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님이 교회 일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서너개로 나누인 장로들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이런 저런 소문으로 교회가 술렁댑니다. “XX장로의 견해가 맞다, OO장로의 생각이 옳다, ∆∆장로가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 이제는 교인들끼리도 편이 갈라질 조짐마저 보입니다.
어느날 아침, 새벽기도회를 마친 목사님은 관리집사를 불러 차량을 준비시키고, 장로님들을 전부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직장이고 뭐고 하나님의 일보다 앞선 일이 있는 장로님은 돌아가도 좋다고 말한 뒤, 장로님들 전부를 차에 태우고 무작정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기도원에 도착한 목사님은 관리집사에게 말 했습니다 가서 18.9ℓ짜리 물통 5개만 우리 방안에 들여놓고, 내가 문을 열라고 할 때까지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라 하고 장로님들에게 이렇게 말 했습니다, “이제부터 교회의 현안에 대해 장로님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될 때까지 40일 한도로 금식하며 기도하겠습니다. 만약 40일 금식이 끝날 때까지도 의견이 일치된 안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이 안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보아 완전 폐기 하겠습니다“!그리 아시고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이 선택하시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는 모두가 통성기도한 뒤 투표하고, 의견이 갈리면 다시 묵상기도하고 투표하고,,.. 이렇게 그들 모두가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참 뜻을 일심으로 구함에, 몇 날 못가서 만장 일치된 하나의 안건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이 과정에서 장로님들 모두가 서로를 부여잡고 대성통곡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드라마가 연출되었다고 합니다,물론 그 이후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답니다.
그리스헬라문명이 남긴 인본주의 사상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민주주의입니다. 이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다수결원칙입니다. 이 다수결원칙은 만민 평등사상과 공평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적 타협과 절충의 산물일 뿐, 우연은 백이 모여도 필연 하나를 이루지 못하듯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9)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앞 설순 없습니다,
또한, 다수결원칙의 전제조건인 평등과 공평에 관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성경에서의 평등은 절대적인 평등을 말하지 않으며,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시는 바(롬9;15절이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평등한 게 공평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표결방식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성경적으로 의사결정 방법은 만장일치 아니면 제비뽑기가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투표. 거수. 기립. 발성. 등의 방법을 통해 애용(?)되고 있는 우리의 편의주의적 의사결정방법인 이 다수결방식은, 그 속성상 나타날 수 있는<편가르기>란 부작용을 주의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 이하를 보면 당시 교회 내에도 소위<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고 <그리스도파>(고전1;12)란 파벌이 존재하였고, 바울은 자신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칫 세상에 속한 지혜와 방법으로 교회를 분쟁케 하는 이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고 합니다,
율법이 이념(이론화된 신념체계)화 할 때 신앙은 우상숭배가 된답니다, 교회 내 예배를 비롯한 여러 모양의 모임을 통해 교회에 적응하고 신앙을 키워나가는 연약한 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자칫 다수의 신앙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신앙자세와 대세에 편승하는 안일한 신앙 태도를 심어주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 내 성도간의 교제는 무슨 계모임이나 지역 향우회모임이 되고, 의견을 달리하는 자에 대한 왕따 경향도 만만치 않아, 정작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는 문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화학식C2H4는 에틸렌가스를 말합니다. 마취제의 일종이며 열매의 숙성홀몬으로 알려진 이 가스는 식물의 병해, 상해 시 다량으로 방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묘하게도 건강한 식물도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곁에 두면 이가스로 인해 같이 시들어 지고 맙니다. 믿음역시 마찬가지로 상하고 병든 믿음과 같이하면 시들고 병약해 집니다.
고인 물은 썩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제 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된 만남과 교제 역시 문제입니다,
또한 인간적 타협과 절충의 산물인 적당주의가 교회 내에 미치는 또 하나의 우려는 <용서와 위로의 복음>의 남용입니다, 다정도 병(病)인양, 믿는 자로서 교회 내에서 다수의 안녕(安寧)을 위해 그저 사랑하라! 용서하라! 화목하라! 그저 좋은 게 좋은거야!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미워하여 싫어 버린 것도 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목해야 되는 인간적, 세상적, 나의 의(義)가되며, 전(傳)하여 회개케 하고 치료하기위한 용서와 위로의 복음은 불신앙과 무지의 은신처로 전락되고, 이들의 신앙적 허영심은 연약한 교인을 거울로 사용하고, 신앙적 이기심은 순전한 교인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칼리 지브란>은 진실을 말하는데 겸손한 것은 위선이라고 합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홀로 영광 받으실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에 의지하여 아닌 것은 아니요,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믿음입니다, 이 겸손을 가장한 위선 중 하나로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엄청난 말이자, 가장 오해되는 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개개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의 발휘로서, 하나님의 이 사랑은 우리가 알 듯 그렇게 싸구려도 헤픈 것이 아니요, 오히려 엄격함을 요구하시는 바, 이는 사랑받는 자에게서 거룩함을 구하시기 때문이랍니다,
상전을 잘 못 만나 수치심을 느낀 졸개는 참을 수 있어도, 졸개를 잘 못 두어 모멸과 창피를 당한 상전은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섣부른 판단과 행동도 마찬가지이기, 주 안에서 주를 위해 믿음으로 행하는 우리 믿는 자의 자랑스런 행동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고후10:17)
<출처/카폐-창골산 봉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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