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2009

믿음의 은사3

믿음의 은사
1. 말씀과 성령
그렇다고 병든 모든 사람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간다고 해서 병이 나을까?

우리는 여기서 중대한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일단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그러면 해긴 목사는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한 결과 병이 나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는가? (물론 일부 나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해긴 목사가 나은 것은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개별적, 구체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아무리 붙잡고 믿어도 낫지 않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말씀이 해긴 목사에게는 개별화, 구체화되었지만 치유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지 뮐러는 고아를 돌보라는 야고보서 1:27의 말씀에 감동되어 평생 고아를 돌보는 사역에 종사했다. 조지 뮐러 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읽었을텐대 왜 굳이 그 사람만 고아 사역에 종사했을까?

물론 감동이 와도 순종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 구절을 읽을 때 ", 고아를 돌보아야 되겠구나"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을 평생 사역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한 조지 뮐러는 왜 과부는 놓아두고 고아에만 관심을() 가졌을까? 같은 구절에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말이다. 이것은 "고아"라는 말씀이 조지 뮐러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2. 믿음의 은사-성령의 감동과 조명
개혁, 보수 신학에서는 정확 무오한 성경 말씀을 기록한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감동 (inspirat ion)5)(딤후 3:16; 벧후 1:21)이라 하고,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해주는 성령의 사역을 성령의 비침 또는 조명(illumination)(고전 2:10, 14)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성령의 감동(전문적인 의미)으로 기록되었다고 해서 말씀 그 자체가 우리의 마음에 항상 감동이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을 주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때에 따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씀을 일캐워주고 깨닫게 해주신다.

또한 감동을 받고 깨달은 말씀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강하게 와닿는 말씀이 있다. 필자는 이것은 비록 성령이 동일한 말씀을 조명하지만 정도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삼천 명이나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2:4, 41). 그러나 논리적으로 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은 고작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17:22-34).

이것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증명이 된다.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이미 알던 내용도 새삼 새로워지고 은혜가 되고 믿음이 팍팍 생기는 것같은데 또 어떤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 도대체 감동이 오지 않고 냉랭한 때가 있다. 설교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어떤 말씀이 갑자기 감동을 불러일으켜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다.6)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첫째 설교자의 경우, 그 사람이 말씀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기도 많이 하고, 바른 삶을 살면서 성령 충만을 받아서 설교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신학교 다닐 때 장로교의 어떤 미국 목사가 설교세미나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기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일주 내내 준비해도 교인이 50명밖에 되지 않는데 어느 오순절교회의 목사는 토요일에 잠시 기도하면서 설교를 준비해도 교인이 수천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뭘까?

바른 성경 해석과 명쾌한 논리 위에 성령의 불이 타오를 때 능력 있는 설교, 감동 주는 설교가 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불타는 논리"(logic in fire)라고 불렀다. 조지 휫필드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말씀을 묵상할 때 특별히 감동을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때, 그 장소에서, 그 사람 개인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을 제공하시는 것이다. 감동된 그 말씀을 통해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권면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소망을 주시고, 때로는 능력을 주시고, 때로는 앞 길을 인도해 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설교,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와닿는 말씀은 당사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은혜를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말씀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들어쓰실 때에만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말씀이 되어( 4:12), 듣는 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필자도 설교에 관한 책을 다소 보았지만 설교를 위한 성경 해석, 구성, 수사학, 서론 본론 및 결론과 예화의 사용 등과 같은 설교술(homiletics)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 있게 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외에는 보지를 못했다.

그러면 도대체 말씀과 성령의 관계는 어떠한가? 전통적으로 루터교 신학자들은 "성령은 성경을 통하시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다. 언제든지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만 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차영배 박사는 [성령론]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성령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은 수단을 말하는데, 성령이 역사할 때 이 말씀을 칼로 사용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항상 이 칼을 가지고 일을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말씀이 없이도 성령이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어도 성령이 일을 할 수는 있지만 대개는 보편적으로, 정상적으로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통로로 해서만 일한다는 루터교와는 다른 것입니다. 루터교는 말씀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처럼 가르쳤지만 칼빈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자동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권적으로 주인이 되셔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친히 우리에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전통적인 칼빈주의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것이 오해되어서 성경지상주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성경지상주의라는 말은 Sola Scriptura에서 나온 말이지만 결코 성령을 제외하고는 성경만으로 일을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 . .

우리는 중생이나 모든 교리를 그릇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무시해 버림으로써 신비주의로 빠지거나 또는 성경말씀을 지나치게 절대화시켜서 율법주의 혹은 지성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을 배격해야 합니다. . . .

라트만이라는 칼빈주의자는 "외적인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더 이상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 .

이제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한다면 성령이 주인이 되어 성경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7절을 보면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제 3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성경과 성령에 관하여 고찰해 본 것은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기록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말씀과 성령과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성령이 주인이 되어서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검입니다. 우리 목사의 검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 목사님들이 주인이 되어서 또는 신학자가 주인이 되어서 이 성경을 난도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성령이 주인이 되어서, 성령께서 이 말씀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양보해야 됩니다.

우리가 나의 지성적인 머리로 첫째, 둘째, 셋째하여 조직적으로 설교를 잘 작성하지만, 그것이 교인들의 마음을 현혹케하고 성령의 사역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첫째, 둘째, 셋째도 없애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여 찾아오셔서 당신의 방법으로 역사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방면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잘 앎으로써 믿음이 자란다. 또 설교 말씀을 정기적으로 들으면서 믿음이 자란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많은 물이 땅에 떨어지지만 콩나물이 자라는 것같이 말씀에 많이 접하면 신앙도 자라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말씀 묵상이나 설교 말씀 모두가 한꺼번에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 특별 나게 부딪치는 말씀이 있다. 그 말씀은 한 단어일 수도 있고, 한 문장일 수도 있고,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다.

이 말씀이 바로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자 성령의 검 즉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말씀이다.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유독 그 단어, 그 문장, 그 개념만이 마음을 뜨겁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킬까? 그것은 성령께서 특별히 그 말씀을 풀어서 그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셨기 때문이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4:32).

해긴 목사는 기록된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하여 불치의 병이 나았고 조지 뮐러는 그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임해서 평생 그 사역에 종사했다고 할 수 있다.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내 마음에 강렬하게 부딪칠 때 나에게 초자연적인 믿음이 일어난다. 비록 성경에 기록된 약속이라 하더라도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는 실제화,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는 말씀 보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많이 접하고 심령에 말씀을 많이 저장해 놓고 있어야 성령이 원하실 때 들어쓰실 수가 있다.

둘째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 복종시키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에 순종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록 감동된 말씀이 더 많이 들린다. 하나님은 이미 받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이상 감동 주기를 꺼리신다.

셋째 늘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예언과 같이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령께서 이미 개별화, 구체화시키신 말씀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필자가 기독교 문서선교 사역에 종사할 때,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이 많아서, 포기하려고 마음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은 그때마다 환상과 말씀으로 "그 신문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맛있는 꼴을 먹고 있는 줄 아느냐? 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도처에 뿌려진 씨앗이 얼마나 많은 싹을 내고 있는 줄 아느냐?"라는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을 듣자 갑자기 회의와 의심이 가시고 ",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이 사역은 계속 해야 되겠구나"하는 강한 믿음이 나에게 생겼다. 직접 주시는 약속의 말씀은 이처럼 환경을 뛰어넘는 강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어디서 이런 비전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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