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2010

밀려오는 부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갈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수백 만 명이 애창하는 노래 부흥 은 부흥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속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주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이와 발맞추어 부흥에 관한 저서들도 여기저기서 출간되고 있다. 많은 지역교회들도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부흥성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성도들은 부흥이란 노래가 말하는 부흥과 지역교회의 부흥집회를 혼동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또한 한국 교회는 교인 수가 늘어나면  우리 교회 많이 부흥했다 는 식으로 부흥이란 말을 사용하다보니 부흥집회를 하고 교인의 숫자가 늘면 우리 교회도 부흥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부흥(revival)은 장기집회나 개인의 심령부흥이나 교회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가 말한 대로, 집단적으로 사도행전적인 성령 충만을 받아 그 은혜가 지역교회를 넘어 다른 교회와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친 것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진정한 부흥이 왔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는가?'이다.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요!”이다. 오히려 부흥을 간절하게 사모하는 기존 지도자들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흥을 제일 대적한다는 사실이다.

부흥을 강조하는 한국의 어느 목사가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북미주의 어느 교회에 단 한 번 참석해 보고는 ‘부흥은 이래야 된다’는 과거의 책들이 제시한 근거에 의해 평가, 비판한 후 ‘그곳에는 부흥은 없고(희한한 영적) 현상만 있더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어 버린다.

이것은 마치 ‘교회는 이래야 된다’는 당위성을 정해 놓고 아무 교회나 단 한 번 방문한 후 ‘그 교회는 사랑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 교회에는 거룩이 없더라. 그러므로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교회를 평가하면 교회다운 교회가 얼마나 될까? 아마 지상교회에서는 이런 기준에 맞는 교회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흠이 있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지상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웨슬레처럼 “하나님, 불완전해도 좋으니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부흥은 기존 신앙인들의 심성을 건드린다. - 왜 이런 오해가 점철되는가? 부흥을 사모하는 종교지도자나 기존 교인들이 새로운 운동을 핍박하고 오해하는 주된 이유는 새로운 부흥이 그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말을 영어로는 offend라고 한다. 새로운 부흥에는 대부분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강조점과 생소한 영적 현상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이 전통과 기존의 가르침에 익숙해 있는 신자들의 심성과 기대와 프라이드를 건드린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알고 수백 년 동안 연구하고 보존해 왔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그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깨뜨려버리셨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는 일이었다.

사도들은 어떠한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보기에는 자기들처럼 이름 있는 랍비의 신학교를 다니지도 않고, 자기 교파의 안수도 받지 않은 어부출신의 무식쟁이들이 자기들과 다른 "도 를 전하는데, 문제는 수많은 백성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자기들의 교권과 기득권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들은 사도들을 이단으로 몰아 정죄하고 만다.

종교개혁은 어떠한가? 막강한 로마교회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도 믿고 자신의 공로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루터라는 한 수도승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어느 지도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루터는 자기 목숨을 노리는 로마 교회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평생을 도망 다니면서 불안에 떨며 살았다.

웨슬레의 전도운동은 어떠한가? 당시 교회는 죽은 정통의 늪에 빠져 전통과 예전(예배의 형식)에 빠져 있었다. 전통과 기득권에 연연하는 성공회가 보기에, 성령의 은사와 야외 예배를 주도하는 웨슬레의 전도방식이 영 못마땅했다.

오순절 운동은 어떠한가? 오늘날은 많이 나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말도 못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다. 이들은 개구리 소리 같은' 방언을 하면서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세례(체험 '유일한 외적 표적'이라고 주장했으니 기존 교계가 발칵 뒤집어 진 것이다.

이후 이 운동은 기존 교단 내로 전파되어 은사운동, 3의 물결 등의 본질은 비슷하나 강조점은 다른 새로운 운동으로 전개되어갔다. 한편 1980년대에  3의 물결 을 주도한 빈야드교회는 1994  자기 교파 내의  토론토공항교회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자기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현상이 일어나자 우여곡절 끝에 그 교회를 제명해 버렸다.

그러나 현재, 제명당한 토론토 교회는 여전히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과 교회를 살리고 있는 반면 빈야드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축소되어 있다.

그때 그곳의 잣대로 오늘 이곳의 역사를 평가하는 오류 - 왜 이런 오류가 반복되는가? 전통에 젖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 그곳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불변의 진리인 양 착각하여 그 잣대로 현재, 이곳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지만 사역의 양상이나 강조점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오해할 일이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 전통에 이렇게 역사하셨어. 하나님은 앞으로도 이렇게 역사 하실 거야."라는 가정 하에 성경을 해석하고 전통을 세우고 목회 방침을 정하다 보니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생소한 가르침과 실천을 주장하는 새로운 운동을 오해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결국 부흥을 체험한 마지막 기존 세력이 언제나 새로운 운동을 핍박하는 기현상이 반복됨을 교회사는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의 운행에 민감하라  - 오늘날 한국교계는 21세기를 담당하는 교회로서 자리 잡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공감대가 교계 전체에 파급되고 있다. 각 교파마다 이름이나 모습은 다소 다르지만  xx교단발전위원회 ,  21세기 교회의 사명 ,  xx갱신협의회 라는 주제를 내걸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신심'(信心)을 잡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또한 한편에서는  미래 대예언 ,  21세기 교회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변하지 않는 성경(text)과 변화하는 상황(context)에 비추어 볼 때 이 모든 운동들이 상황적인 면에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는 감성의 시대다 ,  21세기는 관계의 시대다 ,  21세기는 (교단 중심이 아니라) 네트워크(Network)의 시대다 ,  21세기는 사이버시대다 ,  21세기는 절대주의가 통용되지 않는 포스트 모더니즘(상대주의)의 시대다  등의 사회학적, 철학적, 심리학적 접근법에 치중하는 반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성경과 상황을 가장 잘 아는 분은 누구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회학적, 심리학적, 철학적으로 상황을 이해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변하지 않는 성경의 진리를 유연하게 적용하셨다.

역사를 보라. 하나님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고조해 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믿음과 공로의 혼합으로 인해 교회가 배금주의, 물량주의로 부패해 있을 때 개혁가들을 통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구원을 주도하셨다.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교권과 교리 논쟁의 죽은 정통으로 치닫았을 때, 하나님은 웨슬레를 통해 비록 결함은 있지만 삶과 변화의 성화를 강조하는  완전 성화'를 주도하셨다.

이신칭의가 죽은 정통으로 흐르고  완전 성화가 율법주의와 교육주의로 전락했을 때 하나님은 오순절 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동성과 증인되는 능력을 통해 교회에 활력을 불러 일으키셨다.

신사도적인 개혁 운동  - 저명한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 교수는  밀려오는 부흥(The Rising Revival)에서 21세기 부흥운동의 특징은 너무나 새롭기 때문에 이를 신사도적인 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mation)이라고 부른다. (사실 개혁은 교리와 관계가 있고 부흥은 영성과 관련이 있지만 진정한 개혁은 부흥을 동반하고 진정한 부흥은 개혁을 동반한다).

신사도적 개혁운동이라고 불리는 21세기 부흥운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가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부어진 유례가 없었다. 이것은 사도행전 2:17이하의 지속적인 성취의 일환이다. 이를 통해 교회의 창시자인 성령이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주도하시고 있다

둘째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부흥운동은 기껏해야 1-3년의 단명이었으나 신사도적 부흥은 1982년 이래로 계속 불타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도, 회개 및 영적전쟁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것은 19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기도 운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서방의 신자들은 한국 교인들로부터 기도를 배웠다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도가 두루 뭉실하고 일반적이라면 서방의 기도는 마귀의 세력을 강타하는  전략적인 중보기도 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이 무한하게 방출되고 괄목할만한 영혼추수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구원에 있어 죄 회개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죄의 원흉인 대적 마귀에 대한 무관심한 교회를 각성시키기 위해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주도하신 것이다. 오늘날 마귀의 세력을 대항하는 예언적인 중보기도(Prophetic prayer), 목표기도(Target prayer) 및 전투기도(Warfare prayer)는 필수적이다.

한국 교계에서도 중보기도의 중요성이 많이 인식되고 있고 또한 축사사역을 비판하던 지도자들이 이제는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주로 개인축사와 관련한  지상적 차원의 영적전쟁'(ground-level spiritual warfare)에 머무는 수준이다.

그 결과, 문화적 차원의  주술적 수준의 영적전쟁'(occultic-level spiritual warfare) 및 지역담담 악령과의 전쟁인  전략적 수준의 영적전쟁(strategic-level spiritualwarfare)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실정이다.예를 들어, 한 때 한국에서 책이나 매스컴에서 전생(前生) 주제물이 유행한 것에 대해 어느 미래학의 전문가는, 이런 현상을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보지 못하고 과거지향적이고 운명적이고 현실도피적인이라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분석을 내 놓는다. 과연 그런가

오늘날 문명국가에서 오히려 사단의 세력이 발흥하고 있다. 귀신들을 주제로 한 매스컴의 각종 프로그램과 게임들이 초자연적인 것을 사모하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있다.

특히 최근 포켓몬 게임과 마법사 해리 포터의 이야기가 많은 어린이들의 영혼을 난도질하고 있다. 포켓몬 게임은 살육을 업으로 삼는 일본 사무라이의 영을 이어받은 악영들의 각축장이다. 포켓몬 게임을 한 어린이들이 잔인하고 포악해지는 것은 이런 영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영안이 뜨인 사람들은 포켓몬의 캐릭터 하나하나가 귀신의 모습임을 금방 안다. 마법사란 무엇인가? 성경적으로 말하면 무당이다. 오늘날 TV, 영화, 음악 및 책은 무당과 마법사를 주제로 한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영적 운동에 앞장선다는 어느 지도자는 이것들을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분석하여, 연합과 경쟁, 상상력의 제고라는 측면에서 교회도 이들의 성공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니 얼마나 한심스러운가!

또한 중보기도를 통한 회개 운동은 개인 회개에 이어 가계, 지역, 도시 및 국가의 회개로 이어져서 조상들이 지은 죄를 내 죄로 인정하는  동일성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를 통해 지역과 교파와 부족과 민족이 서로 화해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어느 뛰어난 지도자는 가계 치유는(그것이 과연 그런가 하고 성경을 살펴보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한다. (가계 치유를 부정한다면 신사참배 회개는 왜 하는가?) 이 사람은 한때 성령운동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최근에야 회개하고 그 중요성을 인정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 한국교계의 연합과 일치 운동을 주도하니 무엇이 되겠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이나 근본적인 회개화해가 없이 스스로 열심을 내어  명분 세우기, 교세 키우기, 숫자 불리기에 치중하다보니 열매도 없고 조그만 차이에도 금방 다시 갈라지지 않는가?

잘 알다시피 미국의 특별한 고민 중의 하나는 인종차별문제이다. 이는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바른 교리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전통적인 미국 교회―최근 각광 받는 남가주의 S교회도 예외가 아니다―는 거의가 백인 중심의 교회다. 이들 교회에 흑인이나 소수 민족은 눈 닦고 찾아봐도 보기 힘들다.

그러나 성령 운동에 동참한 많은 교회에는 백인교회인지 흑인교회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로 흑백이 주안에서 하나 가 되어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잘 한다. 인종, 교리, 전통을 뛰어 넘어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지 사람의 노력이 아니다.

셋째 이 모든 사역을 선두에서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도적인 은사와 직분을 행하고 있다( 4:11). 이 직분은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요 특징이 이전의 교회생활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이 운동을 신사도적 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21세기 성령 사역의 몇 가지 특징들   - 21세기 교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신사도적인 부흥운동의 주요 특징과 더불어 오늘날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미국, 남미, 유럽의 여러 나라 영성 사역을 한국 교회의 상황에 적용하기 위해 필자는 다음의 몇 가지를 추가, 부연한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감(Intimacy)회복.  - 21세기는 관계의 시대고 감성의 시대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교회는 침체되고, 외적 형식과 물량에 치달아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결여되자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교제를 회복하셨다. 이것은 곧 신자들이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친밀감 회복은 주로 찬양과 경배 및 개인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산업화, 기계화로 인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심성에 딱 들어맞는 것이다.

명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가지는 나 홀로의 시간. 친밀한 회복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명상기도다. 점성술, 뉴에이지 운동 및 초월명상 등의 동방 종교들이 심령이 공허하고 지친 현대인들의 마음을 빼앗고 있다. 하나님은 카톨릭적이라고 개신교에서 외면한 명상기도 (contemplative prayer)를 통해 텅 빈 현대인들의 갈증을 채워주고 있다. 세상에서는 직위에 상관없이 최고 권력자와 독대를 많이 하는 자가 실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독대를 많이 하는 자―친밀한 교제를 많이 하는 자―에게 성령의 권능이 임한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치유사역. 하나님이 내적치유나 가계치유를 주도하시는 이유는,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설교, 제자훈련, 봉사 및 전도선교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구원 받은 신자가 안 밖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의 성품' 개발에는 소홀했다.

이것이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니 보다 긴급한 양적성장, 물량주의에 치중한 결과 이를 소홀히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본을 소홀히 한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여기저기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예언의 은사의 회복.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학의 급속한 발달로 인한 비인간화로 인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한국의 경우 기독교인의 1/3 정도가 점을 친 경험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 문제도 미리 해결하셨다. 정통교회가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고 믿어온 예언의 은사를 회복시켜 미래에 대해 불안과 영적으로  공허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개인적이고 직접적으로 표명하시고 있다.

사도직의 회복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 오늘날은 진정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이다. 목회자나 평신도 리더십에 대한 책이 많이 출판되고 각종 세미나가 성행하고 있다. 리더의 모본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예수님의 리더십의 덕목을 가장 잘 갖춘 성경적인 본은 누구인가? 바로 사도들이다. 로마 카톨릭은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성을 이어 받은 사도라고 주장하여 개신교는 오늘날에도 사도가 있다고 하면, 금방 교황과 연관시켜 불순한 주장으로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처럼 외지에 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여 돌보는 은사는 인정한다. 그렇다. 성경이 말하는 사도의 가장 중요한 직분은 선지자와 함께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2:20). 외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감독하는 사도의 직분을 인정한다면, 현지에서 교회를 세우고 감독하는 직분으로서의 사도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진정한 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일부 정통주의자들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사도직과 선지자직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영적인 지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신사도적인 교회는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이다. 지지자들은 사도들을 은사, 지도력, 영성을 통해 하나님이 세운 자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금권과 지연과 학연을 통한 부정선거로 교회 연합의 장이나 임원이 되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신사도적 교회는 교인이나 당회의 의결을 통한 민주주의 보다는 주로 사도들의  거룩한 독재'를 통해 인도된다. 거룩한 독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할 때 생기는 초자연적인 리더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도자들은  21세기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사라지고 민주적인 지도자가 필요한 때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과는 반대되는 주장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마치 목회자나 당회원의  임기'를 정해 놓고 이후 회중의 신임을 얻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안이하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독재정권이 임기 연장을 위한 3선 개선 때도 국민투표를 했고,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자들도 임기를 정해 놓고 국민투표를 통해 대를 이어 정상에 올랐다.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성령의 기름 부음이 없으면 편법과 불법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이 성경적인 비전의 실천 비전은 하나님이 세우신다. 각자의 은사나 소명이 다르듯, , 가정, 지역교회 및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 알아낸 후, 어떠한 핍박과 환란이 오더라도 목숨을 걸고 지켜나가는 것이 비전이다.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런 비전은 종종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해서 온다. 앞서 가는 미국 교회는 이런 은사를 잘 활용하고 있다.

이런 특징을 지닌 신사도적인 개혁부흥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우렁차게 밀려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계의 문제는 앞장서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이런 운동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비판하고 대적한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의를 세우고 기득권 유지에 연연하다 보니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는 것이다( 10:2, 3 참조).

이름 난 지도자라고 해서 영적인 분야 모두를 다 잘 아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방언이나 예언하는 초신자보다 하지 못하는 이름 난 지도자가―적어도 방언이나 예언에 관한 한은―문외한이고 무지한 자다.

비록 나에게는 생소하지만 믿음의 다른 형제들이 주장하면 '과연 그런가?'하고 살펴보고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내가 잘 모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매도하는 태도야말로 교만과 자기 의의 대표적인 예다. 부흥은 언제나 교만하고 자기 의에 찬 자를 비켜간다. <출처:  성령의임재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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