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2010

왕같은 제사장 (Jesus Army 이용희 교수님)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열납되는 제사가 있고, 열납되는 기도가 있다. 열납되지 않는 제사가 있고, 열납되지 않는 기도가 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다. 아벨과 그의 제사는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한다.제사 앞에 사람 이름이 나온다. 인격, , 그 사람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건축헌금을 드릴 수 있다. 이용희이용희가 낸 헌금을 받으신다. 그런데 어떨 때는 많은 헌금을 해도 이용희이용희가 낸 헌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실 수 있다. 우리는 헌금함에 돈을 집어넣는데, 받으시는 것이 있고 받지 않으시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드리는 사람의 삶을 보신다는 것이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나도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두렵고 떨리지만, 우리 기도자들, 기도운동을 한다는 우리들이 이 부분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제물을 드리려다가 누구에게 원망 받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두고 화친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누가 우리에게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열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헌금만 많이 드리면 된다? 그것은 영적인 원리로 볼 때 맞지 않는 것이다. 헌금의 많은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제사는 단순히 헌물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원을 포함한다. 제사에는 목적이 있다. 기도가 열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내놓고 팔다가 밤에 중요한 것만 안에 들이고, 어떤 물건에는 거적 같은 것을 씌워놓는다. 그런데 한 사람이 새벽기도를 갔다 오다가 거적을 들추어 계란 한 판을 들고 간 것이다. 동네 다른 분이 보고 아침에 가게 주인에게 일렀다.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집에 찾아가서 언제까지 값을 치르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돈을 안 갖다줬다. 화가 나서 경찰에 신고했다. 계란 한 판이지만 절도 죄이다.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이 변호하고 도와주었다.

“이 아주머니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1억원을 우리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그게 신문에 다 나왔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 아주머니의 논리로는 세상에서는 계란 같은 거 훔쳐도 되고, 교회에 많이 헌금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창세기 4장의 논리대로 본다면 이 삶과 헌금은 열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극복할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하나님께만 교회에만 헌금 많이 하면 그게 다인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상급 받기 위해 헌금한다고 한다면 정말 잘 알고 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힘껏 일했는데 ‘나는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네가 드린 것 때문에 상처 받았다. 나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라고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제사를 받으시고, 어떤 예배를 받으시고, 어떤 헌금을 받으시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기도를 많이 하면 신통력은 반드시 풀어진다. 그런데 말씀 없이 기도가 풀어지면 능력은 향방이 없게 된다. 기도를 많이 해서 영력은 있고 뭔가 보는데 인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있다. 하나님 닮지 않은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도 보면 무당이 인형에 바늘을 꽂는다. 그러면 정말 상대방이 아프다. 사탄의 영성에 대한 책을 보니 주술하는 원주민의 영이 짐승에게 들어가서 미워하는 집을 짐승이 공격하게 하고 다시 빠져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사람이 저주하면 사람이 즉사한다. 능력이 막 나간다. 영적인 것은 능력을 구하면 얻게 된다. 그런데 능력의 방향성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능력의 행사일 수 있다.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96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집 근처 대형교회에 자주 가서 기도를 했다. 강대상 앞에 양탄자가 깔려있는데, 거기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늘 기도하며 교회에서 주무시던 한 권사님이 계셨는데, 하루는 밤에 기도하는 나를 붙잡고 물으셨다.
“청년은 몇 구역이야?
“저는 이 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 아니면 앞자리 와서 기도하면 안 되지.
나는 상처 받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 일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데 초신자나 다른 사람 같으면 상처 받겠더라.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인데, 이웃에 대한 배려가 기도와 함께 가지 못한 것이다.

기도자들이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장시간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해서 영적인 것을 많이 보고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크게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삶과 제사를 받으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써 드리는 기도와 헌금이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이지, 이익을 위해 의지를 가지고 잘못을 행하면서, 그렇게 드린 1억원이라는 헌금이 열납되겠는가? 교회에서 헌금과 기도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성경이 이야기하는 제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70년대 초에 윤리 선생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공장장이 교회에 1억원을 헌금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너무 큰 돈이라 목사님이 공장에 방문했다. 그런데 공장 직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그 당시 열악한 곳은 열악한 때였다. 너무나 근무환경이 열악했다. 월급도 인색하고... 공장장실로 들어가다가 파업 일으킨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서 다시 돌아가 돈을 찾아와서 공장장에게 돌려드렸다.

“교회에 헌금하지 마시고, 여기 직원들에게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웃 앞에 나아갈 때는 물질관계를 합당치 않게 하는 경우가 있다. 잘 생각할 부분이다.

내가 기도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우리 단체의 이름 자체가 기도운동인데, 기도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있을 때, 마땅히 기도도 중요하지만 기도에 선행될 것이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방향성 있는 올바른 말씀과 기도를 올려드리기 위해서, 올바른 삶으로 드려지는 기도가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말씀을 읽으면 안 된다. 말씀이 여러분들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이해가 되는가? 느헤미야서에서도 봤지만, 에스라가 말씀을 읽을 때 사람들이 들으며 막 울었다. 말씀과 맞지 않는 삶이 비춰질 때 마음이 아파서 우는 것이다. 말씀이 우리의 삶과 생각과 인격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 앞에서 내 마음, 생각, 잘못된 동기 등이 드러나고 잘라지고 쪼개져야 한다. 말씀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수술 받는 자와 같아야 한다. 영혼의 암 덩어리 같은 것이 잘라져 나가야 한다. 말씀을 읽을 때는 아파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 열납되기 위해서는 삶과 함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 제사는 제물과 기도로 볼 수 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제물을 드렸다. 그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삶을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기 위해 첫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읽어 내려가야 한다. 나의 삶, 내 생각, 심중의 모든 계획과 의중들이 읽혀져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하고,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 및 골수가 찔러 쪼개져야 한다. 내 마음, 생각과 뜻이 하나님 앞에 펼쳐져야 한다.

두 번째로는 말씀이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 무엇을 기도하는가? 자기의 욕심을 위해 기도하는가? 내가 읽은 이 말씀이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게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내가 읽은 말씀,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 그 말씀이 나의 삶으로 풀어지도록 내가 읽은 말씀이 기도여야 한다.

내가 기도운동을 하면서 많은 기도자들을 보며 느낀 것이, 많이 기도하는 것보다도 삶이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읽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 발버둥치면 그게 기도의 삶이다무당 같은 사람들을 참 많이 봤다.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렵다아무리 방언하고 예언을 많이 하면 무슨 의미인가? 말씀이 나를 읽어 내려가야 한다. 그 말씀을 붙잡고, 지키기 위해 결단하고 치열하게 처절하게 씨름하고 아파하고 버릴 것들을 버리고 끊을 것들을 끊고...... 그와 같은 삶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서 많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이 기도여야 하고, 우리를 비춘 그 말씀이 나의 삶이 되도록 처절하게 그 말씀을 붙잡고 삶으로 기도해나가는 치열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중을 아시므로 생각만 해도 응답하신다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처럼, 하늘과 하나님을 움직이는, 삶으로 기도하는 기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려 하실 때 모세가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이지만 막아서면 하나님도 꼼짝하실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삶의 기도자가 이 땅에 필요하다.

그리고 기도자들은 입술의 말을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말을 참 잘 해야 한다. 나도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조심하는데, 영적으로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쓸데없는 말이 나온다.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영이 반영된다. 그 사람 말에서 영성이 나온다. 그 사람의 농담 수준이 영적인 수준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농담할 때라도 그 말에서 영적인 상황들이 진단된다. 기도자들은 특별히 일상의 모든 삶 가운데서 말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잘 감당해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사무엘을 아주 존경한다. 평생 입술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그가 고백한다. 그가 말하면 그 말은 유실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단상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사무엘을 보며 정말 마음으로 존경하고 부러워한다사무엘은 허튼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에 따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자의대로 말했다면 성취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 성취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평생 기도자였는데 평생 입술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우리 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마음이 업될 때 기도제목이 커졌다가 다운될 때는 기도제목이 가라앉고 그러면 안 된다. 입술의 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말을 성령의 감동대로 하고, 상황이 맞지 않아도 일관성 있게 붙잡고 나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도 자의로 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할 것과 이를 것(영어성경에 보면 ‘what to say and how to say)을 명령해 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씀을 보면서 생각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을 독사의 새끼라고 했지만 그런 것도 하나님이 주신 책망을 입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바로 무엇을 말할지 들어서 받고 전하는 것이다.

입술의 말에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한 외국인 사역자가 와서 한국 사람들이 약속을 10%도 안 지킨다고 하더라. 어떤 사역에 합의하고 헌금하기로 했는데 실제 결과를 보니 10%도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콜링을 많이 하는데,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격앙되어 지키지 못할 헌신을 할까봐 걱정이 된다. 나도 대학교 2학년 때 헌신했는데, 생명 걸고 지켜야 하는 줄로 알았다. 시대를 살며 느끼는 것은,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헌신한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말과 약속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다너무 말이 많아진 세상이고,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고도 마음에 평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한 번 결정하고 약정하고 헌신하면 손해가 될지라도 지켜야 한다. 나는 이 시대가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시대인 것 같다. 생각 없이, 책임 없이 말하고 사는 것이다.

말이 우리를 붙잡는다. 우리가 잊고 지키지 않아도 우리의 말이 영혼으로 값을 치르게 한다. 말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말이 우리를 심판한다고 한다. 영안이 열리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 혼동의 많은 부분이 책임 없이 내뱉은 말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영적인 세계를 알면 말을 조심하게 되어 있다. 말을 막하는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가 한 많은 말들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를 다 심판하고 책임지게 하고. 그래서 영적인 사람들은 말을 조심하게 되어 있다. 우리들이 말을 책임 있게 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다보면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책임 안 지고 말하는 것이 몸에 배니 기분에 따라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한다. 그 말이 나를 심판할 줄 알고, 내 인생을 주장할 줄 안다면 말을 상당히 조심할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월요기도모임을 인도하다가 2006년 7월 7에 7000에스더 콜링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구국성회를 큰 단체가 맡을 줄 알았다. 그때는 월요기도모임이 20-30명 참석하는 작은 모임이었다. 신촌24시기도의집을 세워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Again 1907' 팀과 같이 철야하던 중에, 한 기도자로부터 7000명이 연초에 에스더처럼 3일 먹지도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회개함으로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어떤 그룹이 담당하고, 우리는 섬기고 돕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비전을 받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더라. 그래서 내가 나갔다.

10 14일 날 키세스어학원 건물의 작은 방을 얻어 사무실을 오픈했다. 그때부터 단식성회 준비에 들어갔다. 7000명이 모일 택이 없었다. 1 4,5,6일 오산리기도원을 빌린 것도 기적이었다. 알려지지도 않은 조그만 모임인데...... 기도원 원장님께서 만나주시지도 않는데 쳐들어갔다. 왜 예약도 안하고 왔냐고 하더라. 예약도 안 잡아주니까 그냥 왔다고 했다. 안계시다고, 바쁘다고 하셔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원장님이 기도제목을 보시더니 감동을 받으셨다. 국가를 위해 젊은이들이 기도하냐고 귀히 여기셨다. 그분도 국가를 많이 걱정하는 분이셨다. "내가 오너라면 1,2,3일을 빌려주겠지만 최대한 배려한 것이 4,5,6일이다." 라고 해서 빌려주신 것이다. 그것도 기적이었다.

1차 등록 마감이 12 27일이었다. 그때까지 100명 조금 넘게 등록했다. 여러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데, 스탭들이 보기에는 빚더미에 오를 것 같았다. 3일 장소비용만 7천만원이었다. 홍보니 뭐니 다른 데도 돈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한번은 스탭들이 이름표를 사왔는데 수상하더라. 몇 장 샀냐고 물어보니까 5천장을 사왔다고 하더라. 나는 길길이 뛰었다. 7천명 오라고 기도해놓고 왜 5천장 샀냐고. 빚 덜 지게 하려고 그랬단다. 당장 가서 7천장 사라고 했다. 7천명 기도했으면 그렇게 준비해야 한다. 정 안 올 것 같으면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목표를 바꿉니다. 1000명 오도록 기도할 겁니다." 앞에서는 7천명 오게 해 달라고 막 기도하고 실제로는 안 올 것 같으니까 2천명 분을 준비하는 것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기도는 주님께서 받지 않으실 것이다.
말한 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특별히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이 말한 대로 살지 않으면 누구더러 자기 말대로 따르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가지고 살아나갈 때 굉장히 중요한 것이, 안팎이 일치되는 것이다. 안 될 것 같은 것을 무지막지하게 끝끝내 고집하다가 손해 보라는 말이 아니다. 입술의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7천명이 끝까지 기도할 제목이면 준비도 거기 맞추는 것이고, 조정할 때는 말도 바꾸고 삶도 거기 같이 조정해야 한다. 말과 삶이 따로 가면 안 되고,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준비가 따로 가면 안 된다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앞에서는 "50억 모금합시다." 라고 하면서 "50억 외쳐야 5억 들어옵니다." 라고 뒤에서 말한다면 믿음의 사역이 아니다.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금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 양식을 나누고 거지를 집에 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헐벗은 자를 보면 내 옷을 벗어 입힌다. 또 골육들이 찾아올 때 누군가 학비를 못 낸다고 찾아올 때 피하지 않고, 도움을 청하는 전화가 올 때 안 받지 않고 삶으로 맞아들이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췰 것이며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공의가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호위하리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묵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남을 돕는 삶을 살고 마땅히 할 일을 정의롭게 하면 그때는 우리가 부를 때 응답하신다. 왜 응답하지 않으시냐고 장시간 금식하고 소나무 뽑지 않아도 못 먹은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고, 못 입는 사람에게 옷을 나누고, 어려운 자들을 피하지 않으면 여기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부를 때 주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북한 동포들에 대해서도 한국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다. 응답 안 된다고 뭐 그렇게 아우성칠 필요 없다. 의롭게 나누는 삶을 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40일 금식해서 신통력이 나가고 그런 것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올바르게 사는 사람을 보면 고개가 숙여진다. 하나님께 축복 받고, 물가에 심긴 나무같이 살고, 항상 물이 대어진 동산 같으려면 주린 자에게 마음을 주며 나누고 위로하고 감싸면 된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것이 늘 부족함 없고, 늘 푸르고, 늘 물댄동산 같을 것이다. 우리는 삶의 원칙을 성경의 원칙에 맞추어 바르게 해야 한다. 잘 살겠다고 아등바등할 때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괴로운 사람 심정 만족케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실 것이다.

선다싱 이야기를 자주 한다. 친구와 함께 눈이 덮인 히말라야 산길을 가다보니 얼어 죽어가는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같이 데리고 가자고 했더니 친구는 '우리도 죽겠는데 어떻게 데리고 가냐'고 거절하며 혼자 먼저 갔다. 선다싱은 쓰러진 사람을 업고 낑낑거리며 간다. 힘들어서 땀이 나고 뜨거워져 그 열기에 사람이 깨어나고 정신을 차려 함께 간다. 목적지에 다 가서 보니 혼자 살겠다고 앞서 간 친구가 얼어 죽어있었다.

우리는 죽어서 사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는다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원리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기 원하면 죽고자 해야 한다. 예수님도 정말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았는가?
부르짖을 때 주님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자의 삶이 여기 나온 것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자는 물질을 나누는 자여야 한다. 그리고 괴로운 자의 심정을 정말 돌보아 주는 자여야 한다. 우리 삶이 실제적으로 구제와 정의와 나눔으로 이어질 때 그런 삶이 바로 기도이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벧전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왕은 아니지만 왕 같은 사람이다. 제사장은 공동체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 제사장 때문에 공동체가 사는 것이다.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제사장을 통해 해결된다.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역할을 한다.

스스로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때문에 이 민족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는가?
실제로 그렇게 여김 받는 자인가?

군에 있을 때 첫 번 군종 수련회에서 군종참모가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사병이지만 영적으로는 지휘관입니다. 사고가 나면 지휘관 책임이 아니라 여러분 책임입니다." 그 말씀이 나에게 레마로 부딪혔다. 최전방에서 사고가 많았다. 하루에 생명수당을 100원씩 받았다. 지뢰가 많았고 죽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경우 월북하는 사람도 있었다. 옛날 군대 이야기이다. 내가 졸병이었는데 어느날 하사관 한 명이 자폭해서 죽었다. 애인이 변심했는데 휴가도 안 되고 너무 힘들어서 자살한 것이다. 내가 대대장실로 올라갔다. 무릎 꿇고 정말 잘못했다고 했다. 그 분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기도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어설프게 했을 것이다. 용서를 빌었다. 다음에 한 사람이 탈영했다. 또 올라가서 사죄했다. 그때는 기독교인 대대장님이셨다. 사고가 나면 정말 내 기도의 책임인 줄 알았다.

집에서 내가 막내였다. 안 믿는 집 맏며느리로 어머니가 시집 오셔서 새벽기도 다니며 어렵게 신앙생활 하셨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 어머니 혼자 받으시던 핍박을 나도 함께 받게 되었다. 의대 다니는 형님이 놀기 좋아해서 8년 만에 졸업하셨다. (지금은 훌륭한 신앙인이시다.) 아버지는 5분대기조였다. 사고 나면 경찰에 가서 빼오기 위해. 금식할 때 내가 제일 기도 많이 한 것이 아버지와 형을 위해서였다. 막내지만 내가 가족을 막아서는 자라고 생각했다.

공동체가 자기 때문에 영적으로 보호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 총장님이나 직장 상사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이다.(딤전2:1-4) 속한 공동체의 왕 같은 제사장이 되기 바란다. 여러분이 영적인 커버링이다. 여러분이 예배할 때는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이화여대 다락방전도협회에서 농촌전도를 다니면서 자연스레 배운 것은 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를 위해 중보하는 것이었다. 농촌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많으니 집회에 초청한다. 대장목사님이 설교하시면 내가 모시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 힘든 농사일 하다 오셨으니 졸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목사님 설교하시는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 있게 역사하셔서 꼭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예배 중에 눈뜨고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 설교가 끝나고 결신을 받을 때는 내가 모시고 온 분들이 주님을 영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근두근...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다. 예배가 끝나면 녹초가 될 정도였다. 예배하면서 설교자와 내가 전도한 사람을 놓고 계속 기도했다. 그게 결국 예배의 중보자가 되는 하나의 훈련이었다.

여러분 영이 살아 예배를 파수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함께 깊은 예배 가운데 들어가고, 설교와 찬양에 기름부으심이 있도록. 여러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예배 때 큰 차이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이 그 공동체의 커버링이 되어야 한다. 있으나마나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 때문에 공동체가 복을 받는다. 임재와 함께 기름부으심이 풀어진다.

청년 Jesus Army 가운데에도 왕 같은 제사장의 기름부음이 풀어져야 한다. 여기 오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예배의 기름부으심이 풀어져야 한다. 여러분 때문에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축복을 받는 일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기도자여야 한다. 우리 삶이 기도여야 한다. 우리가 읽는 말씀이 기도여야 한다. 자의대로 말하지 않고,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성령의 감동에 따라 말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금식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삶에서 무르익어갈 때 성숙한 기도자로 세워질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영적인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풀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기도자이시다. 세상에서도 기도자로 사셨고,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신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그와 같이 참된 중보자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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