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방언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다(행 2:11; 2:45-46; 고전 14:15) 방언으로 찬송할 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과 같이 영적인 열매를 맺는다. 나는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글을 보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찬미하는 방언의 기능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보통의 말로 하는 찬양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하물며 영으로 찬미하는 방언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언젠가 미국인이 인도하는 찬양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찬양인도자가 가사 있는 찬양을 어느 정도 인도한 후에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허-밍 비슷하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응답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의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방언 찬송도 하고 신령한 노래도 불렀다. 그것은 마치 "허다한 무리의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겔1:24).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자(겔 1;24), 예수님의 음성이며(계 1:15), 동시에 구원 받은 허다한 백성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다(계 19:6).
보통의 말로 하는 찬양도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하물며 영으로 찬미하는 방언 찬양이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언젠가 미국인이 인도하는 찬양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찬양인도자가 가사 있는 찬양을 어느 정도 인도한 후에 성령에 감동되어 즉흥적으로 허-밍 비슷하게 영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응답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듣기에 너무나 아름다웠고 나의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방언 찬송도 하고 신령한 노래도 불렀다. 그것은 마치 "허다한 무리의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겔1:24).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계1:15).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많은 물소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이자(겔 1;24), 예수님의 음성이며(계 1:15), 동시에 구원 받은 허다한 백성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다(계 19:6).
미국 암흑가의 깡패를 전도시킨 것으로 유명한 데이빗 윌커슨 목사와 [십자가와 깡패](The Cross and the Switchblade)를 집필한 성공회 신자이자 신문기자인 존 셔릴은 방언 찬송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 음악이 시작됨에 따라 탁자주위에 앉아 있던 몇몇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악보도 없는 즉흥적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찬양인도자는 더 이상 노래를 인도하지 않고 음악이 흐르는 대로 맡겨두었다. 누구의 인도함도 없이 회중의 사분지 일 정도가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 부르자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한 가지 하모니와 또 다른 하모니가 들락날락하며 서로 영글어 졌다.”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를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고전14:15), 신령한 노래(엡5:19; 골3:16), 성령 안에서 노래 부르기, 또는 하나님의 존영(the high praises of God) (시149:6)이라고 한다. 제임스 던은 신령한 노래(엡 5:18)가 곧 방언 찬송이며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즉흥적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말했다.
사람에 따라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음성가나 경배송을 신령한 노래하고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것으로 체험했다. 어느 주말 재학 중인 신학교를 출발하여 섬기는 교회를 향해 약 2시간 동안 운전을 하던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감이 있는 찬양 테이프를 들으면서 얼마간 따라 부르고 있노라니 갑자기 심령 깊은 곳에서 생전에 듣지 못한 고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단순하면서도 하늘 보좌에 상달되는 듯한 소리였다. 부르고 있노라니 하나님의 은혜가 물밀듯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것이 바로 "신령한 노래"5)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개인의 경건 시간에 방언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매우 즐긴다. 방언 기도보다는 방언 찬송이나 신령한 노래를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강하게 임하는 것을 체험한다.
라. 방언은 다른 은사를 받는 통로가 된다 방언의 주요 기능은 기도와 찬양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그런 만큼 방언 말함은 곧 방언 기도이자 방언 찬양이므로 성령의 기름부음을 초청하는 좋은 수단이다. 필자도 어떤 경우에는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방언을 말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예언 사역을 강조하는 미국의 크리스천 인터내셔날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훈련의 일환으로 방언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마주보면서 서로를 위해 방언 기도를 한 후 잠시 침묵했다가, 떠오르는 생각, 느낌 또는 음성을 나누면서 상대방에 대한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의 말씀을 전하게 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필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을 때는 회개 기도를 철저히 하고 방언 기도를 많이 한 후에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보통 때 듣지 못하는 여러 음성을 더욱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방언이야 말로 모든 다른 은사로 통하는 대문 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기도 때마다 쉬지 말고 방언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 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고전 14:4).
마. 방언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고전 14:14-15) 특별한 경우 외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은 우리의 혀를 통제하므로 무한정 할 수 있다.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는 것은 시간 상 한계가 있다. 그러나 방언기도는 오토매틱 파일러트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며(고전12:18),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다(고전12:39). 바울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고전12:30), 자기는 모두가 방언 말하기를 원하므로(고전12:5),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고전12:39).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는 그 내용을 모르지만 성령께서 내 대신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기도 해 주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이 기도가 곧 방언 기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기도 자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방언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로가 자기의 체험이나 무체험을 증거하는 구절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방언기도든 보통 기도든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루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방언 기도에도 해당이 되고 보통 기도에도 해당이 되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6)
중요한 것은 때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렇게 깨달았다. 언젠가 교인 한 명이 뺑소니 교통사고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나에게 법원에 가서 영어로 통역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판사 앞에서 그 사람의 입장을 통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판사는 나에게 "뺑소니 교통사고는 사안이 중요한 사건이다.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판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적인 법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대하다가는 자칮 잘못하면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법을 전공한 사람들끼리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전문적인 지식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나같이 법에 대한 일반인이 나설 문제는 아닌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어떤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가 많다. 이때 성령은 우리 사정을 잘 아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존경하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 연구>에서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자의 입장과 서신서를 역사서인 사도행전보다 우위에 놓은 잘못된 입장에서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전반적으로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내용을 알지도 못하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주기도문 식으로 기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는다고 한다.
글쎄? 나는 훼케마와 같이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주기도문을 아무리 읽어봐도 때로는 도대체 내가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라서 방언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다.
나는 어떻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방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노라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때로는 성령께서 구체적인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주신다. 내가 마땅히 어떻게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께서 완전히 내 입장이 되셔서 하나님께 친히 간구해 주셨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 레이몬드도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이몬드, [신오순절 운동 비판],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4).
이런 주장도 전형적인 기적종식론에 근거한 주장에 불과하다. 헬라어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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