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2011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이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가 오직 위급한 상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위험이 닥치거나 질병이 엄습하거나 무엇이 부족해지거나 난관에 봉착하면 그때서야 기도한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여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방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파리함'을 자초한다. 그는 자기 뜻에 합한 대로 기도를 드려 응답받고 그 괴로움으로 저주를 받는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물론 '구한다'라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기도가 갖는 매우 귄한 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또한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의사소통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과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사람을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기도가 가져오는 가장 귄한 결과는, 악에서 건짐을 받거나 몹시도 열망하던 것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의 더 많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다.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한 최선의 참된 기도는 하나님께 목말라 있는 영혼, 오직 하나님만을 갈구하는 영혼을 드러낸다.

믿음을 빼앗는 2가지 바이러스를 퇴치하라!

게네사렛 땅으로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왜 즉시 물에 빠졌는가? 그것은, 그가 파도 때문에 그의 믿음의 능력을 물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의 물을 보았을 때, 그는 가라앉기 시작했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14:30)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의심을  품어서도 안 되고, 마음속에 두려움을 들여서도 안 된다.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 영웅적인 태도라고 착각하지 말라.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수준 높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이러한 착각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우리의 약함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다는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5)라고 가르친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단순한 믿음으로 날마다 매 시간마다 무거운 짐을 주께 맡기면 두려움과 불안,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이것이 의심과 불신앙에서 나오는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것이 모든 이해를 초월하여 마음과 생각을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모두는 "형제들아 너희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3:12) 라는 히브리서의 교훈에 주목하고 따라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적을 경계하듯이 불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가르쳤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다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믿음이 자란다. 무엇보다도, 믿음은 기도를 열심히 할 때에 크게 성장한다,

성령의 7가지 흐름(성령께서 만들어내는 영적인 흐름)

1. 성령의 흐름은 진리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소리내서 읽는 것이 좋다.)

2. 성령의 흐름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성령님도 "사랑의 영"이시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다.(갈 5:22) 그리스도인의 모든 동기는 사랑이여야 한다.

3. 성령의 흐름은 거룩이다.
귀신의 영은 더러운 영이지만,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음란과 모든 더러운 것을 떠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흐름을 타려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4. 성령의 흐름은 온유와 겸손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다. 성령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를 따르려면, 교만과 혈기를 버려야 한다.

5. 성령의 흐름은 지혜와 분별이다.
성령은 "지혜의 신"이시다. 성령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시며,  "지혜와 계시의 영"이시다. 영을 분별해야 한다. 예언, 입신, 간증 등 아무것도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령의 흐름을 제대로 타려면,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가 되면 안 된다.

6. 성령의 흐름은 예의와 질서이다.
귀신의 영은 반말하고, 욕하는 점쟁이와 같다. 그러나 성령님은 사람을 무례하고, 버릇없게 만들지 않으신다. 인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흐름을 바르게 타려면,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7. 성령의 흐름은 성령의 열매이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갈 5:22-23)이다. 성령의 열매는 주님의 성품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흐름을 바르게 타려면, 진심으로 주님을 닮기 원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성령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출처: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내가 여기 있다"

어느 곳에 할아버지와 어린 소년(少年)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나무가 울창한 삼림(森林)을 돌보는 관리인(管理人)이었습니다.

어느 가을 저녁, 소년은 장난감 총을 들고 강아지와 함께 오솔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무작정(無酌定) 숲을 헤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깜깜해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할아버지”하고 소리쳐 불렀습니다. 그랬더니“여기 있다”하시며 할아버지가 소년의 뒤쪽에서 걸어나오셨습니다. 그 순간 소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安堵感)을 느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년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계속 손자(孫子)를 뒤따라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때때로 전에 해보았던 일보다 더 어려운 주님의 사역(使役)을 책임(責任) 맡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앞에서 혹은 뒤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23:4)

복있는 그리스도인

4/28/2011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에서 바랄 것이 과연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세상에 보내신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 어린 시절에 달려 있고, 보상이 노동에 달려 있으며, 운동 선수의 상과 군인의 훈장이 경기와 전투의 결과에 달려 있고, 상인의 소득이 그의 수고에 달려 있듯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행을 결정짓는다. 영원한 소유는 하늘에 있지만 준비는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세사에서 행한 일들을 시판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준비를 잘한 사람은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라는 판결을 듣게 될 것이다.

의로우신 재판장이 내려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으려면,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쳐야 한다(딤후4:7). 구원을 위한 우리의 행위 역시 모두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가 구원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친히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값을 지불하신 곳도 이 세상이다. 이제 우리도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각자 처한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주님으 진리와 은혜를 전파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며 주님의 뜻에 이바지하고, 교회에 속한 성도로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 주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던 영혼의 열망을 저버려 성령을 근심하게 해드렸던 저를 벌하지 마옵소서.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헛된 것을 멀리하게 하소서. 다른 무엇보다도 영생을 생각하고 밤낮으로 하늘의 빛을 구하게 하소서.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야 할 순간에 승리하는 믿음과 소망과 기쁨이 흘러넘쳐야 마땅하지 않을는지요. 의심과 두려움을 안고 이 비참한 세상을 떠나지 않게 도와주소서.
<천국을준비했는가중에서...>

주인님, 나를 바칩니다.

내 영혼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죽으셨는지 깊이 묵상하라.
예수님은 안락한 깃털 침대가 아니라 딱딱한 나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머리를 편하게 해주는 베개는 없고, 오히려 머리를 찌르는 가시 면류관이 있었다. 발에는 샌들이 없고 손에는 장갑이 없고, 그 대신 그분의 살과 뼈를 뚫은 날카로운 쇠못이 박혀 있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쓴 머리부터 발바닥까지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 없으셨으니, 결국 제 9시쁨에 크게 소리 지르고 돌아가셨다.

내 영혼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므로 이 세상에 대한 완전히 죽어라.

오늘 이 세상을 떠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라. 죽음의 시간이 이르기 전에 죽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일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선지자들도 그러했으니 너 역시 머지않아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노라"(요5:24)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네게는 큰 소망과 위로가 있다.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그것을 거룩하게 하신 나의 주인님! 제가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했으니,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계속 섬기게 하소서.

제가 피곤해서 주님을 본받으려는 뜨거운 열정이 식어버리지 않게 하소서. 단호한 의지로 육신의 유혹들에 저항하고, 영적 시험의 때에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악한 때가 닥치면 참고 견딜 수 있게 도우소서. 사람들의 조롱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오는 모든 것을 보지 않게 하시고, 저의 유일한 피난처요 구원이신 주님만을 찾게 하소서. 제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십자가를 군기와 표상으로 삼아 십자가의 보호를 받으며 순종의 삶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히 복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주인님,나를바칩니다중에서/토마스 아 캠피스>

우상숭배의 결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미국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한 교회의 창립 인원 중에 제주도 출신의 외과의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배당을 세우고 헌신적으로 충성하여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병원이 잘 운영되어 많은 돈을 벌었고, 게다가 자녀들도 다 잘 되어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잘 살게 되자, 하나님 대신에 자식과 재물과 기업을 더 섬김으로 그것들이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그 교회 목사님이 그에게 교회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으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에 내가 고독할 때에는 교회에도 나갔고 예수도 믿었지만, 지금 나는 하나도 아쉬운 것이 없이 만족합니다.”라고 하면서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의 두 아들이 스포츠카를 사 달라고 해서 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들이 그 스포츠카를 과속으로 몰면서 귀하다가 그만 큰 아름드리 나무를 들이 받고 말았습니다. 이 사고로 작은 아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큰 아들은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상 숭배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때에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낭패와 좌절과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10:7)고 하셨고, 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은 곧 우상 숭배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대상에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10:14)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4/27/2011

주위 환경을 보면 속는다.

보이는 것에 속지 말고 말씀을 바라보라.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비유를 기억하라. 포도나무 가지가 애를 쓴다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그냥 붙어 있으면 된다. 하나님께 붙어만 있으면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모세는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해보려 했으나 "내게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내가 너에게 도울 자를 보내주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라"라고 하실 때 비로소 승리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어머니 마리아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환경을 믿지 말고 나를 믿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도 자기 자신을 믿는다.

항공기 조종사의 훈련 내용 중에 자신의 눈을 믿지 말고 계시판을 믿으라는 훈련이 있다.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보면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 특히 비행기가 뒤집히면 착시 현항이 일어난다.

그러나 비행기 계기판이 위쪽이 하늘이고 밑이 땅이라고 하면 그것을 믿어야 한다. 계시비행을 해애 하고를 면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을 보면 속는다. 조종사가 계시판을 믿어야 하듯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라. 그리고 흔들리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다. 종은 자기의 뜻이 없고 뜻을 내세울 수도 없다. 자기 뜻이 있다면 주인인 것이다. 우리는 주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고기잡이 전문가였던 베드로가 목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던 것을 기억하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새벽에너지중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제게 가장 귀한 것이 되게 하소서!

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인님이시여! 주님을 믿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자비와 죄 사함의 은총을 허학하시기 위해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주여!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피난처로 삼아 도움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심자가가 제가 집에 있을 때는 빛이 되고, 멀리 나갔을 때는 인도자가 되어 저를 전후좌우에서 지켜주는 산성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가 제게 가장 즐겁고 기쁜것이 되게 하소서. 수고 중에는 안식, 고난 중에는 위로, 질병 중에는 양약(良藥), 고통 주에는 진통제가 되게 하소서.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소란스러움, 육신의 정욕, 온갖 음행, 완고한 고집, 신성모족의 영(靈) 그리고 절망의 심연에서 우리를 건집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짊으로 교만한 욕망이 사그라지게 하소서. 주님의 참으심으로 지극히 커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저는 죄를 범했지만, 주님이 저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저는 사악하게 행하고 매 순간 죄를 범하지만, 완전히 무고하신 주님이 경건하게 못한 자들에게 부당하게 정죄를 당하셨습니다.

저는 종종 십자가 옆을 지나면서도 눈에 눈물방울이 맺히지 않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경건한 여자들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주님을 보고 주께 경배하며 주님의 발을 끌어안을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고독 속에서 저를 지키고, 인파 속에 저를 붙들고, 어두운데서 빛을 비추고, 정오에 기쁨을 주게 하소서. 십자가로 인하여 제가 모든 형벌을 면하고 지옥을 벗어나 하늘나라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하소서.

주인님나를깨뜨려주소서중에서...

말이 남기는 상처

숲에서 한 나무꾼이 나무를 베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졌다.
나무꾼은 큰 나무 아래로 피했다.
비가 그친 뒤 나무꾼은 고마운 마음에 그 나무는 베지않기로  결정했다.
나무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언제든지 제 그늘에서 편히 쉴수 있게 해 드릴게요.”

그러자 나무꾼은 손 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 덕분에 피를 피한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앞으로 다시 올 일은 없을 거야.
네몸에서 나는 냄새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거든.”

나무는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상처를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도끼로 저를 치세요.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으니까요.”나무꾼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나무와 인연을 끊고 싶어서 시키는 대로 하고 떠났다.

몇십 년이 지난 뒤 고양한 냄새가 나던 나무 주변에는 다시 어린 나무가 자라 숲이 무성해 졌다. 그곳에서 나무를 베던 나무꾼은 옛날 그 나무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이가 들어 현명해진 나무꾼은 도끼로 나무에게 상처를 입힌 일을 후회하며 말했다.

“내가 몸통에 낸 상처 때문에 네가 썩어  버렸을까 걱정했다. 지난 세월 나는 얼마나 후회 속에서 살았는지 몰라. 미안하구나.”

그러자 나무는 대답했다.
“당신이 도끼로 나를 내리친 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죠. 하지만 상처가 아문 뒤에는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당신이 냄새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한 말은 잊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평생 잊지 못할 듯 하군요.”

<출처: 월간 좋은 생각>

4/25/2011

구원의 사명...

"금서운동"
2003년 11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反基督敎市民運動聯合)이라는단체(團體)가 생겨났다.

그들은 기독교가 없어 져야 나라가 바로 된다며 어린이들이 성경(聖經)을 읽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000만인 서명운동(署名運動)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성경이 모순(矛盾)과 궤변(詭辯)과 저주(紵紬)와 악담(惡談)으로 뭉쳐진 책이기 때문에 읽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진실(眞實) 그대로를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죄로 타락(墮落)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방법(方法)을 가르쳐주는 행복(幸福) 지침서(指針書)다.

악마(惡魔)는 믿지 않은 사람들이 눈을 흐리게 하여 진리(眞理)의 광채(光彩)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믿지 못하게 한다. 교회(敎會)는 사단의 하수인(下手人)으로 전락해 가는 인생들을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福音)으로 구원(救援)해내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출처:복있는 그리스도인>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려라!

교회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 걸핏하면 때려치운다는 사람들이 있다. 지휘도 못하겠다, 반주도 못하겠다, 교사도 못하겠다고 한다. 대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에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이제껏 의지해온 것은 한마디로 사람에 대한 기대하는 말 아닌가.

우리는 잘못된 기대를 끊어버리고 광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나의 도움이 없다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훈련해야 한다. 이 훈련을 하지 않으면 사람 의지했다가 상처 입고 사람 의지했다가 또 상처 입는 일이 반복된다.

하나님 앞에서, 젊었을 때 하루빨리 이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반복된다.

세상은 다 그렇다. 유독 당신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배신하게 되어 있고 사람은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게 되어 있고, 사람은 항상 잊어버리게 되어 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일도 잊어버리는데 다른 사람 일이야 오죽하겠는가?

지금 당신이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적어도 저 사람만큼은 나를 위해 뛰어주겠지 기대하는가? 저 사람은 나의 든든한 백(back)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그것을 무너뜨려라.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한 기대는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구하기 원하신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버리면 버릴수록 좋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믿음이 깊어진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이 된다"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다 없애고 오직 하나님만 붙드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다시시작하는힘중에서.../전병욱>

하나님이 당신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 그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좋은 지각이 있나니(시111: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1:7)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지식의 근본이요 지혜의 근본이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가?

다른 진리들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중심 진리에 속한다. 하나님이 반복해서 비중 높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당연히 하나님 우선권을 두시고 거듭해서 강조하시는 말씀에 우리의 관심과 우선권을 두고 삶 속에 적용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기업의 사장이라면 어떤 사람을 더 '가까이 하고 중요한 직책을 맡기겠는가? 분명 마음에 맞고 순종을 잘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시다.

살아계신 만유의 하나님과 절친한 관계를 맺고 싶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바로 거룩함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여기에서 언약이란 말은 하나님 말씀의 비밀을 뜻한다. 또한 타락한 이 세상에 대하여 마음 속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비밀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12절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부터 온 약속이므로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대로 살지 않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가장 큰 핍박이 온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에 따르는 보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목적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비전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어떤 사역이나 일이기 이전에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라 믿는다. 우리의 목표이자 비전은 주님이시다! 우리의 사명과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

그분의 성품과 역사와 참 기쁨과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닮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인데도, 솔직히 이것을 자신이 가장 갈망하는 비전으로 영혼에 아로새긴 자가 얼마나 되랴. 성령의 능력보다는 성령의 열매에 더 관심이 많은 자가 그 얼마이랴. 나부터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이 바로 아버지가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려고 한 '신령한 복'이시다. 다시 이 비전을 내 영혼에 새긴다. 주의 양식과 사명을 내 영과 삶의 여정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을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죄의 구조와 싸우되 피 흘리까지 싸워야 한다.

순종이란, 십자가란, 자아가 중심이 된 '정과 욕심을 못박고'(갈5:24) 오직 주님이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이다.

영으로 깊이 기도하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활성화되고 나를 주장하시어 더더욱 순종이 쉬워진다. 주님도 그 성령의 충만함으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의 목표 수준은 주님이시다. 성품만이 아닌 그 일과 능력까지, 주님의 그것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수준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이유다. 이것을 추구하지 않는 꿈이란 '자기 의'에 불과하다. 여기에 우리 삶이 집중되지 않으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것을 행다러다도 불행한 것이다.

오직 주님 안에 거하고 그 본질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넘쳐흘러야 한다. 주께 집중해야만 한다. 이 비전이 내 안 심비에 각인되고 심령에 지문처럼 확연히 찍여햐만 한다. 그 주님을 향해 가신 길을 따라 하루하루 한 걸음 가다보면 장차 아버지가 예베하신 놀라운 역사들을 맛보리라.

<하나님의이끄심중에서.../김우현>

금으로 지은 신앙의 집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예수님께서는 “천하 모든 사람들은 집을 짓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어떤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다른 사람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허무나 무의미의 창수혹은 죽음의 폭풍우가 불어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 할지라도 그 집이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지은 집이면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임할 때 그것들이 다 타버리고 겨우 자기 생명만 구할 수 있으며 아무런 상금도 없다고 본문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러나 금이나 은같은 보석으로 집을 지으면 심판의 날에도 그대로 남게 되어 상금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금이란 왕권과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금으로 우리의 집을 지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바탕 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 뜻입니다.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사랑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 항상 같이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같이 있기 때문입니다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1 365일을 살면서 가정이나 학교나 사업장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할지라도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므로 하나님과 항상 같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랑하게 합니다.
보석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가 가진 보석을 자랑하며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자랑합니다또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모국을 자랑하게 됩니다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자랑하게 됩니다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도록 권면하고 말씀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사랑하면 섬기게 됩니다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내가 가진 물건도 아낌없이 주고 헌신하게 됩니다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실 때 먼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이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마음과 몸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황금의 집을 지으셔서 심판의 날에 잘했다 칭찬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린도전서 3:14)

4/21/2011

화개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온 자여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깨달으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없습니다. 당신의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은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오랜 삶을 마치고 무서운 심판대 위에 섰는데, 자신이 결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성육신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복음서의 이야기가 납득 가지 않는 사람들, 기적과 초자연적인 사건을 이해살 수 없다는 사람들, 구속 사상과 의인이나 성화나 중생이니 하는 용어들이 낯설기만 하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사상들이 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들과 사뭇 다르게 시종 죄의 문제를 끈질기게 붙들고 씨름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인간은 털끝만치의 소망도 없는 존재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입니까?"
"당신은 과연 이러한 기쁨에 대해 압니까?"
"영혼을 붙드시는 성령의 능력을 확신합니까?"
이처럼 간단한 질문을 통해 다신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예"라고 대답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회개중에서.../마틴 로이드존스>

자기 연민을 벗어나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상처 받고 고통을 느끼고 슬퍼하는 것은 정상이며, 심지어 필요하기까지 하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만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사라질 때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슬픔은 사랑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내 남편이 죽은 이후로 내 인생에 빈 공간이 생겼다고 나는 종종 말해왔다. 예수님은 내가 그 빈 공간 위로 다리를 놓고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그러나 분명히 내 인생에는 그 빈 공간이 있다. 최근에 나는 한 그리스도인 여성에게서 편지를 한 통을 받았다.

그녀는 남편이 떠난 자리에 빈 공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모시면 그 빈 공간이 채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40년 전,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즈음에 나는 하늘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 그 후 나는 하늘 아버지의 무릎에 오르지 않고는 단 하루의 삶도 시작할 수 없었다. 그분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나는 30년 동안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그 슬픔 자체를 제거해주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분은 내가 그것을 이길 수 있게 도우셨다.

건강한 슬픔과 건강하지 못한 자기 연민은 다른 것이다. 
만일 나의 친구가 사별의 고통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나는 슬픔을 느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나 자신의 사별에 대해서도 슬픔을 느낀다. 
이럴 때 내가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면서 마치 내 친구의 고통을 보면서 슬퍼하듯이 슬픔을 느낀다면, 그것은 건강한 슬픔이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슬픔은 슬픔의 웅덩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도 나처럼 고통 당하지 않는데, 나만 혼자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라고 한탄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을 극복하는 일곱 가지 방법
첫째, 슬픔과 자기 연민을 구별하는 법을 배워라. 
큰 상처가 생겼을 때 그것을 붕대로 감아서 감추려고 하지 말라. 
약으로써 억지로 병을 이기려다가 오히려 더 큰 해를 부를 수도 있다. 
우리의 감정적 고통도 열병과 같다.
고통을 감추지 말고 그저 당하다보면 때가 되어 그것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감정은 점점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둘째, 몸을 돌보아라. 
슬플 때일수록 건강을 잃지 않도록 충분히 먹고 마시고 쉬어야 한다. 
엘리야가 우울증과 자기 연민에 빠져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다. 
그가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잘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하셨다. 
그는 다시 잠들었으며, 천사가 그를 다시 깨워서 먹고 마시게 했다. 
이렇게 음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는 먼 여행길을 견뎌내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를 수 있었다(왕상 19:8).  

셋째, 친구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리를 사랑하는 친구들, 즉 우리가 전화를 하면 달려와서 우리를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줄 친구들이 
필요하다.
 유머도 치유에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에게 짓궂은 농담도 해줄 사람, 우리가 너무 심각해지지 않도록 웃겨주는 사람,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잊도록 도와줄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냉정하게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자기 연민의 극복에 도움이 된다.

넷째, 하나님께 우리를 도우실 기회를 드려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들에 밑줄을 그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들을 의지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돕겠다는 약속의 말씀들을 담은 보물상자를 만들어놓고 필요에 따라 그 보물을
꺼내어 사용한다.

다섯째, 지혜롭게 스트레스를 푸는 법을 배워라. 
절제의 훈련이 아주 잘된 청교도들조차 “네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했다. 
하루의 스케줄을 짤 때 나는 꼭 30분의 자축 시간을 집어넣으려고 애쓴다.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선반에서 가장 좋은 컵을 꺼내고 뜨거운 차를 끓인다. 
그리고 나의 일과 관련 없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거나 나 자신이 직접 스케치를 해본다. 

여섯째, 자긍심을 키워라. 
집이 엉망이라면 청소를 시작하라. 책상 서랍이든 선반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하나부터 시작하라. 
내 인생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한 가지 문제부터 처리하라. 
작은 발걸음이라 해도 그것이 내 목적지에 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연민을 자긍심으로 바꾸어가라.


일곱째, 지금 이대로 계속 버텨라.
우리는 ‘왜 내가 따돌림을 당하나?’라고 고민하기 쉽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나 이혼녀는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공허감이나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때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꾸짖어서 자기 연민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보좌에서 종교적 영웅심을 쫓아내고,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족과 친구들을 더 이상 지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내’가 핀란드 말로는 ‘시수’(sisu)라고 한다. 
이것의 본래 의미는 ‘다른 대안이 없으므로 지금 이대로 계속 버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현재 괴롭고 슬퍼도 그 괴로움과 슬픔까지도 받아들인다’  의미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인격이란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와 비교해서 우리가 정말 어떤 사람이냐를 말한다.사람은 마음으로는 인색해도 겉으로는 후해 보일 수 있다.

인격과 경건은 다르다.
내가 경건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다.
반면에, 내가 인격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은 한 사람의 품성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게 분명하다.

하나님은 인격에 관심이 꽤 많으시며, 경건한 사람이 좋은 도덕적 인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인격을 갖는 것과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관계가 있다. 사실, 이 둘은 너무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보기에 이런 말은 넌센스이다. “그 사람은 착한 일은 전혀 하지 않지만 마음은 착한 사람이야!” 우리는 기념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박애주의자처럼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 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게 선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아니다.

우리는 또한 선한 인격을 갖고도 때로는 나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한 인격이 완벽한 인격은 아니다. 선한 인격자는 정기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속에는 선한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이따금 운이 좋아서 선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상황에서 선을 행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 12:33-37). 선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덕’(德)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고대 헬라인들은 이 단어를 ‘탁월함’(excellence)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나는 덕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를 우리가 말하는 인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의 주요 덕목

첫 번째 덕목은 분별력(discernment)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있으며,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항상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어느 시대든 간에 최대의 도덕적 논쟁은 도덕적 이론의 차이가 아니라 분별력의 차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분별력이라는 덕목은 바울의 권면의 본질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두 번째 덕목은 용기(courage)이다.
용기란 분위기가 거칠고 상황이 힘들어질 때 잘해낼 수 있는 힘이다.
용기란 유혹이 오고 고통이 찾아올 때 잘해내는 인격을 갖는 것이다.
아기가 우유를 먹으면서 깔깔거리고 좋아할 때는 어머니가 되는 게 쉽다.
그러나 아이가 치료할 수 없는 심한 장애로 고통당할 때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란 당신의 생명, 당신의 안전, 당신의 미래가,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위협당할 때 잘해내는 힘이다.
구약성경은 ‘용기’라는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는 하나의 교향곡이다.

세 번째 덕목은 절제(temperance)이다.
절제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제어하며 조율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삶을 제어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통제권을 맡기며, 그 대신에 진정한 책임을 하나님이 주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절제하는 사람은 환경이나 물질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게 하지 않는다. 성경의 다른 은사들의 경우처럼, 우리가 절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네 번째 덕목은 정의(justice)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공정하기로 결심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을 말하면서 정의를 요구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 외에도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기르기를 원하시는 성품들이 많이 있다.
두 개만 간단하게 집고 넘어가겠다.

정직과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이다.
나는 이것들을 성령의 버터빵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성령의 열매보다 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행복했느냐고 묻는 대신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보석으로 지은 신앙의 집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24:14)

성경에는 “보석으로 우리의 신앙의 집을 지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보석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생활을 즐겁게 합니다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보석이란루비나 에메랄드 같은 보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아홉 가지 은사가 곧 보석입니다.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그리고 아홉 가지 은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지식의 말씀의 은사영분별의 은사방언의 은사방언 통역의 은사예언의 은사믿음의 은사가적의 은사병 고치는 은사이렇게 아홉 가지의 은사입니다이와 같은 은사들이 보석과 같이 성경 안에서 반짝이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집을 지으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성령의 역사에 두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죄를 피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이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우리를 도와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사도행전 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함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그 날 이후로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마치 바람과 같아서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모셔 들이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을 사로 잡아 죄를 이기고의를 이루게 하시며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되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이는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점령하고 계실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아홉가지의 열매와 아홉가지의 은사의 찬란한 보석으로 단장시켜 주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하고 아름답고 찬란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보석으로 신앙의 집을 짓는 사람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가장 큰 축복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고린도전서 3:12,13)
오늘의 Daily Bread(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4/19/2011

기도의 사람 "한사람"을 무너뜨리기 위한 법령 - 데이빗윌커슨

기도하는 자들은 지옥의 입장에서는 골칫거리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기도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짓을 다 벌입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왕의 통치 시에 자신의 기도가 얼마나 효력을 발휘하는지 입증한 바 있습니다. 이제 다리오 왕 재임 하에서 사단은 다니엘의 기도를 막기 위한 거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의 기도가 지옥을 너무나도 흔들었기에 화가 난 마귀는 다니엘을 쓰러뜨리기 위해 바벨론 정부 전체를 동원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나라에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늘 임명됐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정치가들은 다니엘에게서 지혜, 존경심, 왕의 총애를 보았고 이를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니엘을 대적해서 모함을 꾸몄습니다.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다니엘에게는 흠이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정치가들은 단 한가지 죄목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다니엘에게 찾아낼 수 있는 죄목이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단 6:5). 오늘날 우리들에 관해 이런 이야기가 하나님께 들려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정치가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총애를 받는 이유가 이 기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기도를 멈추게 할 계획을 실행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그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도록 다니엘을 바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니엘과 같은 총리 중 한 사람은 중요하면서도 총리로서 관여할만한 일에 다니엘을 끌어들였습니다. 너무 바빠서 다니엘이 기도할 시간이 없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단이 성도들에게 사용하는 주된 장치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음모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사님에게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할 것입니다. 목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서 목사님들이 남는 시간은 아마도 설교 준비하는데 다 써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또한 같은 유혹에 말려듭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시간이 너무 없어요. 일하다 보면 시간이 전혀 안나요."라고 이야기 합니다. 주부들도 그렇습니다. "낮에는 기도할 틈조차 없어요. 애들 옷 입혀서 학교 보내고, 집 청소하고, 식사준비하고 하다 보면 남는 시간이 없어요."
 
소렌 키에르케가드라는 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주함은 마약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분주함은 결국 두 마음을 품게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더 분주함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진리에 대한 사랑은 점점 더 까마득히 사라져 갑니다. 해야 하는 일들에 점점 더 자극을 받고 시간에 대한 요구가 점점 더 증가하면서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은 있지만 그 거울에 뭐가 비치는지 볼만큼도 거울 앞에 서 있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수 없을 만큼 바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린 사람보다 더 심각한 지경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점점 더 자기 상태에 익숙해져 갑니다. 따라서 점점 더 기도도 안하게 되고 하나님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확신은 점점 더 희미해져서 나중에는 완전히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기도 없이는 자신이 하루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동료들이 더 많은 일을 그에게 쏟아 붓듯 할 때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다음 줄거리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은 마침내 30일 동안 기도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 한 사람을 겨냥한 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다니엘은 지옥을 흔드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자굴에 갇혔습니다.
 
다니엘이 도대체 어떤 동기로 그토록 열심히 기도했는지 의아해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형 언도가 바로 코밑에 닥쳐온 상황에서도 다니엘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하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84세의 노인은 그 시대의 교회들도 더 이상 찾지 않는 하나님께 왜 그의 마음을 그다지도 격렬히 쏟아 붓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요?
 
다니엘이 기도에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드렸을 노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의 시대에 현재의 뉴욕과 같은 도시, 크고 웅장하며 부유한 바벨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술취함, 쾌락추구, 탐욕으로 특징지어지는 영적 무감각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다니엘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기도는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은 시작하기는 쉽지만 지속하기는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육과 마귀는 기도를 방해할 음모를 합작해서 꾸미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활용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100:4)



인간의 상상력은 인간을 위대하게도 만들고 처참하게도 만듭니다고상한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은 고상한 인격자가 되고 성공의식으로 꽉 들어찬 사람은 성공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질병과 가난과 공포를 밤낮 상상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병에 걸리고 가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인간의 가장 큰 적은 상상력을 부패하게 하는 요소들입니다인간의 상상력이 부패하여 공산주의가 나오고 극악한 범죄가 나오며 가난과 질병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오늘날 세계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의 상상력을 먼저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속에 모시면 우리의 상상력이 달라집니다부정에서 긍정으로절망에서 소망으로죄악에서 거룩한 삶으로 상상력이 달라져 갑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착하지만 상상력이 너무 부정적으로 왜소합니다언제나 침략당할 것을 생각하고흉년 들 것을 생각하고가난할 것을 생각하며 열등의식에 눌리어 다른 사람을 선도하겠다는 생각을 못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을 복음화하여 한국 사람들과 생각과 상상력을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부요를 생각하고 승리를 생각하며 소망을 생각하는 이러한 민족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상상력은 현재의 환경과 그 위치에서 위대한 내일을 창조할 힘과 재료를 제공하여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제부터는 패배 대신에 승리를 상상하십시오실패 대신에 성공을 상상하십시오우리의 가족이 구원받는 것을 상상하고 우리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지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병든 자는 건강해진 모습을그리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공장이 재건되어 일어서는 모습을 그리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꿈과 목표와 상상력이 없는 사람입니다이런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어서 그들의 장래는 불탄 재처럼 바람에 날려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상상력을 통하여 이미 성공하여 이루어진 모습을 바라보고 그것을 소유할 때 여러분의 능력이 최대한도로 발휘될 수 있으며 마음 속에 그것을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열정적인 소원이 일어나서 마침내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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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변화시키는 축복-
어느 자매님의 남편은 광산에 정신이 팔려서 봄부터 가을까지 산에서 살고 겨울에만 잠시 집에 들어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는 물론 안부전화 한번 없는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혼자 집안을 꾸려나가려니 너무 힘이 들어 자매님은 가는 곳마다 남편 흉을 보고 욕을 했습니다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그래서 그녀는 회개하고 그 뒤로는 누구를 만나든지 남편을 자랑하고 칭찬하였으며 남편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얼마 후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행복한 가정을 꾸릴수 있었습니다축복의 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우리 가족이 오늘도 이웃을 축복하게 하시고 축복의 말로 환경이 변화되게 하옵소서.부정적인 것은 모두 제하여 주시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언어를 주옵소서축복의 언어를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무덤 건너편에 갔다온 사람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86:12)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보면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신 실제 사례가 하나 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시다가 장례의 행렬을 보았습니다그 관 속에는 과부의 독자가 누워 있었습니다어머니의 슬픔을 헤아리신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일어나라!”고 하시자 청년이 살아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 지나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 “나사로야나오라!”고 하셨습니다그러자 나사로가 베로 동여매인 채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요한야고보와 같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산 위에서 갑자기 주님의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눈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두 사람과 더불어 말씀을 나누시는데천여년 전에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엘리야와 느보 산에서 죽었던 모세와 함께 주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얘기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그리고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살아 계신다는 증거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입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던 분은 예수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제자들도 죽은 사람을 살린 일이 있었습니다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도르가라는 여인을 살린 적이 있었고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말씀을 듣고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다가 3층 누에서 떨어져 죽게 되자 바울이 이 청년을 살려낸 적이 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죽음을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후에 바울이 이때의 체험을 “내가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린도후서 12:1-4 참조)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무덤 저 건너편에서도 영원히 존속하는 것입니다성령의 강물이 흘러가는 곳에 재물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재화를 캐지 못한 것은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성령의 강물이 넘쳐 흐르는 곳에 정금과 진주와 호마노가 “나를 캐어 하나님 영광을 위해 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이것이 내 것이로구나.”라고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린도후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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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산출하는 비결-
창세기 15장에 보면아브라함이 제물을 쪼개어 제단위에 올려놓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을 때 연기가 피어오르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짐승사이로 지나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바로 기도 응답의 열쇠가 있습니다쪼갠 짐승은 우리의 회개를 의미합니다우리가 우리의 죄를 쪼개듯이 구체적으로 회개하면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성령의 불이 우리 속을 지나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결케 하셔서 기적을 산출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회개는 기적의 시작인 것입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주옵소서회개하며 기도하여 성령의 불을 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겸손한 사람’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오늘날 20세기의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인류는 각 분야에서 자신이 쌓은 공적과 자랑에 취하여 오만한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까지도 복을 받아 형통하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 교만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겸손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교만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사람이요, 자기 분수를 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게도 아담과 하와는 자기 분수를 넘어 교만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에덴에서 쫓겨나 질병과 저주로 죽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은 피조물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쓰시는 사람은 깨어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능력들을 하나님께서 무참히 깨뜨리실 때 우리는 겸손히 순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철저히 깨어져야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때 우리는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지만, 그들이 교만히 행할 때에는 가차 없이 심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못할 때에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가 높아지고 부유해지고 존귀해지면 마음이 높아져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말씀하며, 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때 우리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정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자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악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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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2011

-믿음의 시련-

-믿음의 시련-

인생을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에는 더 많은 시련과 연단이 따릅니다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시험이 다가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같은 믿음의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깨어진 사람이 되는 복을 받습니다고난을 통해 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맡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할 때 우리는 철저히 깨어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우리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기도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은 믿음으로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고난이 다가올 때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어 복된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아멘.

성령 안에서 기도 4 요소

첫째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엡 2:18)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십자가와 성령 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참 기도입니다(프로스유케) 그리스도 안에 의롭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생각의 성향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받아 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맞지요. 주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가 아니면 죄인 된 인간인 우리,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앞에 엎드려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경배와 찬양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그 은총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자를 용납해 주시고, 나의 기도를 주 안에서 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놀라운 은혜이며 놀라운 특권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삶에서 진실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에,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위해 중보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무엇으로 영광을 돌려야 할지 깨달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한다’(롬 8:26,27,34) 성령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주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뜻에 맞추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입니다. 그 때에 고리던지기를 해서 성공을 할 때의 쾌감처럼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이 옳지 됐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성령께서 믿는 자를 인도하여 초자연적으로 생겨난 경우가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는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계속 집중하도록 한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고의 기도입니다. 놀랍습니다. 성전 같으면 지성소를 향한 열정이며 다윗의 고백대로라면 내가 언제 여호와를 뵈올꼬 하는 신음입니다. 하나님의 놀랍고도 기이한 대속의 은총을 입어 주의 형상을 받아 그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집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축복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의 최상의 영광입니다. 이게 바로 기도중의 기도입니다.

성령을아는지식중에서/제임스 패커

긍정적인 생각과 축복

야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하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108:3)



우리의 생각과 축복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똑같은 환경일지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결과 복이 따르지만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결국 불행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끊임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면 그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가짐은 바로 ‘회개입니다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고 멸망에 처한 인간을 위해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그리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밭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살 때물건값을 지불하면 그 물건이 나의 소유가 됩니다이와 같이 우리의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보혈은 바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보증이 됩니다.

이 보증을 소유할 때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리하여 담대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긍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십자가 대속의 근거 위에 몇 가지 조건을 구비해야 합니다먼저 순종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헌물과 십일조를 성실하게 드리고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웃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를 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또한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긍정적인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1:21-22)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복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젋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2:28)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부귀 영화를 누르면서도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행복은 의로움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의가 없는 곳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던 그들은 마귀가 넣어준 탐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하자 그 즉시 의로움을 잃고 벌거벗은 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의가 사라진 곳에는 결단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그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죄의 짐을 벗을 때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행복은 마음의 평강을 통해 얻어집니다.
황금을 태산처럼 모아 놓은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평강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평강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 제목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의지할 때 평강을 누르게 됩니다.

나아가 마음 속에 참된 기쁨 있을 때 행복을 누르게 됩니다.
세상에서 얻는 기쁨은 풀이 마르고 꽃이 지는 것처럼 쉽게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도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환락과는 달리, 허무를 안겨 주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어주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은 기쁨의 샘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항상 마음에 의로움과 평안과 참된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로마서 14: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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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2011

마음을 새롭게 하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3:6)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고, 영의 죽음은 육체를 죽게 만들었으며, 마음은 형언할 수 없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였던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렘17:9)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생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마음이 심히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패한 마음이 다시 새로워 지려면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즉 우리 마음이 세상을 좇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감정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아무리 냉철하게 이성을 따라 살려고 해도, 희노애락의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기 때문에 이성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늘 우리의 감정을 말씀과 성령의 빛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의지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인간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적 의지를 갖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의지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많은 고난을 겪는 이유는 아직까지 그들의 의지가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종 시험과 환난을 보내어 완악한 의지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전폭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시게 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항상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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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2011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나요?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도울 수 없는 지점부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이러한 믿음을 잘 분석해보면 그 안에 '자기 신뢰'를 감추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자기 신뢰'의 가장 가까운 혈족은 바로 '불신'이다.

홍수가 모든 육지를 덮었을 때에 노아가 항해일지를 작성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이 바다일 때는 어디로 향해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찬가지로 당신이 일단 자아로부터 벗어나면 한계가 없어진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그러니 무제한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무제한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라.

삼손처럼 행동하라.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당나귀 턱뼈만으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쳐 죽였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단순하게 하나님께 맡기는 한, 적들이 많든 적든 무기가 좋든 나쁘든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나약한 믿음이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맨손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한다. 우리 생각으로 방책을 세우려고 한다.

이 둥근 지구를 보라 착실하게 잘 돌고 있다. 예정된 궤도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다. 왜 그런가? 아무것에 '매달려 있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지휘하시기 때문이 아닌가?

지구가 거대한 사슬에 매달려 있다고 가정해보라. 그렇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견고하게 움직일까? 물론 그 사슬의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사슬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을 으지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 경건한 성도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 지옥의 모든 귀신들이 힘을 합하여도 조금도 흔들어놓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맨손이 우리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다.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공급하실 수 있는 능력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그러니 전진하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힘차레 나아가라!

4/14/2011

"세상에 무릎꿇지 말라" - A.W 토저,


“오직 예수님과 비교해 자신의 영성을 살펴야 한다. 자신을 세상과 비교하면 루시퍼처럼 교만해지지만 예수님과 비교하면 모세처럼 온유하고 겸손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군사로 세상을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로 여기며 가증한 세대를 향해 탄식하고 울어야 한다.”


잠든 심령을 깨우는 ‘외치는 선지자’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 1897~1963)는 최근 출간된 ‘세상에 무릎 꿇지 말라’에서 세상의 가치관에 굴복하지 말고 참된 믿음을 회복하라고 통렬하게 촉구한다. 


토저는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 중 한 명으로, 교회의 부패한 현실을 비판하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이 시대의 예언자라는 평을 받았다.


토저는 책에서 신앙의 본질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 한다. 그는 ‘종교적 언어 게임’을 경계하라고 역설한다. 
‘종교적 언어 게임’이란 성경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삶에 적용된다는 생각이다. 토저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에는 강력하고 생명력 있는 언어가 많았지만 현대는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란 문장에서 ‘영접하다’엔 생명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말’이란 것이다. 


결과적으로 죽은 말은 기독교의 핵심을 파괴한다. 그는 “말을 주문처럼 사용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런 미신적인 태도를 버릴 때 비로소 주께서 진리의 갑옷을 입혀주신다”고 말한다. 


“성령께서 말에 의미와 능력을 실어 주실 때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성령의 활동이 없는 말은 아무 효과가 없다. 교리문답과 복음을 줄줄 외워도 거듭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이 말에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은 복음의 껍질이다.” 


반면 그는 ‘정결케하다’ ‘내적조명’ ‘자기부정’ ‘자기희생’ ‘경배’ 등은 현대 그리스도인을 위해 살아 있는 말이라며 깊이 묵상할 것을 제안했다. 토저는 세상을 멀리한다고 해서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세상문화 속에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영성의 샘은 밖으로 흐르기 때문에 오염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것이 영성의 샘을 오염시키려 한다 할지라도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영성이 그것을 깨끗하게 만든다.” 


인간에게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믿고 거짓 평안을 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안을 느끼고 열심히 기도해서 참된 평안을 얻는 것이다. 현대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이 영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으며 거짓 평안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토저는 성경 말씀에 의해 깨어지고 위로받을 때 진정한 평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에게 주시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으신 것은 주시지 않는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는지 알기 위해 성경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절제와 자기부정과 희생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육적인 그리스도를 아기에 비유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아기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해 이유 없이 풀이 죽어 있기도 하고, 이유 없이 즐거워하기도 한다. 또 이 교회 저 교회를 쫓아다니기 바빠서 조용한 곳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삶에 진지한 목적이 없다. 또 그들은 모든 것을 놀이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경회를 종교적 놀이터로 만들어 광고하고, 성경공부에 사람을 모으기 위해 재미라는 포장지를 사용한다. 직업을 잃게 될 때 자신의 무능이나 부적격을 탓하지 않고 상사에게 책임을 돌린다. 


또 부드럽고 위로가 되는 성경구절에는 주목하지만 마음을 찌르고 의기소침하게 하고 징계하고 책망하는 구절들을 건너뛴다.


이와같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기와 같은 특징이 있다. 그러나 아기는 나이를 먹으면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지만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아울러 토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삶을 맡기라고 한다. 골리앗에 비해 힘과 체구에서 열세인 다윗을 싸움에서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승리에 대해 어디서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토저는 “다윗이 자신이 승리를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두셨다는 것을 잘 알았듯이 우리도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무익한 종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깨우쳐준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의 저수지를 주지 않으신다. 그렇게 될 때 그곳에 물이 고여 썩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지혜의 말씀 능력을 주시지 않고 그들 안에서 능력이 되시며 그들 안에서 지혜의 말씀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일하신다. 그들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곡식속의 가라지- 릭조이너

근래에 교회에 예언사역이 유례없이 세워지고 있는 것과 동시에 많은 거짓 예언자들도 떠돌고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 좋은 씨를 뿌리실 때마다 원수가 그 밭에 가라지를 뿌리려고 할 것이라고 주님 자신이 경고하셨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11)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지를 두신 뜻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주님께서 그의 밭에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도록 두신 목적 중의 하나는 가라지에 대처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 때의 대결에 대비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신다. 그 분은 처음 유다를 택했을 때부터 그가 배반자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또한 유다가 도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돈주머니를 맡기셨다. 분명히 거기에는 돈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가장 돈을 훔칠 법한 이에게 일부러 돈을 맡기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바로 가까운 주위에 마귀와 대적하도록 만드는 사람들과 상황들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다. 이를 통한 훈련이야말로 지속적인 일치나 물질을 안전히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제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주님의 주 전략 중 하나는 그들의 진영밖에서 뿐 아니라 안에서 원수를 대적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추수 때 즉 그것이 성숙해지기까지는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라지는 실제로 곡식과 꼭 같이 생겼다. 하지만 곡식은 우리에게 양분을 주지만 가라지는 몸에 해롭다. 다행히도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계속해서 꼿꼿이 서있다. 성숙해감에 따라 진정한 하나님의 은사는 사람을 갈수록 더 겸손하게 만든다.

거짓 은사는 사람을 더욱더 교만하게 한다. 추수 때가 되기 전까지는, 참되나 성숙하지 못한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익하다. 심지어 가장 위대한 선지자중의 하나인 사무엘 마저도 마음보다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했었다.(삼16)

고난과 시련은 우리가 이 멍에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더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질 때가 많다. 우리는 때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련이 필요하다. 갈등은 우리가 방향을 잃어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목적지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주님께서 논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사역을 정화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논란은 모든 진리와 사역의 회복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오류와 극단주의를 바로 잡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논란은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좇으려는 이들을 가려낸다.

사탄의 사랑함정

사탄의 사랑함정
마귀의 세계 통합 교회가 마침내 그 메시지를 온 지구상에 큰 소리로 퍼뜨릴 때에, 셀 수 없이 많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은 속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세계 교회 통합"은 좋은 일 일거야. 여기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관해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는지 몰라. 이렇게 예수님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지닌 이들이 틀림없어."

이보다 더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사탄의 그 마귀적인 연합의 바로 진짜 주문은 "예수, 예수, 예수" 일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벌써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왜 모든 단체들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는 거지? 어쨌든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쟎아. 회교도들도 예수님을 선한 인간이자 위대한 선생으로 생각하고. 시크교도들과 힌두교도들도 예수님을 존경해."

이쯤에서 잠깐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9.11과 같은 국가의 재난으로 인한 국가적인 일치단결에 대해 저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믿음을 가진 미국인들이 일치단결한 국가로서 함께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연합이 우리의 슬픔이 다 가라앉은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종교간 통합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견하고 있는 이것은 예수님의 예언가운데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태복음 7:22).

거의 모든 종교들은 축사(귀신을 내어쫓음)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데 큰 성과를 이루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들 중 많은 수는 축사, 가르침, 선행 등을 다른 예수의 이름으로 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셨듯이, 이런 사람들은 심판 때에 주장할 것입니다

"주여,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당신의 이름으로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태복음 7:23).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을 모르노라. 그리고 너희들도 나를 모르는 것이 분명하도다.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라, 그럼에도 너희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단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전했도다. 너희들은 나의 복음의 능력을 제거하려고 했느니라. 너희들이 말하는 예수는 틀린 예수니라. 이제, 내게서 떠나가라. 너희들은 나의 왕국에서 조금도 분깃이 없노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3). 이 절에서진실함과 깨끗함(simplicity)’의 헬라어 단어는 단일성(singleness), 유일함, 독점적임(exclusiveness)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그리스도는 복잡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는 매우 단순하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는 신성을 가지시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이 단일하고 유일한 진리에서 떠나 부패하게 될까 걱정스럽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린도후서 11:3).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리고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목사들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린도후서11:4).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구나. 너희는 너희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에 관해 듣고 있구나. 그래서 나는 너희가 진정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예수로 인해 타락하게 될까봐 두렵구나."

"너희는 모르고 있지만, 너희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부터 벗어나게 꾀임을 받고 있구나. 너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용납하는지 나는 믿을 수가 없구나. 너희는 너희를 타락시키는 이 거짓 선생들을 잘도 참아주는구나. 너희는 심지어 그들이 말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아닌지를 시험해보지도 않는구나. 바로 지금, 너희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너희는 귀신의 복음 아래 앉아 다른 예수를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그 다른 예수, 귀신의 복음이 어디로 너희를 꾀어 가는 지도 모르고 있구나." 

헌신의 그릇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헌신의 그릇으로 옮겨 놓습니다. 이 그릇은 넓은 장독 뚜껑같이 생겼으므로 그 안에 담긴 포도주가 다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오해의 그릇과 연단의 그릇을 지나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만민이 다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놓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죄에는 마음 속으로 짓는 죄와 법적으로 짓는 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는 법적으로 지은 죄이고 따먹기 전에 먼저 마음 속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라는 생각을 한 것은 마음으로 지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을 때 법적인 죄뿐만 아니라 마음 속의 죄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여 버림을 받아 지옥에 가야 될 우리들이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불로 모든 탐욕, 우상 숭배를 태워 마음 속의 죄도 용서받아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유혹하는 모든 마음 속의 죄,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성령의 불로써 태워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권능을 힘입음으로써 우리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 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사, 장로, 권사, 목사로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며 세상에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얌전하고 점잖은 척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마음 속의 죄를 씻지 못하고 표리가 부동한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위적인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 자신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봉사를 필요로 하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서 모범을 찾으려고 가까이 와서 바라보거든 자신의 의지와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온전히 성령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진정한 헌신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로마서 12:1)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4/13/2011

마지막 전쟁(종교통합 등)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의 가장 중요한 쟁점 - 데이빗 윌커슨

마지막 전쟁(종교통합 등)의 서막이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의 가장 중요한 쟁점 - 데이빗 윌커슨
사탄은 거룩한 자손,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는 남은 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으며 선포하는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핵심 쟁점은 예수님의 신성 입니다. 과연 예수님이 그리스도, 아버지의 독생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 이 세상의 구세주이신가? 아니면, 단지 많은 선을 행하며 다닌 또 다른 선지자인가? 신성을 입으신 영광 중에 하나님과 함께 앉아계신 부활의 구세주가 아닌 평범한 사람인가?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 을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유일하다고 했습니다. 즉 하늘아래 다른 이름으로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신성을 갖추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존재와도 그 영광을 나누지 않으실 것입니다.

바울도 이와 같이 선포했습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에베소서 1:19-22). 

바울은 예수님은 모든 것 위에 유일하신 머리 시라고 덧붙였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1:22, 23).

바울은 또한 모든 피조물이 어느 날 예수님을 유일한 주로 인정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9-11).

모든 피조물의 혀가 무하마드도, 알라도, 힌두교의 만신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전쟁의 핵심 쟁점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단지 이름을 놓고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신성"을 놓고 벌이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세계 교회 통합을 추진하는 타락한 교회들은 세계 단일 교회라고 하는 사탄이 꾸며놓은 품안으로 달음질치고 있습니다. 결국, ‘세계 통합 교회라는 것이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다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카톨릭, 그리스 정교, 회교, 불교, 힌두교, 심지어 개신교까지 말입니다. 사탄은 종교간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타협점을 마련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물론, 이들 집단을 하나로 결속시켜 주는 그 예수라는 이름은 다른 복음의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른 이름은 한때는 복음주의적이었던 종파들로 하여금 이런 미명 하에 다른 종교와 연합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적어도 한 가지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교사였고 선지자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존재하고 있는 좋은 인간적 성품을 다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을 거룩한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께서 이렇게까지 깎아 내려지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더 이상 그리스도로서, 신성을 가지신 주()로서 인정 받지 못할 것입니다. 종교통합을 주창하는 교회들은 예수님의 능력이나 부활과 같은 개념들은 어떤 것이든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탄의 세계 단일 종교로 편입시킬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은 전세계가 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탄도 이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사탄도 인간에 지나지 않는 예수님을 세상이 칭찬하고 존경하는 것은 수용합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이루신 일들을 격찬했습니다만 예수님의 신성은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화려한 표현 중 일부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 목사들에 의해 쓰여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