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2009

방언의 은사 4

말썽은 있지만 유익한 방언
이처럼 방언은 말썽과 위험의 소지도 있지만 유익한 은사이다. 이 세상에서 유익한 것치고 말썽의 소지가 없는 것은 없다.

자동차는 너무나 유익하다. 그러나 위험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통사로로 다치거나 죽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해서 자동차 타지 말고 자건거 타자고 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무엇이 위험하기 때문에 폐지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동차는 유익하지만 위험하기 때문에 소정의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운전면허증을 발급하고 각종 교통안전법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방언도 마찬가지다. 일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방언을 자랑하고 남용한다고 해서 은사 자체를 부정한다면 이 세상에서 취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은사에 대해 사도 바울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방언은 비록 말썽 많은 은사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부정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하고 방언은 물론 더 많은 은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전 1:4-7).

방언이 말썽을 부린다고 해서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사용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을 모두 제대로 잘 사용하고 있는가?

안토니 훼케마는 방언이 중요한 은사가 아니고 별 볼일 없는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의 제일 골찌에 언급했다면서 방언 무용론을 내세운다(안토니 훼케마[방언 연구](신망애출판사, 1982).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이 그렇게 말썽을 부렸기 때문에 고전 14장에서 방언의 바른 사용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방언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고전14:5).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4:18). 

그런데 훼케마는 자신 성경을 넘어서는 판단자가 되어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과연 훼케마가 주장하는 대로 방언이 마지막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별 볼 일 없는 은사인가?. 근접 문맥에 있는 고전 13장은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사랑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또한 성경은 가장 작고 약한 은사가 가장 귀한 은사라고 기록한다.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2). 물론 이 구절은 방언을 가장 귀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고린도교회에게 한 말이지만 훼케마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방언이 가장 별 볼 일 없는 은사라면, 이 구절에 의할 때 말썽부리고 소용없다는 방언이 오히려 가장 요긴한 은사가 된다는 말이다.

방언이 마지막에 기록되었고 말썽 부리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는 은사라고 주장하는 훼케마의 논거 자체가 잘못된 억지라는 말이다.

한편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고든 피는 안토니 훼케마와는 달리 방언을 성경적으로 자세히 증거한 후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유익한 은사라고 결론짓는다 (Gordon D. Fee, "Toward a Pauline Theology of Glossolalia," Listening to the Spirit in the Text , Eerdmans, 2000).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방 "오순절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을 생각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어느 누구보다 더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 . .

많은 현대인들이 이 현상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 생소한 것에 대한 두려움, 명백하게 합리적인 아닌 것을 인정하기를 주저하는 것, 은사주의자들로 인한 몇 가지 나쁜 경험들 등),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런 체험을 오랫 동안 누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신학적 견해가 불충분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또한, 이 현상에 대해 오순절주의자들이 종종 의기양양한 태도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이 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바울의 신학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기양양한 태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형태의 기도나 찬양은(고전 14:15-17), 기본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가치를 깍아내려 버린다. . . .

바울이 엄하게 꾸짖은 것은 공중 집회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방언 말하는 것이었다. 그외에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방언에 대해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할 것이다. 나는 영으로도 기도하고(즉 방언도 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할 것이다"라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 . .

결론적으로, 바울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방언 말하는 것은 그의 모든 신학적 전망에 부합된다. 이제 우리는 방언을 통해 찬양, 감사, 기도 및 중보기도를 함으로써 심령 깊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의 연약함 중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연약함 중에서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8)고 바울은 주장한다." 

요약하면, 이해 부족으로 인해 다소 말썽은 있었지만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은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이 방언 말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공중 앞에서 사용할 때는 교회의 덕을 위해 반드시 통역해야 한다.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8-19).

"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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