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2009

방언의 은사 (3) – 방언의 유익 1



방언의 유익 - 방언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인 유익은 모르고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나쁜 것만 보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식으로 영적 현상을 판단하면 합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는 입었지만 여전히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죄인들이 하는 행위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지라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록 거듭났지만 말썽 부리고 죄짓는 신자가 많다. 신자의 신분의 확실성,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보지 않고, 그의 현실적인 나쁜 행위만 보고 "죄 사함 받았다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군," "바른 교리를 입으로 고백은 잘하지만 고백한 대로 살지는 못하는군"이라면서 구원 받은 신분 자체를 부정한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불완전한 신자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모르는 불신자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신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용서 받은 죄인," "구원 받았지만 여전히 죄의 능력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방언과 같은 영적 체험이나 영적 현상만은 완벽하기를 바라는가? 방언의 유익이 더 많지만 체험의 결핍으로 인해 몇 가지 나쁜 것만 확대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보지 못하고 외형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방언은 언뜻 보면 말썽만 부리는 은사인 것 같지만 유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1. 방언의 유익

. 통역된 방언은 공중의 덕을 세운다. 공중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방언은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고전14:5).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의 효과를 가져와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안위하는 역할을 한다(고전14:4). 그러나 통역을 하지 않은 방언,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공중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다(고전14:23).

남을 가르칠 때에는 알아듣는 말 다섯 마디가 통역이 없어 알아듣지 못하는 일만 마디의 방언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14:19). 여기서 "남을 가르칠 때"라는 말에 유의하기 바란다. 방언이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남을 가르칠 때는 무익하다는 말이지 방언 자체가 무익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통역 없는 방언을 공중 앞에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유지하고 혼란을 막기 위해서이다(고전14:27-28). 또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 방언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방언하는 자체만을 보고 미친 짓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4:23).

방언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기 때문에 방언이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그들이 마음문을 열어 구원받을 기회를 놓치게 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일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말하는 헬라어 글로싸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말(language)을 의미하므로 방언은 알아 듣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분명히 "알아 듣지 못하는 말"(고전 14:2)이라고 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면 "죽은 믿음"도 믿음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는 믿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언어란 절대적인 표현이 불가능하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방언은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다.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성은 되지만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이란 뜻이다.

. 방언은 개인의 경건을 돕는다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고전 14:4).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는 방언이 반드시 통역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은 공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덕을 세우는 방언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고 반문한다. 과연 그럴까? 혼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는 시간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할 것인가? 개인의 영성 개발 없는 단체의 덕은 있을 수 없다.

방언의 효능은 개인의 내적 영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한다(고전 14:15).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고전 14:2). 어떤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는 방언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병이 났을 경우 병원에 가서 의사가 수술하면 병이 낫는다. 환자가, 의사가 치르는 수술의 모든 과정을 모른다고 해서 수술 받는 것이 소용 없는 짓인가? 환자는 의사의 수술을 받으면 병이 낫는다는 그 사실만 알면 된다. 환자가 병이 낫기 위해 복잡한 수술 과정을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방언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방언을 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우리는 모른다. 방언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밀의 말이기 때문이다(고전 14:2).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하면 심령에 평강이 임하고 기도의 응답이 임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방언 기도를 할 때 병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난다는 말이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고 할 것인가? 나는 컴퓨터를 자주 사용하지만 고장이 나면 번번히 전문가에게 가서 고친다. 복잡한 수학공식같은 것이 딱 질색이다. 그렇다고 컴퓨터가 나에게 필요가 없는가?

나는 컴퓨터의 스윗치를 켜서 내가 익숙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지금 이 책을 집필하고 있다. 그 정도만 알면 되지 않는가? 내가 컴퓨터의 복잡한 구조를 모른다고 해서 나에게 컴퓨터가 소용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방언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기도응답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양하면 우리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않지만 우리의 영은 분명히 열매를 맺는다(고전 14:14). 우리의 영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방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임재 속에 쉽게 들어간다. 보통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방언 기도를 하면 금방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보다 실질적으로, 체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다. 방언 기도를 하노라면 기도를 하기 전에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금방 가시고 마음에 평강이 임하고 영이 한없이 맑아지는 기분을 가진다.

그렇다고 꼭 방언 기도를 해야 이런 식으로 응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방언이라는 은사를 통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 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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