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은 동의어로 쓰였다. 하나님나라와 교회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에클레시아가 신약에 몇번 쓰여졌는가? 복음서에 한 번 기록되어있다.
교회는 AD30년경 오순절 이후에 생긴 성도들의 모임이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감사하여 자원해서 섬기는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모세 때부터 있었고 구약에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씀이 400번 이상기록되었으며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백성에게(대부분 국가에서 국민의 의무가 있듯이) 납세의무, 병역의무등이 있는 것처럼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말씀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천국은 마치…. 할 때 천국은 구약에서 말하는 천국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현재 교회전체가 천국에 대한 개념을 많이 잊어버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것이 은혜이고 구속사건이지만 실제로 정치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도 정치적이며 실제적인것이 많았으며 주님의 죽으심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정치적사건이었다.
지금 이시대는 정치적,문화적,경제적으로 큰 변화의 소용돌이안에 들어갔다. 튜니지에서 시작한 봉기가 애굽으로,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로 퍼지고 있다. 미국이 애굽을 30년동안 무바라크정권을 지지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세를 바꾸면서 그 땅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며 이런현상이 계시록17장에 나오는 음녀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개념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미가, 말라기등 많은 예언자들이 기록한데로 영원할 것이고 실제적이라는 것을 오늘날 세계교회가 다시 생각해야한다.
세계교회나 신학교가 자신의 교회 바쁜일들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가질 수 없는것이 현실이다. 풀러신학교 조지레드나 맥가브란교수는 전체세계교회가 어떻게 가는지 Kingdom Mentality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든지 싫든지 세계중심의 아브라함 자손을 주시해야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볼 때도 현재 믿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 잘 봐야한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세계의 중심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있게 하셨다. 사복음서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비유로 말씀하셨다. 예수님 당시 1세기때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고 통치권자는 시이저 왕 한 명이었다. 우리 주님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왕국에서 왕이 두 명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로마의 압제하에 있던 제자들에게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선지자들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이 회복될 날이 올 것임을 격려하신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두 가지를 예를 들면
첫번째 , 하나님나라를 마13:34,35절과 막4:33-34절 겨자씨비유로 말씀하셨다. 주님은 늘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Parable(비유)는 항상 그 전에 하신 말씀을 바탕으로 쓰여진다. 단어 하나 하나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보다 전달하려는 내용을 잘 설명해서 이해시키는 목적이 있다.
여기서 겨자씨 한 알은 구약(겔17:23)에서 이미 쓰여진 말씀이므로 구약의 말씀에 익숙한 이스라엘민족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로 쓰여진 신약은 오늘날 교회에서 Allegory로 해석되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가 잘 전해지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Allegory는 헬라적표현이므로 비유와 달리 그 때와 장소등의 상황에 따라 적용되어지므로 오늘날 똑같은 말씀이 다르게 해석되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을 구약에 익숙한 이스라엘사람들은 알아듣게 하고 로마사람들에게 모르게 하신 것이다.
겨자씨에서 씨(Seed)라는 말을 성경에서는 식물을 말할 때보다 대부분 사람(People)을 말할 때 썼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할 때 처럼..
또한 겨자씨비유에서 겨자씨가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가 아닌 것을 알아야하며 더 작은 씨도 많고 자랐을 때 큰 나무가 되어 가지에 각양새들이 와서 깃든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큰 나무도 아니다. 크고 작고의 양적인 문제로 말씀하시는 것 보다 겨자씨의 특성 즉 이스라엘민족의 강한 특성을 비유로 말씀하신것이다.
그러므로 이 톡 쏘며 강한 특성의 이스라엘민족의 가지에 각양의 새라면 세상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하고 쉰다는 뜻으로 제자들은 어렵지않게 이해했던 것이다. 제자들 시대에는 그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실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두번째 비유로 눅15장 8-10절에서 어느 여자가 잃어버린 드라크마비유에서 한 드라크마를 잃었는데 이것을 찾기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 것을 알 수 있는데 놀라운 것은 한 드라크마를 잃었는데 오히려 드라크마를 찾는데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찾은 후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렸으니 한 드라크마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한 비유의 말씀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도 제자들에게는 잃어버린것을 찾는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방교회는 이것을 지나친것이다. 그렇다면 한 드라크마의 가치는 어떻길래 이처럼 온 집을 다 뒤져 찾았을까? 잃어버린 드라크마는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을 찾기 위해 주인은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들여 찾았으며 찾은 후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즐기자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유대인 목사님께 들으니 참으로 하나님이 결코 잊지 않으시는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되었으며 주님이 찾으신 메시아닉 유대인을 바라 볼 때 주님이 기뻐하신 것 같이 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 느껴졌다. 말씀 곳곳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며 교회가 이 일을 기쁘게 감당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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