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율법(律法)은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더럽고 악하고 거짓된 죄인인가를 비춰보게 하는 것입니다. 공의(公義)와 심판(審判)의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법에 자신을 비춰 보면, 그 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므로 “죄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막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요, 죄인에게 죄의 심판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의문(儀文) 은 죽이는 것이요”(고린도후서 3:6) 라는 말씀에서 의문(儀文)이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고린도후서 3:7)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누가 “죄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누가 “율법을 지켰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예수께서는 그들도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시며, “외식(外飾)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3,5)고 하신 것도 자기 눈에는 대들보만한 죄가 있으면서도 그 죄는 감추어 놓고,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하며 또 자기가 그 심판을 집행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거짓되고 교만한 종교가들의 사악함을 예수께서는 한마디로 지적하셨으며 이는 그들 또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본래 의도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돌로 쳐 죽임으로써 만족감도 얻고, 또 결과적으로 사형을 사주(使嗾)했다는 구실로 예수님까지도 올무에 빠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될 죄인들임은 전혀 생각도 않고,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를 재판정에 세우겠다는 꾀를 낸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된 종교가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종교가가 타락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악해진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속의 죄를 보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두 번째 쓰신 글은 무엇일까도 우리는 궁금합니다. 물론 그것도 알 수 없지만, 한번 상상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첫 번째 쓰신 글이 “간음하지 말지니라”였다면, 두 번째 쓰신 글은 아마 앞에서 살펴본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쓰신 말씀을 내려다보았을 것입니다.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의 마음에 죄를 깨달을 수 있는 빛으로 비추어졌습니다. 비로소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명백한 범죄자요, 마음으로 이미 간음한 자임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된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지적하신 까닭입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들은 양심의 가책(苛責)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만 했어도 약간 머뭇거렸을 터인데, ‘너희들도 다 똑같은 죄인이다’는 예수님의 질책이 양심을 때린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다 타락했지만 양심은 선한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양심이 죄를 송사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언 20:27). 하나님께서는 사람 안에 만들어 두신 영(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영혼은 그 사람의 죄를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자기의 마음은 모를지라도 그 양심은 하나님 앞에 받아야 될 심판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자기들의 죄는 덮어 놓고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정죄하여 당장이라도 돌로 쳐 죽일 듯 기세등등하던 그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손에 들었던 그 돌, 예수님이 “쳐 죽이라”고 말씀만 하면 앞 다퉈 그 여자를 치려고 쥐고 있던 돌을 맥없이 떨어뜨렸습니다. 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물러갔습니다. 성경에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어른부터 나가기 시작했을까요?
이 세상 많이 살았다는 경험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과정에 두 가지 경험이 있다면, 하나는 고생하는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죄 짓는 경험일 것입니다. 많이 산 사람, 고생 많이 하고 인생을 많이 산 사람은 죄도 그만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죄에 대한 자책감이 더 있을 것입니다. 죄 경험이 많은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물러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 직접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드러내고, 마지막에 죄인을 심판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간음죄를 지은 여자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물러간 후에야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여자가 그 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죄 없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죄 없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즉 말씀으로 계시던 성자(聖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한 1서 3:5),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베드로전서 2:22), “하나님의 아들 예수 …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4,15). 예수님 스스로도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責)잡겠느냐”(요한복음 8: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의인이며, 예수님만이 죄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 죽인다면, 예수님만이 “내가 너를 칠 수 있다”면서 그 여자를 쳐 죽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고 의인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또한 심판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다 맡기셨으니”(요한복음 5:22)라고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한복음 5:2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義人)으로서 죄인을 심판할 수 있으시고, 또한 예수님만이 죄인을 대신해 죽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의인만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죄인을 용서하고 죄를 사(赦)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는 권세도 있고 죄를 사해 줄 권세도 있으며,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권세도 있는 분입니다. “인자(人子) 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마가복음 2:10). 그런 예수님이 이제 그 범죄자와 일대 일로 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따라 그 여인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는 권세도 있고, 죄를 사하는 권세도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