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2009

성령과 생명신학 -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성령 파송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은 말하자면 구원의 역사적인 외면(外面)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 속한 내면(內面)도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장은 예수의 "고별 설교"에 속합니다. 이 설교에서 그가 "떠난다는 것"은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그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구원은 "보혜사"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 16:7). 여기서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새로운 시작은 구원의 비밀과 직접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준 힘으로써 생명의 영을 보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고통 안에서 드러났음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이러한 고통 때문에 죄인과 죽어가는 자들은 새로운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1986년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敎書) "Dominum et Vivificantem"은 성 금요일과 성령 강림의 이 긴밀한 상관성을 아주 잘 설명하였습니다. 참된 십자가의 신학은 성령 강림의 신학이고, 그리스도교의 성령 강림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이 관계는 좀 더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일체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 16절에 의하면 예수는 "아버지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제자들을 떠납니다. 요한복음 14 26절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이 보혜사를 아버지로부터 보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입니다. 이 생각의 의하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성령의 파송을 간청하고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보내기 위해 "떠납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죽습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들에 의해 보냄을 받습니다. 영을 받는 자인 그리스도와 영을 보내는 자인 그리스도 사이에는 성령의 영원한 기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서방 교회의 니케아 신조가 말하듯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나오고, 아들 위에 머물며, 아들로부터 세상 안으로 빛을 발합니다. "영들을 구분하는" 기준에 대한 질문이 종종 제기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의하면 이 기준은 예수의 이름과 십자가의 표지(標識)에서 드러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십자가의 표지를 보이자, 악령들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의 선한 영이 왔습니다. 그래서 무속 신앙(Exorcism)에서 부정적(否定的)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 성령의 인식을 위해서는 긍정적으로 여겨집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 앞에서 견고히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폭력과 소유와 교만의 영은 견고히 설 수 없습니다. 사랑과 나눔과 겸손의 영은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영들을 구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언제나 십자가의 표지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길도 함께 간구 됩니다. 예수의 제자 직(弟子職)에 기여하고 이 일에 쓸모가 있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하며,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똑같은 것의 두 측면(側面)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이 예수의 제자직(弟子職)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사도 바울은 "성령 안의 생활"이라고 칭합니다. 실로 개인적-공적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예수를 뒤따르는 생활은 "영들을 구분하는" 실천적인 기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