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인 겸손을 대변해 주는 몇몇 성경구절에 초점을 맞추기 원한다. 첫 번째로, 창세기 1장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께서 방금 창조하신 인간과의 상호작용은 바로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바락(barak)은 누군가의 앞에서 그를 축복하거나 혹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무릎을 꿇는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창조주께서는 아담과 이브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즐거움과 충만함을 위해서 그들에게 필요할 모든 것으로 섬기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출산의 기쁨을, 통치권의 목적을, 공급하심의 즐거움을 나타내시며 또한 그것을 통해 그들에게 놀라운 권위와 중요성을 풀어주신다.
더 나아가 창세기 2장19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지를 보기 위해서 "들의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모든 새들을 데려오셨는데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명확한 겸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질서의 지도권 안에서 사람들과 나누시려는 목적으로 그들에게 그와 같은 종류의 권위와 권세를 주신다.
창조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창조물들과 동역의 관계 안에서 창조물들을 위엄 있게 하시고, 창조물들을 창조주의 차원으로 들어 올리시려고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의 실체는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한가지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위의 영역에 있어서는 결코 위협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 안에서 자신의 백성들이 서로 짐을 나누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강화시키고, 해방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권세를 사용하신다.
아마도 창세기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겸손하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예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그들이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있을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선택을 부여하신 사건일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된 인간들이 자신과 관계를 누릴 것인지,아니면 자신들의 의사와 일정의 추구를 위해 하나님을 거절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자유 안에서 한 각본을 제정하셨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것이다 -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들에 의해서 선택 받아야 하는 입지에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공식적인 입장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의 입장인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모함과 갈망으로 가득 차 자신에게 근접하지도 못할 다른 세상 신들로 인해서 거절 받는 것에 자신을 열어두셨다. 이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종류의 취약성에 스스로를 항복시키시고,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기까지 피조물들에 의해서 선택 받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의 기이함에 대하여 내가 더욱 숙고할수록 나의 마음은 그 생각으로 인해 더욱 요동한다.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겸손을 지니고 계시다!
다윗 왕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 예수의 성품에 대한 예언적인 그림을 그리시는데, 그것은 위대한 겸손으로 특정지어졌다. 다윗은 지속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 안에 그의 확신을 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통하여, 약속들을 조정하거나 그것들의 완성을 꽉 쥐고 주관하려는 시도 없이도 하나님의 때에 그 약속들을 이루실 것을 신뢰한다. 다윗은 섬김과 순종에 초점을 맞추며 그의 위치나 안전을 하나님의 손 안에 맡긴 채 그의 삶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 안에 서 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아갈 때 사람들의 빈정거림에 개의치 않았으며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쪽을 택한다.
또한 왕들을 세우시기도 하고 뽑아내시기도 하는 진정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 아버지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며 인간의 권세에도 복종하셨듯이 다윗은 의롭지 못한 왕에게도 복종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운명의 역속들을 믿으며 하나님의 친절하심에 대한 꾸준한 확신 안에 자신의 삶을 두었다. 그는 단순히 주님을 기다렸고 바로 그 기다림에 의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예언적인 그림이 되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한 계시 안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예언적인 그림은 이사야 42장에서 찾을 수 있다. 충실한 종에 대한 위대한 이사야서의 노래들 가운데 하나인 1절-4절까지의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시한다. 예수님은 종의 정체성을 가졌고 하나님의 강한 팔에 붙잡혔다. 이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우리로 종의 성품을 삶의 방식으로 포옹하도록 야기해야 한다! 그 종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들려지고 지지 받았다! 나는 바로 그런 위치 속에서 살기 원한다.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영이 그 종의 위에 머문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공의를 제정하시고 만물을 땅 끝까지 정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을 결코 불쾌하거나 자기중심적이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널리 알려지는 것에 배고파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최우선은 곧 깨지고 연약한 자들을 부드럽게 고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호하고 의연하시며 공의에 대한 그분의 추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겸손의 하나님이시다. 해안선에 접한 모든 땅들이 기대감으로 열망하며 하나님의 법이 세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실제로 피조물들은 종의 지도력에 대한 갈망을 충분하게 느끼고 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쁨에 대하여 말하는 다음의 구절들을 묵상해 보자. 첫째로, 시편 기자의 선포가 있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아시나이다"(시138:6). 주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자들을 생각하신다. 이것은 자신을 교만한 자들로부터 지키는 거리감과는 상대적인 것으로서 낮은 자들을 위해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이사야로부터 또 다른 통찰력을 얻게 된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57:15)
이사야 선지자는 거룩하신 분께서 죄를 깊이 회개하고 겸솜하게 나아오는 인간의 영을,하늘에서와 같이 높고 거룩한 처소로서 생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높고 고귀하신 분께서 뉘우침과 겸손의 마음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겸손하심에 대한 또 다른 모습이 스가랴에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라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으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마태복음 21장4-5절에서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취된 예언의 약속은 공의와 구원의 왕께서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의 성품을 지니셨다고 직접적으로 선포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분의 성품 자체인 겸손의 왕이시다. 그것은 투표자들에게 감동을 주려는 목적의 미디어의 체면, 꾸밈이나 허위가 아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진실로 겸손하시다! 그것이 왕의 본성이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과 같은 동일한 마음과 정신의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즐거워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을 발견하실 때 그들의 겸손의 순수함을 시험해 보시며, 그런 후에 예수님의 규율 안에서 짐을 나누기 위하여 자신의 임재에게로 그들을 높이신다.
<컴 투 파파/게리 윈스/순전한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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