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담당하시는 하나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그녀를 정죄하려는 사람은 다 물러갔고 유일하게 남은 예수님만이 그녀를 정죄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죄를 묵과하시겠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죄를 묵인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죄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公義)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그대로 묵과해 버리신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를 깨뜨리려고 오신 분이 되고 맙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자를 돌로 치라고 했고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인데, 예수님이 자의로 이 여인을 놓아준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의 죄를 묵인한 것도 아니고, 모세의 율법을 위반한 것도 아닙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 이면에는 중요한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대신해서 정죄를 받겠다. 내가 심판을 받고, 네 죄의 대가(對價)는 내가 담당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죄인의 죄를 책임지실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값을 대신할 수 있는 속죄 제물(贖罪祭物)을 허락하셨고, 예수님께서는 그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한 1서 3:5)고 했습니다. 죄에 대해 치루어야 할 값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는 말씀처럼, 생명의 희생입니다.
의인의 죽음으로써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속죄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어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대속(代贖), 곧 대신 죄값을 치뤄주실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죄인의 정죄와 심판을 대신 받으심으로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만이 심판하는 권세와 대속하는 자격이 있고, 예수님만이 그녀의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 심판받아야 될 죄인으로서 서 있는 범법자이므로,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십계명을 펴놓고 우리를 비추어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라도 제대로 지킨 것이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범죄자로 정죄합니다. 그 여인이 다른 재판장에게 끌려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 끌려온 것은 천만다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정죄하고 심판해서 멸망시키려 함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그럼으로써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 그 목적입니다.
유대 종교가들이 간음 중에 잡힌 그 여자를 현장에서 붙잡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는데,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7).
율법의 정죄에서의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no one)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갈라디아서 3:11)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0).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라디아서 3:24).
몽학선생(蒙學先生)은 어린이에게 가장 낮은 글공부를 깨우쳐 주고, 그 과정을 마치면 윗 단계로 인도해 주는 선생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은 먼저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먼저 심판을 알게 한 후 하나님의 은혜로 이끕니다.
거울의 역할은 얼굴이 더럽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거울 앞에서 더러운 것을 발견하면 가서 물로 씻습니다. 거울은 더러움을 지적하여 물로 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는 것이 본래의 소임입니다. 검사 소견상 병이 밝혀졌다면, 그 검사(檢査)는 결국 그 환자로 하여금 병을 낫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의사에게 나아가게 해 줍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우리는 죄를 깨닫고 죄인으로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나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주님이 받으셨고 그 공로로 내가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된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 앞으로 인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멸망 받을 죄인으로 정죄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분께서 나의 죄값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창세기 25장에는 이삭의 두 아들 가운데 장자인 에서가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팥죽 한 그릇에 장자(長子)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판 사건이 나와 있고, 창세기 27장 에는 야곱이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늙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삭은 평소 자기가 좋아하던 장자 에서에게 장자가 누릴 축복을 하나님께 기원해 주려고, 에서에게 사냥을 하여 자기에게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어머니 리브가는 차남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 원하였으므로, 야곱에게 집에 있는 양을 잡아 요리해 줄 테니 그것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나아가라고 합니다. 야곱은, 형은 털이 많고 자기는 매끈매끈해서 아버지께서 만지시는 날엔 아버지를 속이는 자로 보여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염려했습니다. 이에 어머니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창세기 27:13)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자기가 저주를 대신 받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복을 받게 하겠다는 그 리브가의 마음은 곧 사랑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것은 율법을 범함으로 저주받은, 즉 죄인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한 정죄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대로 죄인의 죄를 예수님께서 지셨고,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아도 될 운명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을 대신하여 정죄를 받음으로써 그 사실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기 위함임을 지금껏 살펴보았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한복음 3:18).왜냐하면 대속의 원리에 따라 예수님이 인간 대신 정죄(심판)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저주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로마서 8:3).
“육신의 모양”이란 죄인의 모양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 있는 인간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 몸에다 인류의 죄를 정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된 전 인류의 죄를 예수님 몸에다 지워서 대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6)라는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이사야 53:5)는 말씀처럼, 우리의 죄악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심판이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값은 그 때 다 지불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몸에다 심판을 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함입니다(고린도후서 5:21). 우리를 죄 없는 사람,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저주를 예수님의 의와 바꾸었습니다. 심판은 예수님이 받음으로 대신 죽으시고, 예수님의 의는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로 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끄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죄인 되었기 때문에, 한 의로운 사람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죄값을 담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독생자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찬송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속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저주와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할 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법을 받았습니다. 흔히 율법이라 칭하는 십계명(十誡命) 외에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하는 민법(民法), 속죄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규정한 제사법(祭祀法) 등이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정죄하는 법이라면, 제사법은 하나님께 죄 용서받는 의식을 정한 법입니다. 그 제사법에 대해서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짐승 중에 첫 새끼를 바쳐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나귀 대신 어린양(羊)으로 대속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출애굽기 13:12,13). 바친다는 것은 잡아 제사 드린다는 것, 즉 죽여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죽어야 할 나귀 대신 아무 잘못 없는 어린양이 끌려가 희생을 당했습니다. 만일 어린양으로 대신 하지 않으려면 그 나귀의 목을 꺾어 죽여야 합니다. 어린양이 대신 희생됨으로써 목이 꺾여 죽임을 당해야 하는 그 나귀는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정한 죄인인 우리 대신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시지 않으셨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을 꺾어 지옥에 던져 버리셨을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에는 ‘대속죄일(大贖罪日)’의 규례가 말씀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온 백성들이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민족적인 대속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제사장 아론이 두 마리의 흠 없는 염소를 끌어다가, 그 한 마리의 머리에 안수(按手)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의와 범죄를 그 염소에게 지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죄, 부모를 거역한 죄, 살인한 죄, 간음한 죄, 도둑질한 죄, 거짓말한 죄 등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轉嫁)시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염소는 끌어다가 광야 무인지경에 내어다 버립니다. 그러면 굶어 죽든지 맹수에게 물려 죽게 될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염소가 죄를 대신 지고 광야로 죽으러 가는 것을 보고 ‘저 죄 없는 염소가 우리 대신 죄를 지고 가는구나’하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 마리 염소는 죄를 지워서 제단에서 죽입니다. 그 염소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인데, 이 의식(儀式)을 매년 한 번씩 거행한 것입니다.
그것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 양의 피로 우리 죄가 씻김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끌려가 죽으실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변명 한 마디 하지 않으셨고, 또 그러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태복음 20:28)이라고 하셨고, “누가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을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에 채찍에 맞고 사형틀인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시어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한복음 1:29).
<출처:생명의말씀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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