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흥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방문하시기 전에, 사람들의 마음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전제조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위로나 위안이 아니라, 구원을 원해야 합니다. 너무나도 자주, 오늘날의 사역들은 죄를 회개하기 원치않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심령 가운데 애통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런 사역과 중보의 결과로 그들이 약간의 위로와 위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죄와 억압 가운데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구원 사역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분별입니다. 한 영혼이 준비되었는지 또한 그가 자유하기를 바라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했는가?
그들은 우상들을 제거하였는가?
들의 마음이 정말로 하나님께로 돌아섰는가?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그들의 자유케 됨을 위해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받은 교회와 도시를 향해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우리 각자가 애통함으로 도움을 구하며 부르짖을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주님께 기도로 부르짖지 않는한, 우리의 교회들과 도시들을 위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도시 차원에서 교회가 함께 기도하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목적은, 바로 전능자이신 주님이 반응하시기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부르짖는 기초공사 없이는, 구원, “매고 푸는 일(마태18:18)”, 그리고 기타 여러 형태의 영적전쟁은 심각하게 제한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자신의(죄악된 - 역자주) 현재상태를 혐오하게 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어 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구원은 가장 마지막 단계에 해당합니다.
구속자들(구원자들)
구약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속의 형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고통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은 구속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권능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구속자들의 업적은 결코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개인적인 가치에 기반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방식은 각각 서로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이스라엘이 회개할때 그들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때, 구원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사명과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구약에서 보여진 회복의 패턴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물론 깊은 회개와 기도가 널리 확산된 어떤 도시에서 부흥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가 실제적인 "구원자"를 보게 되는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미 궁극적인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이스라엘에게 모세나 사사가 보내진 것과 같은 "구원자"를 우리가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미로 보임 - 역자주)
다시 이스라엘을 봅시다. 국가적인 범죄는 패배, 그리고 이방 나라의 속국이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방나라의 속국이 됨으로 인해 사단을 경배하는 일이 들어오고, 이스라엘은 원수에게 꾀임을 받아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할때, 경제와 문화, 그리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국가의 붕괴가 초래되었습니다. 한때 하나님의 축복을 향유했던 땅에 이제는 절망과 비참함이 깊이 드리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한 고통 중에 백성들이 진정으로 통회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을때, 바로 그때 하나님은 구원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그때 보내심 받은 구원자들이 회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지도하여, 압제자들에게서 승리를 이끌어 냈던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가 다시 세워졌을때, 국가적인 평화와 번영이 따라왔습니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회복의 과정이 어떤 미리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복의 스케쥴은 정확하게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수준까지 우리의 심령을 깊이 파내려간 시점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은 항상 우리의 예상보다는 더 오래 걸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자복하고 주님께로 돌이킬때, 주님이 회복을 결정하십니다. 일단 한 나라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확실히 돌아섰을때, 그 땅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느헤미야는 국가적인 차원의 구속 전에 회개가 나타나는 이런 패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느9:27)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서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이러한 회복의 과정을 서두르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한 나라의 백성들이 더이상 반역의 영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준까지 깨뜨려지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수준의 국가적 반응이 나오도록 하게끔 하는 첫 열매는 바로 우리의 중보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중보기도가 씨앗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의 회개가 일어나며, 이것을 통해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 역자주).
때때로 영적인 혼란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국가의 회복 내지 부흥이 있기 전에, 온 나라가 주님께 부르짖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환란의 시기”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온 나라가 하나님께 수년간 부르짖기 전에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회복은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고난, 하나님의 마음
사사기를 보면, 이러한 패턴이 되풀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죄에 더 깊이 빠져들때, 하나님은 그 죄의 부담과 그로 인한 열매가 그들의 영혼을 겸손케 만들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스라엘의 슬픔에 냉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반역할 때에도, 주님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러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비참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실 때”(삿 10:16 ),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비참함과 절망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앞에서 준비되도록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모세와 대면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구속자가 말씀하시기를“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아왔다.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기에 그 간역자들로 인해 울부짖는 것에 주목해 왔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다.“(출 3:7 -8)
주님이 그 백성의 고통을 보셨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곤경에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근심이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우리의 고통이 그분의 슬픔이 됩니다.
출애굽기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단지 그들의 기도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주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셨습니다.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기도의 한 측면이라면, 또한 그 필요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 역시 기도의 또다른 한 측면입니다. 애통하는 자를 주님은 위로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의 곤고함과 고통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반응하시는 기도는 오늘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곤고함과 고통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울부짖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충분히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안락한 스케쥴 안에서 절박함 없이 기도하기때문일지도 모릅니다. 1970년대의 카리스마적 (오순절)부흥때 나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지속되었던 백만 어머니들의 울부짖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부흥은 단지 “기도의 시간”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약과 반역에 사로잡힌 자녀들에 대한 깊은 근심 가운데, 주님께 끊임없이 부르짖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에게서 부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종교적인 훈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서 울려나오는 심장의 고동소리였습니다. 영적 전투라는 정교한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들의 끊임없는 눈물과 간구의 중보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녀들을 구출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서 회복과 부흥을 지연시키는 것은, 우리가 사회의 현상황들을 걱정은 할지언정 고통스러워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슬퍼는 할지언정, 여전히 이런 문제들을 놓고 울고 있지 않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민감해지고 바로 반응하는 일에 진정으로 자신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필요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서 중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평판과 직장을 내려놓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회의 죄를 깨끗게 하심을 보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까지 내려놓습니다.
비록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이러한 중보자들이 그들의 도시에 대한 고통을 자신들의 영 가운데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억눌린 자들의 울음을 듣습니다. 그들은 태어난 자와 태어나지 못한 자들의 고통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기꺼이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들의 영적인 자궁이 겪는 산고를 통해서, 하나님은 구속을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중보에 바치는 시간을 제한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잠깐씩 이벤트성으로 기도하는-역자주) '기도의 계절'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바쳐진 삶'을 찾고 계십니다. 변화를 가져오데 요구되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서 우리가 기도하는 일을 멈추게 된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심령이 중보를 통해 주님의 개입을 이끌어 낼만큼 깊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이 모든 것이 부흥과 연관될까요? 영적인 회복만이 우리 도시와 나라를 위한 해독제입니다. 영적회복과 부흥이야말로 끊임없이 간구하며 주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주님, 구원이 아니라 위로를 원하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당신의 온전한 뜻이 아니라 지름길을 찾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주님, 우리는 당신이 고통중에 울부짖는
진정한 간구를 거절하지 않으심을 압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비참함을 오래 참으시지 못하시어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당신의 임재의 비를 우리에게 다시 보내 주시옵소서!
안일함을 구하는 우리의 정욕과,
우리의 무정함으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소서.
당신의 성실하심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한 장소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땅을 회복시키소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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