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2009

이름뿐인 그리스도인 - 1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소돔과 같이 자기 죄를 밝히 드러내고 숨기지 아니하니” 이 말들은 또한 지금 현재의 미국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소돔과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불경건한 행위라도 아무런 수치감도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미국이 바로 나락의 가장자리에 도달했다 생각합니다. 심지어 세상조차 모든 것이 너무 멀리 나가버렸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저는 최근 몇 년 전 MTV에서의 외설적인 행위로 인해 유명해진 록 스타들을 인용한 신문기사를 읽었습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음악가들은 미국에 범람하고 있는 끔찍한 타락에 경악합니다. 그들은 현재의 문란함은 그들이 봐 왔던 것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말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공연자들은 새로운 경지의 추행을 선도하는 데에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역겨워 하며 그들의 머리를 내젓습니다. 그들은 인정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을 제어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나라는 완전히 선을 넘어간 겁니다.주님은 우리의 파렴치함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에 악이 관영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경제적 패해와 불황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생계를 제하는 것 같습니다.

“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을 제거하실 것임이니 곧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빵과 의지하는 모든 물과”(사 3:1) 이것은 분명 경제적 재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제적 어려움이 또한 하나님께서 미국인들의 주의를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모든 사람의 지갑에 영향을 끼치는 것 외에는 그분께서 어떻게 죄에 미친 나라를 제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했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경제에 곤란을 주겠다. 너희는 너희의 몇 년간의 번영이 중단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는 특이한 상황을 묘사합니다.“그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이르기를, 가 우리의 빵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다만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하여 우리의 수치를 없애게 하라, 하리라”(사 4:1)

일곱 처녀들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특별한 합의를 하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에서는 어떠한 사랑이나 구애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약혼, 친밀함, 신실함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그들이 사랑하거나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줄 수 있는 남편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그 남자의 이름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어떠한 지위를 선사해 줄 사랑이 없는 애매한 결혼을 찾았던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자주, 일곱이란 숫자는 영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이 일곱 여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일부를 가진 듯한 어떤 사람들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이 남자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고 스스로 공급하겠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수치를 가리기 위한 당신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좋게 보이기 원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그러한 지위를 줄 것입니다.”

저는 이사야가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여인이 결혼하기 원하는 그 남자는 예수님입니다. 그 선지자는 여기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편리한 결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자들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일부임을 주장하며 영적으로 보이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 함께 거래 하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원해요, 주님! 그러나 나는 내 길을 가고 싶고 내 자신의 일을 하고 싶어요. 그냥 당신의 이름을 주세요. 저는 당신의 것, 당신의 일부로 보이고 알려지고 싶어요.”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의의 옷을 입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친밀함을 갖거나 그분께 의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들 자체적으로 살기를 원할 뿐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의무나 헌신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주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과 사귀게 해주십시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 이사야의 예언이 이뤄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 있는 교회들은 예수님과의 친밀감이 없는 수백만의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의 시간도 갖지 않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보기 위해 성경을 꺼내 들지도 않습니다. 믿을 수 없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계속 품어주셨습니다. 그들을 축복하고 번영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간단한 말조차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감사해요, 주님. 제 인생에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아무튼 이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이름에 붙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전히 그들 나름대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런 합의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는 그들의 신랑에 커다란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그와의 친밀함을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며 나는 그분의 것이니”(아가2:16)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부르짖음은 이것입니다. “주님, 저는 단지 당신의 이름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당신을 갈망합니다. 저는 잠자리에 들며 매일 밤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일어나는 매일 아침, 내 마음은 당신께로 향합니다.”

“우리의 혼이 주의 이름을 사모하오며 또 주에 대한 기억을 사모하나이다. 밤에 내가 내 혼으로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참으로 아침 일찍 내 속에서 내 영으로 주를 찾으오리니”(이사야 26:8-9)

그렇습니다. 진실한 신자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내가 주를 크게 기뻐하며 내 혼이 내 하나님을 기뻐하리니 이는 마치 신랑이 장식으로 자기를 꾸미고 신부가 보석으로 자기를 단장하는 것 같이 그분께서 구원의 옷으로 나를 입히시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셨기 때문이요”(이사야61:10)

이 모든 것이 그 날에 벌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나라를 흔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사야의 예언이 일어나려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소돔과 고모라를 다루셨던 것처럼 다루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원로들에게 교만히 행하고 천한 자도 존귀한 자에게 그리하리라”(이사야3:5) 그분께서 번영을 멈추시므로 곧, 주님의 의로운 심판이 모두에게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다가올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혼인하였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명목상으로 그분께 붙어 있을 것입니다. 비극적이게도, 그들은 전혀 그분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비유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그들이 다 졸다가 잠드니라”(마태복음25:5) 모든 처녀들,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잠들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재림 직전의 졸고 있는 교회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깨어 있으라. 이는 집 주인이 어느 때에 올는지 저물 때일지, 한밤중일지, 닭 울 때인지,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가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말이니라.”(마가13:35-37)

저는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이 그림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이 지혜로운 처녀들이 졸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경건한 종이,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왔던 자가, 주님이 다가오시는데 잠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제가 예수님의 비유의 어려운 진리를 보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저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거대한 배교가 교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바울의 권고도 기억했습니다.

“지금이 잠에서 깨어야 할 바로 그 때이니 이는 지금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로마서13:11) 바울의 경고는 예수님의 재림 직전, 거대한 졸음이 많은 그리스도인들 위에 쏟아지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의로운 자마저도 잠들어 버릴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희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부시리라, 하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주의하여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로서 조심스럽게 걷고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 (에베소서5:14-16)

그 사도는 이렇게 강권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성도 여러분, 잠자는 처녀가 되지 마십시오. 지혜롭게 주님의 재림를 주의하며 기다리십시오.” 여기 바울의 언급에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사랑스런 자녀”(5:1)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자. 이는 잠자는 자들이 밤에 자고 술 취하는 자들이 밤에 취하기 때문이라”(데살로니가5:6-7)

많은 신자들이 이 거대한 졸음으로 인해 시험 받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는 한 밤중에 빠르게 접근하는 어두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은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위를 돌아볼 때, 저는 많은 신자들이 깊은 잠에 빠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과연, 이 영적 졸음의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다수의 사람들이 넘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남자는 기도한다고 해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를 보며 그의 텔레비전 앞에서 몇 시간이나 보냅니다. 그는 또한 취미, 여가활동, 사냥, 낚시를 위한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위한 시간은 절대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남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를 축복하시고 번영하게 하셔서 그의 가족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이 남자는 심지어 5분이라도 무릎을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한 여자를 생각해 봅시다. 그녀는 친구와의 전화에 몇 시간을 보냅니다. 그녀는 매일 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시간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한가하게 독서를 합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만일 그녀가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아주 가끔씩 입니다. 그녀의 가족에 위기가 다가왔을 때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지 별로 그녀의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 또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에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들의 등불은 꺼져버립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가진 빈약한 관계는 서서히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히 2:3) 왜 주님이 졸고 있는, 미지근한, 무관심한 추종자들이 천국에서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왜 그분께서 여기 이 땅에서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 하나님에 관하여 지루해하던 자들, 교회나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친밀함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자들 원하시겠습니까? 천국에서 우리의 목적은 영원히 주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여기에서 예수님과의 한 걸음 조차 견딜 수가 없다면, 어떻게 거기서 영원히 즐거워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들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죽으면 문제가 달라지죠. 저는 순식간에 변하게 될 겁니다. 주님께서 그 순간에 저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죠. 그럼 저는 그분을 찬양하기 원하게 될 겁니다.”

저의 대답은 그렇게 죽는 것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알려진 것처럼 그 때에도 알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여기서 지니고 있는 성품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도 가질 똑 같은 성품일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빈둥거린다면, 그 때도 여러분은 동일한 성품을 지닐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뿐인 냉담한 신자라면 심판의 날에 여러분은 어떻게 드러나겠습니까?
<데이빗 윌커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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