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지자는 ‘평범한’, 곧 ‘미적지근함’을 대적한다. 그들의 내면엔 어둠과 싸워야 한다는 강한 충동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빛이다.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평범’이란 믿음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무의식과 환영의 나라)일 뿐이다. 하나님과 바알 선지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한판 승부 가운데, 엘리야는 단지 사술(邪術)의 세력과만 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빛과 어둠 사이에 존재하는 ‘회색지대’도 대적했다.
회전하는 그림자, 곧 그늘이 드러워진 ‘빛바랜 충성’의 영역 (충성으로 타오르는 봉화대의 주변 지역, 빛과 불의 근처이긴 하지만 중심은 아니라)을 대적했던 것이다.
선지자는 빛 가운데 살고, 빛 안에서 행한다. 자신의 백성에게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 그 친밀함의 빛 안에서 선지자들은 몸을 녹인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님을 향해 있다. 자기 백성을 지지해주시는 하나님, 백성을 향해 후원의 빛을 비워주시는 하나님, 선지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고정한 채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미소 지으신다.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우리의 얼굴은 그의 빛을 머금고 그의 빛을 발한다.
우리의 세포 속에는 예배를 사랑하는 DNA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이유이다. 만일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경배 대상은 ‘어떤 것’ 혹은 ‘누군가’가 될 것이다. 종류야 어떻든, 그것은 우상이다.
진정한 선지자라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사모할 것이다. 진정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는 피난처요, 요새요, 경배와 친교의 비밀 장소이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다 못해 멀게 하는 빛을 향해, 그들은 걸음을 내딛는다. 빛의 장소에서 시작된 그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아군(我軍)이든지 적군(敵軍)이든지, 크리스천이든지 아직 믿지 않는 형제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빛의 중심부에 머문다. 그들은 결코 어둠의 가장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의 영향력이나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름부음은 어둠에 닿고 또 그 속으로 침투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은 어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아무도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다.
모든 사람은 빛으로 나아와 그 안에 거하여야 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친밀함’의 변방, 그늘지고 어두운 끝자락에 머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압도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육신의 욕정과 결별하지 못하기에 육욕에 의해 통제받고 압도된다.
하지만 하나님과 친밀할 때 우리는 자신감을 얻는다. 또한 이 자신감으로부터 나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그의 광대하심을 바라볼 수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속성의 광대하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이처럼 자신의 광대함을 더욱더 드러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함은 우리의 대적을 위협한다. 또한 육욕에 통제받는 크리스천, 열정 없는 신앙의 소유자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근본주의자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더라도 지적(知的) 영역에서의 접근만을 시도할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성부 하나님)는 미소 짓고, 웃으신다. 그의 유머 감각은 뛰어나다. 하나님은 이러한 대적들을 조롱하신다.
담대함은 하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온다. 자신감으로 충만한 담대함은, 담대함 외의 다른 정신 상태를 ‘빈곤의 정신’(poverty spirit)으로 만들어버린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선지자들은 전쟁을 음미한다. 엘리야는 전쟁 가운데 자기 대적을 조롱했다. 온 교회가 너무도 많은 두려움(경외)을 사단에게 돌리는 반면, 너무도 부족한 존경심을 주님께 드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빛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마음은 그의 찬란함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우리 시야의 초점이 또렷해지며, 인지력 역시 선명해질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광대함에 붙드리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수 있는 일의 광대함을 깨닫고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실로 모든 정사와 권세들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계신다.
회색지대에 머물고 있는 크리스천은 좀처럼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전쟁에 나선다 해도 다른 사람이 시작한 일을 가로챌 뿐이다. 그러나 자신감만은 앞장선다. 회색지대의 언어 속에서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승리주의’(triumphalism:자기 종교의 교리만이 옳다는 주장 일변도-역자주)를 지칭할 뿐이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듯, 평범함은 항상 의심을 동반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는 빛으로부터 달아나길 멈추고, 빛을 향해 엎드린 한 남자의 외침이다.
엘리야는 어둠만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가지 주변에 모여든 회색지대의 거주자들도 대적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가 아니라 ‘온전함’ 가운데 행하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대적은 훔치고, 죽이고, 파멸하기 위해 왔다. 하나님께서 말씀(명령)하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교회는 도적질 당하고 있다. 그러한 교회의 진취성은 좌초되었고, 역경을 이겨내는 능력도 파괴되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그 온전한 빛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풍기는 이미지는 바로 ‘미적지근함’일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깨우기 위해 경종을 울린다. 모든 운동선수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이 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기에서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둠을 가장 두려워하는 크리스천은 어둠(그림자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의 죄를 꾸짖고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길을 걷게 했다면, 이제 우리는 승리에 목마른 성도들을 일으켜야 한다. 갈멜산에서 벌어진 한판승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음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바로 이가 하나님이시다! 너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설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중재자이시기 때문이다. 대신에 선지자들은 사람들 가운데 머물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규명되는 것이 선지자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아가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현실주의자이다.
사실 갈멜산의 한판승부는 시작되기 전에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엘리야는 승리를 얻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었다. 적과 싸움을 벌일 때, 그는 이미 승리의 고지 위에 서 있었다. 그가 올라선 승리의 고지는 바로 ‘하나님의 존전’이다. 당시 백성들이 목격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한 남자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남자(엘리야)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주님과 맺은 친밀함의 관계로부터 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패배는 불가능했다. 이것이 갈멘산 사건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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