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2009

방언의 은사 (2)



방언의 은사
1. 과연 서로 다른 방언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한다.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들었다.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7-8).

그렇지만 고전 1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구분하려는 시도가 더러 있다.

2. 표적 방언과 은사 방언?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거하는 "표적 방언"이고 고전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표적 방언은 단회에 끝나지만 은사 방언은 은사 받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주로 오순절 계통에서 하는 주장이다.

3. 나라 방언과 은사 방언?
또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의 방언은 "나라 방언"이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라고 한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자기 나라말로 알아들었지만 고전의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경우에는 방언하는 사람이 방언할 때 방언하는 본인이 전혀 모르는 외국어로 말하여 그 외국어가 본국어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전의 방언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물론 성경에서 구분해 놓았으니 구분은 해야되겠지만 꼭 본질이 다른 방언일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해 본다. 즉 비록 제자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을 했지만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방언 통역을 하여 듣는 사람 각자가 자기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듣는 사람들은 한 나라 말만이 아니라 각자의 언어로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8, 11). 

오늘날 "나라 방언"을 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기가 모르는 어느 한 외국어로 했다는 간증은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나라 말들"로 들었다는 간증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제자들의 방언을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하여 여러 다른 나라 말로 듣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 보는 것이다.

4. 차이에 관한 견해
정리하면,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의 차이에 관한 견해는 세 가지가 된다.

. 첫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초기의 성령 체험을 실질적으로 증거하는 것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은사 방언이다.

. 둘째 사도행전의 방언은 알아 들을 수 있는 나라 방언이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은사 방언이다.

.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의 방언은 성령이 초능력적으로 통변했지만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일반적으로 통변을 따로 해야 하는 은사 방언이다.

문제는 과연 이런 구분이 그렇게 중요한가이다.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구분 자체는 별로 중요한 것같지는 않다. 표적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나라 방언이면 어떻고 은사 방언이면 어떤가? 문제는 방언의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 본질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귀신론의 경우,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귀신의 기원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여 실제로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아내는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서로 물고뜯는데 소진하는 것을 본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귀신의 기원에 하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원의 잘못을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축사나 영적 전쟁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귀신의 기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은 하면서도 정작 교인들이 귀신들려 있으면 어떻게 해야될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외적 구분이 아니라 본질이다. 나라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표적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방언했을 때 자기 나라 말로 들은 사람들은 어떤 내용을 들었는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2:11). 고넬료 가정에 내린 성령으로 인해 방언을 한 사람들도 방언을 통해 하나님을 높였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6)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미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고전 14:15-16).

사도행전의 방언이든 고린도전서의 방언이든 중요한 것은 방언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점이 방언의 외형적인 구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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