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011

헌신의 그릇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헌신의 그릇으로 옮겨 놓습니다이 그릇은 넓은 장독 뚜껑같이 생겼으므로 그 안에 담긴 포도주가 다 보입니다마찬가지로 오해의 그릇과 연단의 그릇을 지나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만민이 다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놓으십니다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죄에는 마음 속으로 짓는 죄와 법적으로 짓는 죄두 가지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법적으로 지은 죄이고 따먹기 전에 먼저 마음 속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라는 생각을 한 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을 때 법적인 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죄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 지옥에 가야 될 우리들이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불로 모든 탐욕우상 숭배를 태워 마음 속의 죄도 용서받아야 합니다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모든 마음 속의 죄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성령의 불로써 태워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권능을 힘입음으로써 우리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사장로권사목사로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세상에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얌전하고 점잖은 척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의 죄를 씻지 못하고 표리가 부동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위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 자신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성도의 봉사를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서 모범을 찾으려고 가까이 와서 바라보거든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성령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진정한 헌신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친절한 마음

작은 친절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작은 친절이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작은 친절이 마음을 행복하게 합니다.따뜻한 글 한줄이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따뜻한 글 한줄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따뜻한 글 한줄이 분노를 그치게도 합니다.영적인 사람도 불친절을 만날때는 마음이 싸늘해지고 얼어붙게합니다.

따뜻한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따뜻한 것은 부드러운 것입니다. 따뜻한 것은 살리는 것입니다. 따뜻한것은 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셨지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그분의 목소리는 들레지도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길이 있다면 우리 서로가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특별히 관용을 베푸십시요. 신령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라도 한순간 실수하고 돌이킬수 없는 잘못을 저지를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참아주고 기다려준다면 다시 일어설것입니다.

친절도 주님의 말씀 속에서 훈련해야 합니다. 친절도 성령의 임재 속에서 훈련해야합니다. 깊이가 있는 사람은 화를 쉽게 내지 않습니다. 깊은 산속에 있는 호수는 물이 깊어서 돌을 던진다고 해도 동그라미가 멀리 퍼져나갑니다. 그것처럼 가장 어려울때 친절한 격려 한마디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감동으로 번져나갑니다.

외롭고 힘든 사람 만나시거든 작은 배려가 담긴 친절한 위로를 해주십시요. 톨스토이는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친절한 마음씨 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선물이다"고 말했습니다.

작은 친절을 실천하는 길 중에 하나가 따스한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심산유곡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이 향기를 진동케 하듯이 친절한 말은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이세상에 상처 한번 안받아 본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세상에서 억울한 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가요.. 지금 손에 잡은것 하나 없어도 한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며 사랑으로 돌본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일것입니다.

따뜻한 말로 한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으면, 한 사람의 억울함을 들어 줄수 있다면 .. 극한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의 눈물을 흘릴수 있다면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일것입니다.....   나드향

1/29/2011

타협의 영을 파쇄하라! (Defeating Compromise)by 밥 존스 & 폴 키스 데이비스

지금 분명한 것은 온 나라와 교회가 아주 극심한 요동함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저의 가장 첫 번째 질문은, 이러한 격변기를 허락하시는 성령님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과 고난의 시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것을 깨달아야 할까요

제가 주님께 여쭈어 보았을 때, 저는 수년 전에 밥 존스의 계시를 함께 정리했던 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역의 대부분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미리 이해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실족할 만한 부분에 관해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브리서 13:7)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행한 것처럼 우리도,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 (conditions of faith)에 합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들을 통하여 믿음의 선조들에게 일으켰던 많은 역사들 또한 그 이상의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의 예증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개척자들이며 선각자들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영적인 혜택들을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우리들보다 앞서 그 길을 평탄하게 닦아왔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부흥의 역사들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의 부르심의 성취를 실패하거나 원래부터 받았던 주님의 위임명령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던 사례들을 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만 합니다.

이러한 실패하거나 온전히 성공하지 못한 부흥들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면, 한가지 주요한 마귀적인 속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타협의 영(Spirit of Compromise)”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단은 믿는 자들에게 “영적인 파산” 즉 “영적인 죽음 (demise)을 가져옵니다.

지금과 같은 격동기에 우리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며,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숨어있는 영적인 덫들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영원히 지속될 성령의 행하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용사들의 무덤 (A Graveyard of Warriors)
밥 존스가 환상 가운데 본 것은, 많은 교회들과 영적인 운동들이 비유적으로 표현되길, 아주 강력한 승리를 거둔 파워풀한 여성 전사들의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은 그가 본 환상에서, 교회들과 영적 운동들이 마치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활동정지의 상태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밥은 하나님의 군대에서 나머지 병사들이 있는 무덤으로 이끌려 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다 성취하지 못하고 아주 일찍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때 밥에게 주어진 임무는 어떻게 그 병사들이 부르심을 다 성취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었습니다.

밥의 환상 가운데, 교회들은 아주 강력한 기름부음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아주 강력한 승리를 취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어떤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강력하고 전투적인 사람들의 종말이 밥이 목격한 것처럼 그런 폭력을 당한 그런 무덤으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이 타협의 영(Spirit of Compromise)를 받아 들임으로써, 성령을 대신하여 세상의 영이 그들 가운데 활동하도록 허락했던 결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사단이 육탄전과 같은 장열한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게 되자, 이렇게 미혹을 통한 덫을 놓음으로써 아주 손쉽게 영적 전투에서 성공해왔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사용했던 전략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그의 접근방법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는 직접적인 공격을 통해서 성공하지 못하게 되자, 타협을 통하여서 걸려 넘어질 수 있는 함정과 덫을 놓음으로써 쉽게 성공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나누는 목적은, 이러한 사단의 전략의 전모를 밝혀서 교회에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게 되고, 이 세대에 임한 영적인 유산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유다서와 요한 계시록에 모두 발람의 영 (spirit of Balaam)으로 나타나는 사단의 전략을 다시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안식하라 (Work In Daylight; Rest At Night)
예언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에는 적적한 시기와 때가 있습니다. 즉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또한 일 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 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도서 3:1-3)

논리적인 시각으로 보더라도, 교회들은 이러한 시기를 인식하여 효율적인 모습을 갖추지 못해왔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세상의 영에 끌려 다니게 되어 우리의 기준을 세상적인 것들에 타협하게 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과 흐름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주 바르고 적절한 방법들로 보이는 것들도 그 종말은 결국 파멸인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9:4)

영적인 시각으로 말씀 드리자면, 밤이 아니라 빛이 있는 낮이 일하기 적절한 시간입니다. 짙은 어두움에 영적인 빛이 비취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통용되는 의미를 말합니다. 즉 낮이 지속되는 동안이 일하기 적절한 시간인 것입니다.

밥이 환상에서 본 것처럼, 교회들은 고귀함을 갖춘 여인들이 해가 비취는 낯 시간동안 아주 용맹스럽게 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랑을 기다리는 것에 지쳐서 점차 힘이 빠지고 인내심이 없어지는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 밤이 되자 그들은 방탕하고 난잡스러움 가운데로 겁없이 마구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주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어리석게도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들은 세상의 영을 상징하는 남자들에게 자신들을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상의 영을 상징하는 남자들은 겉모습으로 보아서는 아주 선하고 자비를 베푸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교회가 생각하지 못한 영적인 암살 (assassination)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습니다. “왜 그들은 그런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거지?” 물론 이것은 영적인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영적 환상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관찰한 후, 밥은 사단의 영적 승리를 나타내는 순례지와도 같은 그 무덤에서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어떤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어떤 남자가 밥에게 다가와서 밥 앞에 맞섰습니다. 그는 마치 영업사원처럼 자신감과 확신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언어에 아주 능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그런 말재주로 인하여 사람들을 쉽게 미혹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단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던 동안에 했던 것과 동일한 수법이었습니다.

그 즉시 밥은 그 남자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의 정체가 “타협 (compromise)”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타협의 영으로 인해, 강력한 여자 전사들(교회들을 상징함)을 죽음으로 내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짜를 얻기 위해서 진짜를 타협하였던 것입니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 7:6-8)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디모데전서 4:1-2)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 전사들이 강력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수 많은 승리들을 얻었을지라도, 그들의 힘은 타협(compromise)에는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타협(compromise) 항상, 가장 강력한 영적 전사들도 모두 파괴시킬 것입니다.  

삼손은 당대에 가장 기름부음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아주 일부분에 해당하는 타협은 그의 모든 기름부음과 그가 성실히 이루었던 수많은 승리들도 모두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삼손의 생애 말기에 그를 회복시키셔서 그의 죽음과 함께 마지막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타협하지 않고 계속 신실함 가운데로 나아갔다면, 그가 이룬 일에 대한 간증들은 더욱 위대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려는 시점에서, 타협 (compromise)를 통해서 감히 하나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려는 음모에 착수한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사단의 그 속임수는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거룩한 목적에 호소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겉으로 보기에만 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사단은 거룩하지 못한 연합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타협을 통하여서 이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

타협의 영의 죽음 (The Death of Compromise) 
밥은 비록 영적 환상 가운데 있었지만, 그 타협으로 인해 초래되는 막대한 피해의 결과를 보게 되니, 거룩한 질투심과 의로운 분노가 그의 심령 안에서 불 일듯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밥은 그 타협의 영이 파쇄되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일에 단 한가지 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협의 영을 대적하시며 사용하셨던 그것 즉, 하나님의 말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적의 폐부를 깊이 찔러서 가르는 강력한 검과도 같습니다. 성령말씀에서 이와 같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 4:12-13)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밥 존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그의 손에서 쥐고, 타협의 영의 깊은 폐부에 깊이 찔러서 꽂았습니다. 이 타협의 영은, 교회들을 상징하는 여전사들을 죽게 만든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권위는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영들을 파쇄할 수 있도록 우리들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주님께서는 지혜와 권위를 풀어놓으셔서 교회의 대적들을 분별하고 파쇄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행하기를” (DO THE WILL OF THE FATHER)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원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승리를 항상 취할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로부터 배우기 (Learning from the Past)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대신에, (교회들과 영적 운동들을 상징하는) 그 여인들은 타협의 영이 자신 스스로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이 결국 불법적인 관계에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는 적절한 시기와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양들을 돌보시면서 사역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몸 된 교회가 사역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지금까지 보내어 왔습니다

밥 존스의 상징들로 가득한 이 영적 환상을 통해서 살펴보면, 여인들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근무지를 이탈해서 이 세상의 영들과 문란한 관계를 가지면서 방황해왔던 결과로 영적 전쟁에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 볼 때는 열매 맺지 못할 것 같은 일들이, 실제적인 영적인 영역에서는 굉장히 큰 보상이 따르는 일들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세상의 영역이 아닌 영적인 영원한 세계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2-23)

주님은 교회에 남편 되시는 분이십니다. 신랑 되시는 주님의 마땅하신 그 위치를 침범하는 그 어떠한 사람과의 관계는 영적인 간음이라 볼 수 있습니다. 타협의 영 (spirit of compromise)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당시에는 올바른 것으로 보이는 어떤 가짜의 관계를 위해서 약속으로 물려받은 영적 유산을 포기하도록 항상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국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로 내몰았던 발람의 교훈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서 타협함으로써, 결국 발락과 모압 사람들과 뒤섞이도록 미혹하고 설득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 둘것이니라. (민수기 31:15-18)

여기에서 우리의 충고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의 언약된 연합이 있기까지는 인내함으로 세상과 구별되며 정결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타협의 영은 우리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루게 하더라도 이러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멀어지게 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길 (way of Balaam)은 사람들이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숨은 동기를 가진 돈의 하수인들의 탐욕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5)

발람의 교훈은 (teaching of Balaam),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역 (mercenary ministry)”을 말하며, 세상과 야합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구별되고 고귀한 성품을 버리라고 교회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2:14)

아주 많은 경우에, 이렇게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열매들이 더 빨리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며,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반대를 거의 겪는 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길은 필경 사망이요 열매 맺지 못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사람들과 결혼하게 하여 영적인 간음을 저지르도록 유도하라고 발락에게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밥 존스의 영적 환상에 난 온 것처럼, 타협의 영의 동기와 같은 것입니다. 사단이 용맹하고 위협적인 여전사들 (교회들을 상징)을 이길 수 없게 되자 사단의 유일한 희망은 그들을 세상의 영으로 오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2:12) 

만약 그 여인들이 자신들이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들이 처음에 받았던 임무들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들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타협의 영에 미혹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은 끊어지게 되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어 제대로 돌봄을 받지도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들이 신랑 되시는 주님께 더 신실하여 영광이신 주님께 넘치는 열매들을 올려 드릴 수 있기는 원하십니다.  

타협은 항상 잘못된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신실함의 결과는 회개와 기도 응답과 승리로 이어지지만, 타협의 결과는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밤의 어두움의 시간이 아주 길고 때로는 외롭게 느껴지지만, 타협(compromise), 우리에게 맡겨졌던 소명의 길을 벗어나게 하며, 불법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결국 사망으로 이르게 합니다.

밥 존스는 이러한 결론을 가지고 그 산을 내려오면서, 타협이 가져올 수 있는 그 강력한 파괴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미래 (A Glorious Future)
여기에 나타난 영적 환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교회를 상징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위조된 위대한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기도 하고 어떤 열매를 맺기도 하였지만, 만약 그들이 타협의 영의 미혹을 극복하였을 때는..그 이전에 받았던 승리보다 훨씬 더 큰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여인들로 묘사된 교회들은 강력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믿음의 전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적은 오직 낮 시간이 아니라 빛이 없는 밤 시간 동안에만 그들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교회들이 자신의 일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사단은 그들을 파괴할 그 어떤 통로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은 밤 새 계속되나, 아침의 빛이 비취면 기쁨이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모든 사단의 견고한 진은, 사람들의 낙심 (discouragement), 우울함 (depression), 자기 연민(self-pity)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생각과 계획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우리의 비전이 제대로 성취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치 우리가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로 인도하여 줄 것 같은 다른 대안적 방법들이 나타나겠지만, 결국 그 방법들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헌신의 결단과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결단을 단, 1 센치도 양보해서는 안되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귀해 보이는 그 어떠한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이 예언적인 환상을 분석해보면, 이 여인들 (교회들)은 자신의 첫사랑과 순결을  잃어 버렸으며,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리더쉽을 따르면서, 그들을 더욱더 생산적이고 열매가 있는 방법으로 인도해 주겠다는 말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투는, 우리들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이 거하는 혼의 영역에서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에서의 가장 강력한 하늘로부터 임한 무기는 바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으로부터 바르게 조명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Rightfully Appropriated by the Spirit of Truth)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10:4-5)

우리들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위대한 약속들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은 믿음과 인내를 통해서 입니다. (이 두가지 중 하나만이 아닌, 믿음과 인내, 이 두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가 바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황폐해진 유산들은, 예전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강력하고 신선한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회복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 하이디 베이커

주님이 보내신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었던 질문은 사실상 "얼마만큼의 깊이를 원하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장 속 어느 깊이까지 파고 들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 속 어느 깊이까지 들어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 임재에 완전히 잠기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잠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익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아가 죽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죽는 그 순간 생명으로 보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썩어져 가는 세상의 향기가 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처음에 그의 발목까지 차는 깊이까지만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경향이 있습니다. '발목 깊이' 정도까지만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오히려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 정도 깊이에서는 여전히 우리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뜻대로 움직이고, 우리가 내키는 대로 말하는 수준, 또는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선까지만 하나님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에스겔에게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는 네가 그보다 더 깊이 나아오길 원한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동일한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자아를 버리길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깊이가 아니라 항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의 흐름에 의해 우리가 떠밀려 가기까지 깊은 곳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깊은 곳으로 들어오도록 때로는 부탁하시고 때로는 설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존자의 영광스런 임재 속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성령님께 굴복당하기 원하십니다.

에스겔은 무릎 깊이의 물까지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이 무릎 깊이까지 들어가게 되면 그 때부터는 물살의 흐름을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 깊이는 너무 안전한 장소입니다. 저는 완전히 잠겨 익사하게 되기까지 나아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여러분이 물(그분) 속에서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정도의 깊이까지 주님안에 잠기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 이라고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주님께 완전히 삼킨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님이 보고 있는 것을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껏해야 무릎 깊이까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더 깊은 물속으로 이끄시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누구도 완전한 부르심 가운데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에야 비로소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활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여러분은 주님께 굴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느 정도 깊이까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헤 속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1/27/2011

선지자의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에는 예배 중에 예언의 영이 임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안식하는 것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간에서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부드러운 마음 가운데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시간에 서두르거나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순간에 우리의 정서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쩔 때는 서둘러서 진행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우리가 안식이 필요한 것이다.

제자들이 가난한 자에게 돈을 주기 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나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영원한 원리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주님이 나타나실지 상관없이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주님 안에서 기다리고 머무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경우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운데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는 우리가 항상 무언가 많이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예배할 때, 주님이 임하시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냥 머물면 된다우리가 꼭, 예언의 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주님의 임재가 머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뭔가 많이 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순간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주님께 사랑의 노래를 불러 드리는 것이다.

찬양 사역자들을 통하여 예언적인 영을 개발하길 원한다

찬양의 순간들이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상급이다. 저는 항상 주님의 임재를 높이 여길 것이다. 그것은 예언의 영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치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물론 다 좋아하지만, 우리가 가장 큰 갈망은 주님께서 임하시면 그냥 거기서 머물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여러분이 이것을 경험하시면 영원히 여러분의 영 가운데 이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여러분의 영에 각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는 주님이시고, 예언이고, 치유인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여러분이 또 아셔야 할 것이 있는데오늘 이곳에 머물렀던 영은 제가 설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을 하고 싶었냐면 마이크를 잡고 말씀을 열고, 그냥 찬양 사역자와 말씀 가지고 순환하기를 원했다. 제가 말씀을 가지고 찬양 사역자에게 읽어 드리고찬양 사역자는 그 말씀을 가지고 찬양을 하는 것이다. 확실하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주님의 임재가 이곳에 있었다. 그럴 때는 우리가 서두르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이다특히 젊은이들에게 말씀드리겠다. 격려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이 이것을 취하십시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나이가 50, 60, 70대에 접어들면 천사와의 놀라운 만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면 예언의 영이 개발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한 가지이지만,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또한 선지자가 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다니엘이 선지자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체적으로 다니엘이 예언한 것 중 하나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24:15)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말씀한 것은 인간 역사의 마지막 어느 시점에서 적그리스도가 우상을 가지고 유대인을 위하여 만든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하나님이니 너희는 나를 하나님으로 섬겨라.” 그리고 그 성전 안에 보좌를 만든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자기를 섬기라고 강요한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를 추적하고,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한다.

이 사람은 법도 없고, 굉장히 폭행적으로 나갈 것이다. 다니엘은 이것을 이미 다 예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여기에 대해 또 예언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니엘이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선지자로써 얘기하신 것이다. 2장에서 말씀하신 또 한 사람의 사람은 노아였다. (24:37) "그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는 경우 노아의 시대에 악함만을 읽을 때가 있다많은 경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시기에 있었던 좋은 점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와 같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노아의 때에는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여러분은 아시는가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120년이 걸렸다. 날마다 사람들이 와서 그를 멸시했다. 왜냐하면 노아의 시대에는 비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다. “노아야, 7일 후에는 비가 내리면서 내가 이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너와 가족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문을 닫아라.” 110년이 지난 뒤에 사람들에게 어리석었던 그 모습이 갑자기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다.

여러분 이걸 하시길 바란다. 노아는 자기 스스로 그 방주를 짓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주신 일에 대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노아의 때를 생각하면 악함만을 생각하지만, 또한 좋은 면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도운동을 일으킬 수가 없다

그러나 기도운동이 이 재림 때, 방주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모습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방주를 짓고 계십니다. 이 방주는 사람을 구원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무엇을 예언했고, 어떻게 개발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높이며 선지자라고 부른다. 저는 여기서 질문을 한다. “다니엘이 무슨 예언을 했을까? 그래서 선지자라는 부름을 받았을까? 어떻게 선지자로써 그것을 개발했을까? 언젠가 나도 선지자가 되고 싶은데...”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예언의 영을 개발하시길 격려한다. 다니엘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의 심판자이다이다. 그래서 이 다니엘 책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심판의 때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리고 심판 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마지막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가 예레미야이다. 그래서 유다의 사람들에게 그 선지자가 말하길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말을 함으로 인하여 예레미야는 우물 웅덩이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을 듣는 것을 왕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원리 하나는 예언의 영을 개발하는 것에는 때로는 사람에게 인기가 없는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사랑으로 부드럽게 말할 필요가 있다.

제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가장 고마워하는 것은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때문에 울면서 얘기했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 것인지를 보여줬다.

하나님이 아파하는 마음이 백성들을 돌이켰어야 하는데,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다. 마치 말다툼하는 것과 같다. 그 말다툼 안에 아픔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기교를 부리기 위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아픔, 슬픔의 눈물이었다. 그래서 이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이다. (23)

예수님께서는 우는 마음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울면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아, 너에게 보내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가 얼마나 어미가 닭을 품듯이 품는데 너희는 오지 않는구나.” 우리는 주님 마음에 아픔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장을 읽을 때, 예수님께서 울면서 부르짖는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예루살렘아, 네가 가고 있는 이 파괴적인 길에서 돌이키라.” 그리고서는 또한 기회를 주신다. “내가 이 포도주를 너희와 함께 마시지 않으리라.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가 다시 오는 자에 대하여 송축하기 전에는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우리는 이 부드러운 마음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예언의 말은 하지만 부드러운 마음이 없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들의 말은 강퍅하고 거칠고 어렵다. 주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찾고 계신다. 부드럽고 울 수 있는 마음, 하나님의 연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이 그 선지자의 말을 들을 때, 마치 연인인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하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다니엘서 1장에는 사람들이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된 상태에서 다니엘은 두 가지 큰 은사를 받는다. 한 가지는 이미 가졌는데 이 기간 동안에 다니엘은 10일 동안 금식하려 한다. 왕이 주는 그 음식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들을 더럽히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왕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에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당시에는 왕의 식탁에서 같이 먹을 때는 그의 신도 믿는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에 믿는다는 표현,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후원한다는 표현이 된다. 다니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그 굶주림을 다른 방법으로 채우고자 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해 다 갈망하는 분들이다. 하나님의 것에 관하여 갈망이 있으신 분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육신이 세상적인 것에 배고파하고 굶주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적인 것들은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다니엘이 여러 가지 방법 중에도 예를 들어, 왕이 준 새 이름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왕이 주는 그 교육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결국 다니엘은 자기의 그 육신적인 정욕 부분에서 싸운다. 식욕을 가지고 싸운다.

미국에서는 이런 표현이 있다. ,녀가 서로 데이트하면서 알아가는 기간에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그의 배를 먼저 채워주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여자가 음식을 잘하면 그 남자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다니엘이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자기의 그 육신적인 식욕으로 인하여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예언사역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금식하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우리의 식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가 거부할 수 있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것을 더 붙잡는 것이다. 사실 이 의미는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재물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돈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돈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게 하기에 규정을 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과 돈에 대해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좋은 열매 맺는데 사용해야 한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10일 동안 금식을 하기로 중요한 결정을 한다. 10일 후에는 다른 남자들보다 강해보였고, 더 근육이 있어 보였다. 이것은 사실 정상이 아니다. 10일 동안 야채만 드셔 보셨는가? 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연약해 보인다.

10일 동안 이들에게 뭔가 초자연적인 것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작은 결정을 주님 앞에 내렸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행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한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다니엘에게 주신 두 번째 은사는 17절과 21절에서 볼 수 있다. (1:17) 하나님께서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지식을 얻게 하셨다. 축복을 부어주셨다. 이러한 금식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 축복해 주셨다. 그들의 삶 가운데 은혜를 더하셨다.

그 은혜가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다. 계시의 영을 주셨다. 그래서 그들이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이 상급을 보아라! 10일 동안 금식했더니,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행하시고 예언의 영이 증가되는 사연들을 보게 된다.

금식과 기도의 삶은 예언의 영을 증가시키게 된다. 정말 그렇다

오늘 날 이 마지막 때에 가르침에는 많은 혼돈이 있는 것 같다. 많은 변론과 혼돈이 있는 것 같다. 저는 이러한 혼돈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슬프다. 머리로만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 때에 대해서 참으로 깨달은 많은 분들은 다니엘, 예수님, 바울, 요한.... 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 금식하는 삶의 모습을 가졌다. 그들은 전부 기도하고 금식하는 삶의 모습을 가졌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마지막 때에 대해서 깨달음을 갖고자 하면서도 전혀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것이 제가 볼 때는 혼돈의 뿔이라고 본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없이 머리로만 아는 지식만을 전하는 자들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혼돈이 있다고 생각한다.

(1:27)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꿈에 대한 깨달음, 이 세상에 있는 탐욕에 대해 거부하는 모습,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는 삶의 모습 그러한 식으로 그때까지 계속 산 것이다. 그러한 스타일로 고레스 왕 원년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고레스 왕은 60년 뒤에 나타난 왕이다. 그러면 여기에 의미는 다니엘은 이러한 삶의 모습을 60여년 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금식하고 기도하는 삶의 그 모습을 은사로 주셨다. 다니엘은 하고 싶을 때, 하고 안하고 싶을 때는 안 했다. 아름답게 마치는 것을 의미한다. 15, 20세 때 하던 것을 70, 80대 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 선지자 사역을 하시는 많은 분은 이것을 승진하는 사다리로 보는 자들이 있다. “내가 이 경지에 이르면 더 이상 주님 앞에 머물 필요도 없다. 내게 이제 기름부으심이 있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명확히 말씀드리겠다. 목사님이나 사역자에게 있는 그 기름부음은 제가 믿기에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백성들에게 축복이 되기 위하여 받은 것이다.

예언 사역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어떠한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언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개발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때가 제대로 배운 것이다. 그것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승진의 사다리는 없다. 그러한 것에 빠지지 말라. 여러분이 그런 것에 빠지면 여러분이 파괴되고 다른 사람도 멸망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다니엘서 2, 3장을 보시면 선지자의 삶의 모습을 개발하는 데는 압박감과 어려운 환경 와중에 그것이 개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모습이다.

여러분, 최근 인생을 돌이켜 보셨는가?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상황을 주신다. 예언하고 실수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속으로 한숨 쉬고 신음할 수도 있다. 이러면서 고통을 통과한다. 실수하는 아픔, 그리고 어려움을 인내한다. 기다린다.

제가 예언사역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어렵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안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또한 필요하다.

다니엘서 2장과 3장에는 압박감과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의 예언의 영이 개발되는가를 배운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영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백성들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내용... 그러나 그것을 여러분이 혼자 받았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을 주셨다. 그것을 가지고 혼자 도망칠 수가 없다. 백성들 사이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자 붙잡아야 한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예언 사역에 큰 힘을 갖게 된다.

다니엘서 2,3장의 목적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관한 계시를 주는 것이다. 예언 사역을 개발하는 아주 중요한 시점이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가장 높으신 주님에 관한 내용이다. 주님께서 무얼 말씀하시는가가 핵심이다.

주님께서 어느 날 새벽에 저를 깨우셨다. 다니엘 7장에서부터 저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다니엘서 7장 앞부분에는 다니엘이 폭풍을 보고 꿈을 꾼다. 그래서 이 꿈에 보면 네 바람을 본다. 그래서 큰 바다에 몰려온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는 큰 짐승 넷이 나온다. 그리고 이 네 짐승은 네 개의 다른 왕궁을 얘기한다. 그리고 다니엘의 이 꿈에서 4개의 왕국이 진행되는 것처럼 역사에도 진행되었다. 다니엘이 본 그대로 진행 됐다.

또 한 가지 더 말할 것은 많은 경우 예언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어떤 진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다. 나중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동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11장과 12장 말씀에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7장 내용에서는 많은 내용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다. 다니엘이 본 것은 부분적으로 이미 이루어졌는데, 앞으로 올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를 깨우시면서 보여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세상은 변화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세상에 있는 것이 지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분야로 바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이상한 동력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경쟁적인 회사들이 같이 동역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사업계에 재정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파워를 갖기 위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수준의 결정이다. 얼마나 많은 파워를 누리는 가로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위력을 갖기 위해서는 돈을 잃는 것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증권, 재정 분야의 굴곡이 굉장히 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알아 맞히지 못할 것이다. 내가 돈더러 명령하여 일어나서 많은 육신을 취하라고 명령했다.”

어느 한 지도자가 어느 한 왕국을 가지고, 다른 지도자에게 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이 왕국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바벨론 왕국이 다 멸망하고, 다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을 얘기한다.

오늘 날 이와 같은 변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느 한 왕국이 다 무너지고 다른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세워지게 된다.

이것을 보라. 시대의 표적과 이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것들을 일으키고 계신다. 어느 왕국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있고, 다른 면에서는 세계적으로 운행하시는 것이 있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세계적인 지도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주님의 아들도 세계적인 지도자이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열방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가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하신다.

다른 동역 나라가 희생되면서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그 부유함은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참 어려운 시기이다. 이러한 변동은 아주 폭력적으로 여러 가지 극등이 있다.

이 마지막 때가 지금 속히 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의 영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통과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공의가 지금 일어나면서 위력을 갖게 된다.

경제적인 공의를 상징할 수도 있고, 정치적인 것을 상징할 수도 있다. 이 공의 육신적인 것을 취할 것이다. 이 의미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그러한 것들을 이 공의가 취한다는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부유함이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불의한 자의 재력을 가지고 경건한 자에게 맡겨주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도 어떤 분들은 그야말로 수억대의 액수를 채워주실 분들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수억 원을 주는 모습을 볼 자도 계신다. 그래서 그 재정을 가지고 이 마지막 때 기도운동을 후원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을 후원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이루기 위해서는 예언의 영이 꼭 필요하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은 자들은 지금 일어나라!

하늘 보좌에 앉은 신앙’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이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5,6)

이 말씀처럼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사람입니다죽은 사람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너희가 내 안에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목박힐 때 함께 못박혔고예수님께서 장사되셨을 때 우리도 장사되었으며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늘 보좌 위에 앉으셨을 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좌에 앉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고 함께 살아나서 지금은 하나님 편에 앉아 계십니다지금 여러분은 합리적으로 천국의 보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여러분과 천국의 사이에는 오직 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이러므로 우리는 죄인도 아니요,이방인도 아니요세상에 소망 없이 버림받은 나그네도 아닙니다우리는 이와 같은 제사장들이요하나님의 자녀들이요영생을 얻은 사람들이요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들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하늘 보좌에 앉은 신앙으로 살아 나가야 됩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와 지위와 청춘은 하루 아침에 쏜살처럼 날아가 버릴 수도 있고 안개처럼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이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쇠하지 않고 추하지 않고 빼앗길 수 없는 영생에 거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일들로 말미암아 요동하지 않습니다신앙으로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사람그 사람은 마치 물 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아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기도를 말한다.

참 기도는 비 인격체의 언어가 아닙니다. 기도는 대화라고 하잖아요? 그럼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해야지요. 기도하게 전에 먼저 말씀을 자세히 들으세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셨는가? 우리를 어디까지 옮기셨는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듣고 파악하세요. 들으면 믿음이 오고 믿으면 기도가 됩니다. 기도다운 기도지요. 그 때부터 나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께 반응을 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고 또 주시니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개인의 구원의 주, 믿음의 주, 생명의 주, 평강의 주가 되시니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여...’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이지만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참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와 합일 시키는 작업부터입니다. 존재에서 그 분의 하시는 일이 나옵니다. 누구신가를 알고 난 다음부터 그분의 역사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그분의 관계를 통해 기도는 성립이 됩니다. 이 기도는 실패가 없습니다. 항상 살아계신 주와 하나님 아버지께 반응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인격인 사물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필요 유무에 따라 오다가다 합니다. 이 기도의 응답은 신앙이 어릴 적 표적이 필요할 때에 잠깐 또는 신앙의 걸음이 뒤쳐질 때에 간혹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의 길에 접어들 때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인격적인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이룩하신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서 주와 더불어 하나님께 나아가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에 더 큰 은사가 하늘로부터 임하십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응답이 나타납니다. 생명, 평강, 능력, 확신, 용기, 힘 등입니다. 그야말로 아우라(aura)가 있는 사람이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기 위해 언제나 한 잔으로 주신 주의 보혈을 기억합니다. 주의 생명, 나의 생명입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 몸이며 한 운명입니다. 주의 십자가로 육신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의 빚진 자가 아니라 영을 좇아 살 수 있는 자유인들입니다. 그의 영안에서 거룩함을 입어 주의 형상의 영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나아갑니다(고후3:17-18) 나의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은총을 또박 또박 읊조리고 주께서 이룩하신 일을 생각하며 추구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이게 바로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는 내일 오라 모레 오라고 하시는 대답은 결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1/26/2011

‘4차원’

사람은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육의 사람은 자연인입니다.이 자연인은 3차원 의 세계속에 삽니다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으로 맛을 보며 손으로 만지는 감각적인 세계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성경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린도전서 2:14)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의 사람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경험에 비추어 생활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각과 경험은 육의 사람이 살아갈 때 필요한 것입니다인간의 이성과 감각과 경험은 육의 사람이 살아갈 때 필요한 것입니다물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인간의 이성과 감각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육신적인 차원의 생활밖에 할 수 없습니다인간적인 힘으로 투쟁하다가 인간의 이성과 감각과 경험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면 두 손을 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이 사람은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4차원의 세계에 속한 사람입니다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여 영의 사람이 됩니다로마서 8 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은 4차원 세계와 대화를 가집니다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의 사람은 4차원의 세계의 메시지를 받습니다이것이 성경입니다영의 사람은 4차원의 능력을 가지고 기적을 창조합니다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차원은 1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도, 3차원은 2차원의 세계를 다스립니다마찬가지로 4차원은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립니다이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4차원에 속하게 된 사람은 인간의 물리적인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절망하지도 않습니다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운명을 능히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3차원의 세계에 속하신 분은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서 물질적인 환경을 능히 지배하는 4차원에 속하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 8:9)

1/25/2011

‘자아가 꺠어지는 과정’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받고 살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들 속에 살아 있는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십니다꽃이 피는 것처럼 만물이 성장하는 것처럼말씀과 성령과 환경을 통하여 서서히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십니다우리의 자아가 죽으면 주님이 사시고 자아가 살면 주님이 떠나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과 우리의 자아는 동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여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실까요?
첫째로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뜨리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마음에 감격이 올 때도 있고 움찔하도록 찔릴때도 있을 것입니다그것은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자아를 깨뜨리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을 때에 우리들의 육신에 속한 자아가 깨어지고 이기주의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자아가 깨뜨려집니다.
갈라디아서 5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육체는 성령의 은혜가 올때에 그것을 못 받도록 방해합니다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육체의 일을 행할 때에 날카롭게 꾸짖어 우리를 괴롭게 하십니다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에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며 성령을 환영하여 모셔 들일 때 성령께서 자아를 깨뜨리는 우리들의 영의 세계를 열어 주시며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세계로 인도해 주십니다.
셋째로주님은 환난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하여 우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집어 넣으시고 육신의 사람 곧 자아가 항복하게 만드십니다그리고 우리가 항복하여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올 때 성령께서우리를 점령하십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합니다다시 자아 중심으로 살았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주께 드린 몸이오니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자아가 깨어지는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들의 일생을 통해 가장 행복한 신앙 생활로 들어가는 축복의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 1,2)

1/24/2011

고난을 당할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인류의 조상 아담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삼중고의 무거운 형벌을 짊어져야 합니다인생에 있어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과 생활의 저주에서 파생되는 고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5:7)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고난이 오히려 축복의 계기가 될 수 도 있습니다.

고난이 축복의 계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먼저 고난의 때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인간은 고난을 당하면 밖으로 향하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이키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일에 동분서주하던 발길을 멈추고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가 고난당할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돌이켜보고 기도하라고 지시하는 때임을 알아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고난당할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이러므로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함으로써 고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대홍수로 심판하시기 전에 미리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심판을 면하게 하셨습니다이 때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창을 천정 가까이에 두게 하셨는데이는 인간이 환난을 당할 때 요동하는 주위 환경이나 인간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우리가 고난의 시기를 지날 때는 괴롭고 힘들지만되돌아보면 그 고난을 통하여 크게 성장 발전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낙담하거나 불평하지 말고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함으로써 고난을 복 받을 기회로 변화시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인내는 연단을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