사람을 정화하여서 사회를 깨끗케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걸레를 가지고 해변에서 모래를 닦아내는 것과 갖습니다.

죄인들로 죄를 못 짓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서 죄를 멈춘다 하여도 그에게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들에게 다가가기 전에 그들은 이미 지옥에 갈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죄를 범하든지 안 범하든지 이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사람들은 나쁜 일을 했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이러한 본질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죄의 본질이 우리의 삶을 컨트롤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벗게 하고 회개케 하셨습니다. 얼굴을 돌려서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에서 떠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를 행하셨을 때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강대상이 천국이라고 생각합시다. 지금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쪽은 영원히 흘러가는 곳입니다. 앞으로는 영원토록 올 것입니다. 시간은 여기서 저기 까지가 끝입니다. 하나님은 강대상에서 한눈에 보십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태어났습니다. 나는 나의 삶을 매일 매일 삽니다. 운전하고 가면 건물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학교에 들어가고 대학에 가고 결혼하고 아들을 나고 네 번째 아이까지 낳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거지? 저 앞에는 내 죽음이 있겠지요. 나는 시간 안에서 삽니다. 시작이 있고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에도 계셨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구원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잡으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이미 알고 계신데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 가져가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나를 십자가에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 아담 안에 있었던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내 모든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나의 죄인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1)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와 함께 죽음에서 부활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부활하였을 때는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장사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새로운 생명을 가졌습니다. 나는 거듭났습니다. 나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7)

그래서 예수가 죽었을 때 나의 옛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삶에 대한 죄의 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완전히 죄악성, 타락성은 십자가에 갔습니다. 옛 자아가 죽었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손안에 계란이 있습니다. 이 계란을 인큐베이터에 가져갔습니다. 이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달걀의 껍데기를 우리의 몸이라고 합시다. 내용물을 마음이라고 하면 하얀색은 혼이고 노란색은 영이라고 합시다. 이것이 깨어진다면 비정상으로 태어납니다. 이 노란 것이 닭의 생명입니다. 만약에 내가 안에 들어가서 비정상이었던 그것을 주사로 다 빼어냈다고 합시다. 그리고 아주 건강한 노란자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닭으로 태어나겠습니까? 다른 것입니다.

안에 있는 노란 생명을 새것으로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변화된 닭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변화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닭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여러분의 죄악된 옛사람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영을 집어넣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옛 자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러분의 뇌는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옛 자아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옛사람이 죽었다면 왜 나는 죄를 짓습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옛 자아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로마서6:1-3)

우리가 어떻게 옛 자아가 죽었는데 죄를 범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와 연합하여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하였을 때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갈보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몇 사람이 같이 죽었을까요? 예수가 있었고 강도가 둘 있었고 내가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우리의 죄만 십자가로 간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가 간 것입니다. 옛사람은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6:6)

우리의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습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3:3)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이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가, 죄의 본성이 죽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한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의 본성입니다.

2)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가지 본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된 생명입니다.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오직 한 가지 본성만이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의 본성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안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설교에 이런 예화까지 썼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오래된 한 마리를 굶기고 새로운 개에게는 기도와 성경과 다른 것을 먹이면 그 개를 이길 것입니다. 만약에 옛 개에게 자꾸 먹이면 새 개를 이길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할 때는 듣기는 좋았지만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도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설교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배운 것을 설교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전통을 설교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길 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옛사람의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는 한 가지 본성만이 있습니다. 본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가장 기초되는 성질입니다. 이 강대상의 본질은 나무입니다. 이 성경책의 표지의 본질은 가죽입니다. 본질은 기초적인 성질입니다. 이 컵은 가죽 컵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이도 되고 동시에 가죽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의로운 본질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사람의 본질은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거기서 무엇이 죽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 죽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혼인 개성이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기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 육체가 살아있는데요? 바울의 개성이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죽었다는 것은 옛사람을 말합니다. 영을 말합니다. 죄를 지었던 나의 본성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이라고 합니다. 육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여서 비참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전17:28)

그가 바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4)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1:21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입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옛사람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3) 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십자가로 인하여 제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안에는 두 가지의 본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집안에 두 명의 주인이 있으면 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력이 한 집안을 못 세우는데 두 세력을 우리 가운데 남겨놓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의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의 본성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한가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우리의 죄된 옛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죄는 완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절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매일 마다 왜 죄를 범하는가를 언젠가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분의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개처럼 짖을 수 있습니다. 한국 개는 한국말로 짖겠지요? 멍멍멍. 미국 개는 바우 바우하고 짓습니다. 나는 한국 개처럼 멍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멍멍한다고 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개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죄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나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골로새서2:11)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 남자에게서 떨어져 나간 살점은 절대로 스스로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중의 하나는 언약의 할례인데 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육에 대한 할례가 아니고 우리의 영에 대한 할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 오셔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곳까지 찾아가십니다.

여러분의 옛 본질 그것을 잘라버립니다. 완전히 떼어냅니다. 떼어낸 것은 결코 다시 여러분에게 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떼어 내셨고 그것은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약을 너무 많이 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의 죽은 시체가 장례식장에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가 와서 죽은 친구를 보았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으로 가서 마약을 꺼내서 말합니다. “일어나 여기 마약이 있어 얼마나 좋은 것인데 아무도 안보니까 한번 해봐!” 그 친구가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먹어봐 순수한 마약이야! 이 친구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빨리 코로 마셔.” 만약에 죽은 시체가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야 너는 바보냐? 나 죽었단 말이여” 죽은 시체는 마약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마약에서 자유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죄의 능력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두 명의 청소년이 마약이 있고 술 마시는 장소에 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청소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죄는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죄는 여러분의 삶 속에 엄청난 능력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은 이제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더 이상 그 죄의 능력은 여러분 안에서 능력을 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인하여 여러분은 싫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줄 알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꼭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싫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에 선택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선택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는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그는 죄의 종입니다.

오직 믿는 자만이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마약에 손대신 적이 있습니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음란했습니까? 혹시 알콜 중독이었습니까? 더 이상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나는 아직도 그래’라고 하면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옛사람이 죽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린도전서6:9-11)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불의합니까? 여러분은 의롭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가 행하는 일을 적어 놓았습니다.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술 취한 자 등이 나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었습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여러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 더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뒤로 지나가 버린 과거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씻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구별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옛사람은 더 이상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창피함은 가버렸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2. 옛 죄인은 죽었고 새로운 성도가 태어났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이 성경구절을 읽었습니다. 그 때 암스텔담의 한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집회 중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들더니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계속 가르치려고 하는데 그는 웃다가 울다가하면서 설교를 방해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형제님 무슨 일입니까?

“지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서 주정뱅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다른 삶입니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인식했을 때 새롭게 창조된 자아를 찾았고 기뻐했습니다. 옛사람의 본질은 죽었고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회심하기 전에 술 취한 자였습니까? 술 취한 자는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도적한 사람, 남색, 탐색한자 는 다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사람들 보다 더 타락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없고 간음하는 자가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슨 말하는지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아직도 그렇게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제가 알콜 중독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알콜 중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중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본질이 중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마치 자기가 아닌 다른 인생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본성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탄생이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왜 우리가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육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을 가정하려고 할까요?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이름은 스티브고 알콜 중독자입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술을 마신 뒤에 4 3개월이 지났습니다.” 이런 식으로 치료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알콜 중독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간음을 하였다면 간음이 그 사람을 간음쟁이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행동을 바라보고 그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는 행동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복음의 소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씻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구별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의롭다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의 죄는 십자가에서 도말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1)새로운 사람은 아담의 가계가 가진 특성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 본성이 태어났습니다. 이 새로운 삶은 아담 안에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구분됩니다. 우리는 아담과의 관계를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타락한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죽어버렸습니다. 나는 사람의 전적인 타락에 대하여 믿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태어나면 전적으로 타락된 상태라고 믿습니다. 무엇이 방금 태어난 아기를 타락한 아기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옛사람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본성에 대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예수님은 그 본성을 십자가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본성은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전적인 타락이나 전적인 의를 믿어야 합니다. 전적인 타락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전적인 의를 믿습니다. 완전히 타락한 사람도 선한 일을 합니다. 선한 일을 했다고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아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구원 이후에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고 해서 완전히 의가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자로서 더 이상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전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적으로 의로울 수밖에 없는 본성입니다.

저는 개혁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전적인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와서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좋은 교리를 갖고 있으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그래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타락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새로운 본성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옛 본성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죽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살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소유했는데 그가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교적인 율법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우리 삶을 통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스타일이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은혜에 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의 특성들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새로운 창조는 예수로 인한 완전한 의입니다.

① 완전히 의로운 본성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편11:4)

시편11편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왜 여호와의 전이 거룩하다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애굽기3:5)

왜 모세가 섰던 땅이 거룩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거룩합니다. 고전3:16,7에서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데 여러분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살고 계셨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었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침실이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오직 한사람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깨끗케 하기 위한 여러 절차를 걸쳐서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치장하고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이에 누가 그를 만지면 그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가려면 완전히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입는 예복이 있습니다. 밑에 보면 줄이 달려 있고 거기에는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거기 안에서 지성소에서 섬김을 할 때 밖에서는 방울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방울 소리가 나는 동안 모든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안 들리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완전히 거룩하게 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누가 살아날 수 있습니까? 거룩하지 못한 제사장은 죽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할까? 네가 들어가 봐! 아니야! 네가 들어가.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의 발목에 밧줄을 메어서 들어가게 합니다. 죽는다면 밧줄로 끌어냅니다. 하나님 임재 안으로 얼마나 거룩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지성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웃이 없는 곳에서 계시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분은 더 이상 성막에 있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분은 어디에 살고 계십니까?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거룩하게 만들었는가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와 사시는데도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본성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주 의로운 것입니다.

② 은혜 안에서 사는 자유  
이제 예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 안에서 살 권리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5:1)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까? 우리가 자유케 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자유입니다. 법을 인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삽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의무가 아니고 자의적으로 원하여서 가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삽니다. 여러분은 의로우십니까? 그리스도인이 몇 가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전에 갖고 있던 본성을 어떻게 되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매일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왜 우리가 죄를 짓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의 죄성이 죽었다고 느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그 죄성이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이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본성이 습관적인 죄악의 삶을 더 이상 살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과 영의 갈등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죄를 짓든지 짓지 않든지 선택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새로워진 당신은 죄에 대해 저항하려는 욕구를 자기고 있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5과에 보면 율법에서의 자유를 다룹니다. 어떻게 유혹을 이기며, 우리는 한 가지 보석을 가지고 있는데 왜 죄를 짓는가에 대하여 다룹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개념에 배웁니다. 은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은혜아래 있는 우리가 성경 공부 등의 사역에 대하여 어떻게 조명해야 합니까?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질문1 : 찰스 스탠리의 성령 충만한 삶과 목사님의 은혜의 강의에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답변 :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성령 충만한 삶과 저의 가르침은 거의 비슷합니다. 저는 이 신분에 대하여 강조합니다. 스탠리 목사님은 삶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질문2 :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묘사{우리는 의로운 백성입니다}를 설명할 때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더 이상 한국인이 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한국에서 태어나도 한국인의 정서와 한국인의 문화 등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이런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되는 것에 대하여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 연합함으로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기도하고 증거하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무엇이 동기가 되는가 입니다. 내가 율법주의에 있을 때에는 나는 이것을 해야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성경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행하게 하십니다.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신다고 말하는 구나! 율법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은혜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연합하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에게 반응했기에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하십니다.

질문3 : 의에 대한 개혁교회 전통적인 개념인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의에 대하여 비교하여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 율법의 관점에서 의를 보는 것에 대해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접근방법입니다. 옛 언약의 접근 방법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나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에 의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 율법적인 행위에 의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너희가 이렇게 행동해야 의롭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혜는 이미 너는 의롭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작년 비행기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내 옆에 23정도의 흑인 여자와 오른쪽에는 유태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흑인 여자가 나는 침례교인데요. 당신은요? 나는 유태인입니다. 그럼 우리는 비슷하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태인 랍비가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면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유태인으로 믿는 의는 모세 오경에 나타난 모든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독교 교단에 속해있지요.

기독교인이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분만 믿으면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면 예수님의 생명에서 본성을 찾기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데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잖습니까? 저는 침례교 여자를 보고 유태인 랍비를 보았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구원받지 못한 유태인이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구나!

질문4 : 은혜 안에서 예수님이 내 안에서 온전히 역사하시는 것은 내가 최선을 다 한 후 자신의 깨어짐을 통하여 찾아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금이라도 찾아오는 것입니까?

답변 : 여러분이 최선을 다했다가 절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대부분은 최선을 다하고 망해보지 않고서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서는 알콜 중독에 걸리고 나서야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망가졌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망가져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안해도 됩니다. 그런데 도움은 됩니다. 지금도 받을 수 있습니다. 깨어짐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5: 내 의지로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목사님의 경험을 따라서 이야기 해 주십시오?

답변: 예수님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따라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인도해주실 것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가 무엇이든지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실 지 다른 것을 주실지 모르지만.

십대의 아이들이 와서 “나가서 밥을 먹을 거니까 20불을 주세요!” 하면, ‘너희들은 나가서 밥 먹을 수 없어’라고 말 할 수도 있고, ‘나가서 먹고 와라’하고 말할 수도 있고. 20불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10불만 주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혼동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십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유혹에 따라 살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깨어짐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증명하길 원하십니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성이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본성임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옛 본성을 십자가에서 못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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