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2009

창조론 대 진화론 -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권위 (Authority)

하나님 말씀의 권위 대 인간 의견의 권위
이것이 최우선적인 문제이다. 여타의 문제들은 작거나 크거나 모두 이 문제와 연관된다. 우선, 우리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 말씀은 과연 인간의 의견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측면부터 정립해 둘 필요가 있다. 아래 표는 이 두 화두간에 존재하는 주요한 상충점들을 개관하고 있다.

'인간의 의견' 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우리는 인간의 '기존의' 역사관을 정립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이 기존의 인간 역사관을 옳다고 가르친다. 이 현실을 인정하고, 그 다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 ' 라는 화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창세기 1장에서 11장의 내용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구구하게 많은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 문제의 판단을 돕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기준들을 적용하려한다.

1. 가능한 최고의 번역을 통하여 원문이 뜻하는 일차적이며 솔직하고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를 파악한다.


2. 히브리어 원문이 의도하는 의미에 대한 언어학자들의 압도적 의견일치를 확보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학자들의 의견을 참고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일반화된 세속적인 의견과 원문을 '조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도출하려 기도하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James Barr 교수는 세계의 유수 대학교의 히브리어 교수들 가운데 창세기 1-11장의 저자의 의도가 글이 읽히는바 그대로 단순하고 솔직하였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는 교수는 없다고 썼다. 다시 말해서, 전 지구적인 홍수, 보통 날짜로서의 엿새, 모든 사람들은 참 사람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는 점, 모든 사물의 시작 때부터 기록하는 연대기 (chronology)로서 작성된 가계혈통, 등등.

신약성경도 창세기 초두의 몇 장에 말씀들을 가감 없이 솔직한 이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려 한다. 요컨대, 일반화된 성경외적 세속적 의견을 무시하고, 종교개혁 이후 시기에 있었던 모든 유서 깊은 해설에서 볼 수 있는 바대로, 무엇보다 먼저 성경적인 판단기준만을 사용하려한다.


중요한 불일치 점 (모두 20 여 가지가 넘는다.)
 주제
하나님의 말씀
사람의 의견
출현한 순서
태양 이전에 지구,
물고기 이전에
과일나무

지구 이전에 태양,
과일나무 이전에 물고기

최초의 사람
흙으로부터
직접 만들어짐

이전에 있었던 동물의 후손
창조에 걸린 시간
만물은
6
일 동안 창조됨

모든 것은
광대한 시간에 걸쳐 나타남

죄의 심판으로서
노아의 홍수

전 지구적인 홍수
지역적인 홍수
죽음, 폭력,
고통, 피흘림
(
사람과 동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함

아담 이전에 이미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 존재

사람의 타락과 저주
피조물 모두에게 영향
사람 이전에 이미 수 십억 년 동안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함으로
신음함.(8)

여기에서 기독교인는 다음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

1. 일반화된 세속적인 관념을 포기한다.
2. 성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한다.
3. 인간의 의견과 조화를 기도한다.
 

성경의 무오성 - 성경의 무오성에 관해서 수없이 많은 의견들이 피력되었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대부분 자명하다. 간단히 말해서, 만약 성경이 얼마쯤은 진리를 얼마쯤은 오류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오류인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하나님이나 기독교 또는 예수님에 관해서 무엇을 어떻게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어쩌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명제도 하나의 오류일는지 모른다.

'A는 非A가 될 수 없다' 라는 논리의 기본법칙을 어기면서까지 진리를 '종교적 진리'와 '과학적 진리'로 분리하려는 기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죽은 예수는 몸으로 살아났든가, 아니면 살아나지 않았다. 살육행위가 아담 이전의 세상에도 있었든가, 아니면 없었다. 그리스도는 영적 형태로 즉 실존적으로는 진공형태로 인간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의 장구한 혈통의 일부분으로 치밀히 펼쳐놓은 역사의 구조 속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기독교적 신앙이 신임을 받으려면, Schaeffer가 호칭한 '역사와 우주'의 본질에 관해 성경이 언급하는 대목은 반듯이 진실이 틀림없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일을 말할 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나라의 일을 말할 때 믿을 수 있겠는가? 라고.

참 성경에 대한 신앙은 과학 교본이 진리로 인정하는 계시만을 철저하게 주장하여야 한다는 뜻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본성 (The Nature of God)
이 질문은 '신'이 진화의 기능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였는가 하는 명제이기보다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셨고, 또 심지어 창조하실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명제다.

1. 하나님의 선하심 - 하나님은 창조하시기 위해 죽음과 투쟁을 이용하셨을까? 또 죄가 이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고통의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강자가 약자를 쓸어버리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살육으로 얼룩진 세상을 보시고, 그런 폭력의 정점에 있는 세상과 또한 병고에 찌든 인생살이를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셨을까?

2. 하나님의 진실하심 - 만약 하나님께서 진화의 기능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면, 실질적으로 모든 성경 독자들을 역설적인 인상으로 압도하면서 말씀 중에 사람들을 오도하셨을까?

하나님의 기적 사역의 능력과 지혜.  창세기적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은 복음서의 기적들도 동반해서 부정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다. 만약 어떤 신이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백만 년이라는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인과절차(因果節次)'를 밟아야 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없이 많이 막다른 골목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뒷골목과 마주친다면, 그런 신은 오랜 동안 시신으로 있던 사람을 눈 깜작할 사이에 되살리고, 수천 명이 먹을 수 있는 양의 떡과 물고기를 '無로부터 (ex nihilo)' 창조하고, 지구의 중력을 부정하듯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신은 결코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성경적인 우주의 구조 (The Framework of Biblical Cosmos)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리고 하셨던 세상이 아담의 죄로 인해서 망가졌고 저주를 받아 신음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죄도 죽음도 없는 천국으로 회복될 것이다. 창조/타락/회복이라는 구조는 히브리어나 희랍어 원문의 곡해(曲解)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 구약의 조직을 통하여 상세하게 짜놓은 구조다.


복음서의 논리적 기초 (The Logical Foundations of the Gospel)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진정한 이유는 인간의 타락 (Fall) 때문이다. 최초의 참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죽음이 왔지만, 두 번째 참사람으로 인해서는 죽음에서부터 부활이 왔다. 아담의 죄와 죽음으로의 타락이 없었다면, 왜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하는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거대한 간극을 만들어버린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왜 속죄의 피가 필요하겠는가? 복음서에 대한 설교와 일반화된 세속적 세계관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논리적 모순들은 진화론 사상이 야기한 여러 문제점들에까지 연결된다.


복음주의 (Evangelism)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2)' 이 말씀은 아름다운 말씀이다.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있었던 것으로 (그래서 죄의 응보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은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진화된 원숭이 이라는 것으로, 성경은 출애굽기 20:11 (엿새 동안에 내가 모든 것을 만들었으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분명히 신화적인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으로, 죄를 범하는 행동은 동물을 조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그리고 어쨌거나 이런 말들을 담고 있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임하지 않는 문화에서 위의 말씀은 무슨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호교론 (護敎論, Apologetics)
베드로는 우리들을 보고 '소망을 가져야할 이유' 즉 신앙을 지켜야할 이유를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엄청난 공격으로부터 우리가 꼭 지켜야할 가장 큰 대목은 창세기 내용에 대한 것이다. 창세기는 기원에 대한 책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모든 구조적인 기초를 직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 근거인 이 기초를 파괴하면, 기독교 교리의 구조는 심각하게 약화될 것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바울은 창조설계의 증거가 너무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학교 어린이들은 자연의 설계를 설명하는 데 설계자의 존재가 필요치 않다고 배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이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의 배후에 있는 동력(dynamic)은 모든 사물은 제 나름의 인과법칙과 고유특성을 지니고 존재한다고 설명하려 한다. 창조된 순서대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기적의 간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배 (Worship)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로부터 경배와 영광, 그리로 권세 (power)를 받으실 자격이 있다고 일러준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를 숭배하기 위하여 창조주에 대한 예배를 포기한 자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진화론의 일관된 사상에 의하면 창조에 대한 영광을 받을 자를 '자연' (자연을 창조력으로 보고)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와 윤리 (Society and Ethics)
죄야말로 인류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의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사회에서는 진화론이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데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적나라한 예를 우리는 히틀러 치하의 독일사회를 풍미하던 일관된 진화론 사상에서 보았다. (비록 크리스천 사회에서 있었던 종교재판과 십자군의 잔학행위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세계관은 진화론적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대조적이다).


세계대전 이전의 서방사회의 많은 과학자들조차 정신박약자와 유전병약자들의 제거정책을 '과학적으로 계몽된' 정책이라고 떠받들었던 적이 있었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무법행위 (우리를 소유할 자가 없으니 우리를 지배할 자도 없다), 임신중절 (결국 우리들은 너나없이 모두가 동물이다), 결혼의 파탄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언제나 창세기에 기록된 역사적 근본까지 소급한다), 그리고 더욱 대담하고 노골적인 동성간의 성행위, 이 모든 사회적 병폐들은 반성경적인 세계관으로 우리 젊은이들을 키워온 이 사회가 걷어 들이게된 당연한 결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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