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2011

관상기도와 그 문제점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이 합하여 정화, 주입, 합일의 단계에로 나아가려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도 관상기도가 유행하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면에서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복음주의적 입장에 서 있다고 하는 분들 중 일부가 관상기도를 주장하고 나오기에 순진하게 그저 지도자들을 따르는 성도들 중에는 관상기도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라가기도 하고, 또 어떤 성도들은 이것이 과연 바른 것인가 하는 심각한 질문을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주변에 유행하고 있는 관상기도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천주교에서 말하는 관상기도와 개신교의 관상기도가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이에 대한 천주교 내에서의 비판적 소리를 듣고, 개혁파에서는 이에 대해서 과연 어떤 입장을 천명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보기로 하겠다.

1. 관상기도는 무엇인가?
관상(觀想)이란 ‘함께’라는 뜻의 ‘Con’과 이교의 성소, 그리고 후대의 기독교적 성소를 뜻하는 ‘templum’의 합성어로 이해되는 Contemplation 말로 ‘사물의 내면을 바라 볼 수 있는 장소인 성소에서 사물들의 근원인 하나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희랍 교부들 중 일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직접적 경험을 ‘떼오로기아’(θεολογ?α)라고 했다고 한다.

현대적 관상기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 중의 하나인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은 말로 하는 기도는 깊이 있는 기도가 아니라고 한다. 이들이 존중하는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관상을 “우연적인 실체들 안에서 모든 실체의 근거이며, 참된 실체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관상기도는 언어나 심지어 마음속의 심상들(images)도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기도라는 말을 한다: “관상기도는 주 앞에서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마음으로 주님을 지향하는 기도이다. 곧, 침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품안에서 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2. 천주교의 관상기도와 개신교의 관상기도가 얼마나 다른가?
미국에서 관상기도 운동을 새롭게 시작한 이들은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지도자들인 천주교 인사들이었고(토마스 키팅 원장, 바실 페닝톤과 월리엄 메닝거), 관상기도를 폭 넓게 번지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한 나우윈(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 역시 화란의 천주교 사제이다. 이와 같이 관상기도의 선구자들과 주창자들로 언급되는 이들은 천주교도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언급되는 대표적인 인사들은 놀위치의 쥴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로렌스 수사, 토마스 라이언, 존 메인, 피터 크리프트, 존 마이클 탤벗 등이다.

이들 중 다수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은 특별계시가 지금까지도 계속 주어진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놀위치의 쥴리안(Julian of Norwich)은 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로 자신의 종교체험을 그린 “신적 사랑의 계시들”이라는 책을 썼고, 스스로 병을 ‘체험’하기 원했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30대에는 ‘죽음’의 경지에서 사제가 든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피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며 그후 하나님의 보좌, 복된 동정녀 마리아, 자신의 영혼 속에 앉아계신 예수님 등 16 가지 다양한 ‘계시’(또는 보여줌/showings)를 목격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녀는 성경보다 신비 체험을 더 중시했다.

또한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3, 테레사 산체즈 데 세페다 이 아후마다)는 16세기 스페인의 카르멜수도회 수녀였던 신비주의자로 그녀에 대해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회박사’ 학위가 추서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조부가 유대교에서 천주교로 개종, 다시 유대교인이 됐다는 설이 있고, 테레사는 7세 때 남동생과 함께 ‘순교’를 자원하여 이교도 무어 족에게로 가는 길을 숙부가 막았다고 한다.

20세 때 몰래 가출하여 카르멜회에 입회했다. 중병에 걸렸다가 프란치스코 데 오수나의 “제3의 영적 알파벳”을 읽고 종교적 ‘황홀경’을 체험했다고 하며, 하나님과의 ‘완전 합일’, 풍성한 복된 눈물을 체험했다고도 주장한다. 그녀의 심장을 스랍이 황금 창끝으로 계속 찌르는 vision을 보았다고도 한다.

그녀는 “덕의 길”이라는 저서에서 소위 능동적 거둠을 묘사하고, “영혼의 성”이라는 책에서는 영혼을 여러 방을 가진 아름다운 성으로 묘사하면서 각 방에 따라 리 내어 하는 기도(천주교의 구송 기도), 추리적 묵상 기도, 정감의 기도, 거둠의 기도, 고요의 기도, 일치의 기도가 있다고 한다.

그녀와 관련이 깊은 십자가의 요한(St. John of the Cross=산 환 델라 크루즈. 본명 환 데 예페스 알바레즈)은 16세기 스페인의 카르멜파 수사요 신비주의자로서, 관상시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캄캄한 밤”을 저술했다. 1726년에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성자로 선언되었다. 천주교로 개종한 유대계 가정 출신으로 예수회 학교를 다니다가 수사가 되어 엄격한 금욕을 추구하여 기존 수사회와의 차이점으로 투옥됐다가 탈옥한 경험도 있다고 한다.

십자가의 요한에 의하면 영적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다보면 우리들은 감각의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무미건조함, 논리적 묵상을 할 수 없음, 그리고 내면의 방황을 하는 경험이라고 한다. 이런 밤은 하나님께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이끌기 위한 것이요 성숙시키기 위한 은총이라고 십자가의 요한은 주장한다. “갈멜의 산 길”에서는 산을 오르는 단계로 영혼의 진보의 단계를 비유했다.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관상은 순수한 선물이며 단순히 받는 것이다.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프란시스코 종단의 창시자로 신비주의자요 동물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사도 파울 같은 몸의 흔적이라는 ‘성흔’(스티그마타)을 추구하던 나머지 손바닥에 흔적이 생겼다고 하며, 동물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프로렌스 형제는 17세기 카르멜파 수도회 평신도 수사로 본명 니콜라스 헤르만(프랑스식: 에르망)인데 훗날 ‘부활의 로렌스’로 자칭했다고 한다. 군인이었다가 수사가 되고 훗날엔 신발 수선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 앞 수행”이라는 책으로 유명한데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John Wesley), 그리고 저술가 A. W. 토저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묵상과 고백들은 성경적이기보다는 자아 중심적이며 자기 체험적이다.

그런가 하면 관상기도를 강조하며 보급화는 근자의 천주교 인사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고, 이를 넘어서 범종교적 활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토마스 라이언은 천주교식 사도운동인 바울회(Paulist) 소속 사제로서 에큐메니즘과 초종파 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는 현재 바울회 디렉터이고, 카나다 몬트리얼의 에큐메니즘 단체인 ‘우니타스’(Unitas)의 창설자의 한 명이다.

또한 존 메인(John Main)은 영국의 20세기 관상기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베네딕토회의 수사인데, 그는 말레이지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힌두교 구루 스와미 사티아난다를 만나 힌두교 명상의 만트라(문구반복)를 배워 관상기도에 도입하여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주님 어서 오사 저를 도우소서”라는 말과 같이 “마라나타”라는 말을 반복하여 내적 고요와 침묵에 이르고, 이를 통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70-73년 미국 워싱턴 DC의 안셀무스 수도학교 교장으로 연구하던 중 광야수사 요하네스 카시아누스와 힌두교 명상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70년대 후반엔 로렌스 프리먼 수사와 협력사목을 하다가 카나다에 새 베네딕토 수도원을 설립했다. 런던과 카나다 몬트리얼의 수도원에서 관상영성을 적극 보급하고 훗날 세계기독교명상공동체(WCCM)로 발전시켰다. 이 세미나에 달라이 라마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터 크라프트도 천주교 신자로 현재 보스턴대학교 및 뉴욕시 킹즈 칼리지 교수. 관상기도를 적극 보급하며 에큐메니즘의 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승구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향심기도 전담), 김경순 (아녜스) 수녀,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는 천주교인인 엄무광 등이 관상기도를 널리 보급하고 있다.

오늘날 개신교인들 중에서 관상기도를 널리 보급하는 데 앞장 선 사람들은 퀘이커 전통 속에 있는 리쳐드 포스터(Richard Foster), 리전트 컬리쥐의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존 에커만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신대학교의 권명수 교수, 장신대학교의 유해룡 교수, 오방식 교수, 감신대학교의 이정배 교수, 이후정 교수, 그리고 고려 수도원의 박노열 목사, 다일 공동체의 최일도 목사, 방영식 목사, 이건종 목사, 이동원 목사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교파의 장벽이 없이 하기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천주교 방법이나 개신교 방법이 구별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정배 교수의 종교와 수행 영성 체험 프로그램에서는 논산 상월면에 위치한 씨튼 수도원에 가서 ‘씨튼의 향심기도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 피정의 첫 강의인 향심 기도 강의는 인도의 한 그루(Gru) 이야기로 시작했다고 한다.

3. 관상기도의 문제점
천주교회 운동인 관상기도에 대해서 어떤 천주교인들은 그것을 전통적인 천주교적 기도의 하나로 여기며 보급하지만 일부 천주교인들은 이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먼저 천주교회 일부에서 관상기도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점 제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들은 기본적으로 관상기도는 전통적 천주교의 가르침과 달리 뉴에이지적인 영성과 상당히 비슷하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이런 질문 제기는 특히 뉴에이지 전통 속에 있다가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관상기도에 대한 일부 천주교 지도자들의 주장과 실천에 대해서 반응하는 내용이다. 이 문제를 연구한 마가렛 피스터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지난 10여 년 동안 했던 뉴에이지에 관한 연구에 있어 나는 향심기도가 그리스도교적 관상이 아니라는 것과 이런 유형의 기도가 요한 바오로 2세, 라칭거 추기경,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또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에 의해 권고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스터는 요즈음 제안되는 관상기도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결국 뉴에이지적인 명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향심기도(CP)와 초월 명상(TM)에 몰두했었던 핀바 플래내건(Fr. Finbarr Flanagan) 신부는 향심기도는 “초월 명상에 그리스도교의 옷을 입혀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강조하고 있듯이 “페닝턴 수사는 주저함 없이 초월 명상을 추천한다.” 그래서 전통적 천주교 입장에 충실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관상기도는 천주교 전통과 연관된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기독교적인 것도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자기 최면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관상기도를 다른 종교와 깊이 연관된 것으로 보는 이런 비판이 그렇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은 현대에 와서 관상기도를 국제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토마스 키팅이 세계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을 증진하는 평화 회의의 국제 위원 중 한 사람으로 특히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와 영지주의의 그리스도인 교회는 물론 유대교나 불교, 그리고 모든 다른 종교를 망라해 구별을 두지 않으면서 그동안 그리스도인 전통에서 억제했거나 애매한 채로 방치해두었던 통찰과 수련을 자신이 가르치는 사람들의 삶속에 다시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그의 활동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관상기도는 결국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다. 심지어 의식 너머의 상태에 이르고 거기 머무르는 것을 지향한다. 이와 같은 소위 관상의 상태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무상의 상태와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해서 권명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이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침묵 속에 기도하는 모습이 동양 전통과 비슷하게 보인다고 해도, 내용적으로는 추구하는 목적이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동양 명상전통이 추구하는 긴장해소나 마음의 휴식이 아니다. 관상기도는 예수님께서 오순절이 지나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그분과의 교제와 관계를 위해, 그분에게만 우리의 주의를 쏟는 기도이다.

그러나 권 교수가 의존하고 있는 키팅은 의식너머의 상태에로 인도하는 것을 성령께서 인도하신다고 하는데, 이는 소위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느냐고 하면 종교 화합을 위해 앞서는 키팅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고 가르치는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동양 종교들의 수행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각과 의식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떤 종교적 명제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도 넘어서야 한다고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요즘 점점 드러나고 있는 산업화사회의 진전으로 야기되는 환경적 위기 속에서 지구의 생존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서로 상호 연대하는 일을 실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종교적인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세계에 임재(presence)하여 활동하고 계신다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경험은 글자 그대로 신비적(mystical)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칼 라너는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은 신비가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의미에서 더욱 무게 있게 다가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명수 교수와 같은 분들이 추구하는 의식을 넘어서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진정한 관상가의 모습이 성경적 그리스도인과 과연 일치하는 것인지, 아니지를 깊이 있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분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신이 말하는 영적 진정의 마지막 단계를 ‘하나님과의 영적인 결혼’이라고 부르면서 이 영적인 결혼에서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데, 이 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으로 그 사랑을 어느 정도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그분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종국적 일치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며 위대하신 분께서 이런 호의를 우리에게 베풀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스스로를 아주 많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 테레사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상가들은 하나님의 힘으로만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 많은 고행과 노력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드러낸다.

이 모든 점을 살펴 볼 때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지도하는 기도 운동인 관상기도를 따라 가려고 하는 것은 복음에 충실하려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할 바가 아닐 것이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실천적 제안
이상에서 우리들은 관상기도가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도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나라 안에 이런 관상기도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실천적인 제안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리가 참으로 성경적이고 참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의존하여 성령님의 감화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런 기도만이 참된 기도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우리가 참으로 그런 기도를 하면 십자가에만 의존하지 않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 기도의 습관이 우리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다른 종교 안에도 특별은총적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식으로 논의하는 그런 관상이 우리에게 전혀 접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진정한 기도가 없고,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적인 기도를 잘 모르기에 다른 사상적 배경을 지닌 관상기도가 우리들에게 쉽게 침투해 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에만 근거해서 성령님의 감화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에 힘써야만 관상기도를 비롯한 잘못된 운동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상한 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관상기도의 주장자들이 말하는 성경 구절들(계 1:7; 계 3:20; 시 19:14; 46:10; 116:9; 145:5; 마 5:8 등)이 관상기도 주장자들이 말하는 대로 이용되지 않도록 그 본문들의 진정한 의미를 잘 주해하고 생각하며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만히 있어야만 한다(시 46:10 참조). 그것이 관상기도 주창자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상’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만 한다.

거의 모든 잘못된 운동이 그리하듯이 관상기도도 성경 구절들을 잘못 해석하고 오용하는 방법으로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면 선포하는 책임을 맡은 분들은 성경을 정확히 주해하여 그 의미를 밝히 드러내어 주고, 성도들은 항상 성령님 앞에서 깨어 있는 자세로 설교와 강의를 들어서 가장 성경적인 방식에로 나아가도록 힘써야만 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그런 성경적 기도를 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어떤 것이든지 그 근원적 사상을 파악하는 것에 힘써야 한다. 유행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모든 것을 근원부터 미루어 자세히 살피는 태도가 누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한다면 관상기도를 비롯한 모든 잘못된 유행이 우리에게 유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5. 결론
우리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해야만 하는 것처럼, 관상기도가 토대하고 있는 사상적 기저가 어떠한 것임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으로 말한다고 해도 관상기도는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이 합하여 정화, 주입, 합일의 단계에로 나아가려는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천주교적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관상기도 운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관상기도는 종교개혁과 함께 잠적해 버리게 되었다. 관상기도가 잠적해 버렸던 17-19세기는 영성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기였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종교개혁적 원리와 대립하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최대한으로 (최악의 형태에서는) 보면 그런 사상을 넘어 가서 보편 종교적인 영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그 최소한의 모습에서라도 ‘오직 성경’의 원리(the principle of ‘sola scriptura’)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하려는 개신교인들이 추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기독교개혁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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