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병이 즉각적으로 치유되어야 하는가? 오늘날의 기적행하는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기적종식론자들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모든 병을 즉각적으로 치유하셨는데 오늘날의 은사자들의 경우를 보면 즉각 치유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치유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신유의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진흙에 침을 발라서 두 단계에 걸쳐 치유하신 것은(막 8:22-26), 한 단계 한 단계가 완전한 치유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두 단계의 치유가 완전한 치유를 향한 단계라면 세 단계, 네 단계의 치유 또한 완전한 치유를 향한 단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비판자들은 이런 식으로 병이 치유되는 것은 은사 때문이라기보다는 플레스보 효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플레스보 효과란 병자에게 이것이 치유약이라고 하면서 약이 아닌 어떤 것을 주어도 믿고 먹으면 병이 치유되는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즉 기도했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니까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불신자가 기도하는 신자에게 "그것을 어떻게 기도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요." 기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것은 우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런 우연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하지 않을 때보다 우연히(?) 치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병과 같은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르므로 인간의 힘으로 나으려고 하기보다는 인내로 참는 것이 성경적이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신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단다.
과연 그럴까? 병이 왜 생겼는가? 직접적인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긍극적인 원인은 원죄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속죄사역에는 당연히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질병으로부터의 구속도 포함되어있다. 만일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불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묻고 싶다. 만일 본인이나 사랑하는 가족이 질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으면 "아.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증거야. 사도 바울을 봐. 그는 육신의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니은 '내 능력이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어. 그러므로 너도(당신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고통을 참아야 해"라고 했을까?
2. 신유의 은사-치유의 효과 - 극적인 치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사실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베드로가 성전에 앉은 앉은뱅이를 치유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단 한번의 치유로 오천명의 결신자를 내었다(행 3:1-4:4).
치유와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 4:23-25).
병도 낫고 말씀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눅 5:15).
피터 와그너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마음 문을 열고 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신유를 강조한 빈야드 교회의 존 윔버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성경에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을 믿고 교회에서 신유를 강조하고 그 자신도 병자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유의 역사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유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개월 째, 교인 중 어느 자매가 병이 심해 심방을 갔다. 윔버는 그녀를 위해 기도한 후 혹시나 치유되지 않을까봐 남편에게 변명을 했다. 남편은 침대에 누운 아내를 바라보고 윔버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윔버는 기도한다고 병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혹시 치유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변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윔버도 웬일인가 해서 돌아보았더니 그의 아내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윔버의 사역은 소위 말하는 능력 사역으로 바뀌어졌다.
비록 병자를 위해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해도 기도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용기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물론 훈련되거나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은사를 전수 받으면 더 자주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자 마음가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진흙에 침을 발라서 두 단계에 걸쳐 치유하신 것은(막 8:22-26), 한 단계 한 단계가 완전한 치유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반문하고 싶다. 두 단계의 치유가 완전한 치유를 향한 단계라면 세 단계, 네 단계의 치유 또한 완전한 치유를 향한 단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비판자들은 이런 식으로 병이 치유되는 것은 은사 때문이라기보다는 플레스보 효과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플레스보 효과란 병자에게 이것이 치유약이라고 하면서 약이 아닌 어떤 것을 주어도 믿고 먹으면 병이 치유되는 경우도 있음을 말한다. 즉 기도했다고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니까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불신자가 기도하는 신자에게 "그것을 어떻게 기도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요." 기도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것은 우연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런 우연한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다. 병자를 위해 기도하면 하지 않을 때보다 우연히(?) 치유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병과 같은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일지도 모르므로 인간의 힘으로 나으려고 하기보다는 인내로 참는 것이 성경적이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신유는 포함되어 있지 않단다.
과연 그럴까? 병이 왜 생겼는가? 직접적인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긍극적인 원인은 원죄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속죄사역에는 당연히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질병으로부터의 구속도 포함되어있다. 만일 이런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불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묻고 싶다. 만일 본인이나 사랑하는 가족이 질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으면 "아.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증거야. 사도 바울을 봐. 그는 육신의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니은 '내 능력이 네게 족하도다'라고 하셨어. 그러므로 너도(당신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고통을 참아야 해"라고 했을까?
2. 신유의 은사-치유의 효과 - 극적인 치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게 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사실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듣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베드로가 성전에 앉은 앉은뱅이를 치유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단 한번의 치유로 오천명의 결신자를 내었다(행 3:1-4:4).
치유와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 4:23-25).
병도 낫고 말씀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눅 5:15).
피터 와그너 교수는 전세계적으로 오순절교단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주요 요인은 신유의 은사 덕분이라고 분석한다. 오순절주의자들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보수주의자들이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런 저런 신학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마음 문을 열고 하면 된다.
많은 사람들은 혹시 내가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다.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다. 신유를 강조한 빈야드 교회의 존 윔버 목사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성경에 병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을 믿고 교회에서 신유를 강조하고 그 자신도 병자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신유의 역사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유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개월 째, 교인 중 어느 자매가 병이 심해 심방을 갔다. 윔버는 그녀를 위해 기도한 후 혹시나 치유되지 않을까봐 남편에게 변명을 했다. 남편은 침대에 누운 아내를 바라보고 윔버는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윔버는 기도한다고 병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혹시 치유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변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윔버도 웬일인가 해서 돌아보았더니 그의 아내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윔버의 사역은 소위 말하는 능력 사역으로 바뀌어졌다.
비록 병자를 위해 기도하여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해도 기도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용기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물론 훈련되거나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은사를 전수 받으면 더 자주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자 마음가짐이다.
또한 치유나 축사의 유익은 그런 것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실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예수를 잘 모르는 불신자나 선교의 현장에서 말로만 예수를 전하면 복음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때 병도 낫게 하고 귀신도 쫓으면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려 복음을 쉽게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능력 사역이며 기적행하는 은사의 유익이 여기에 있다.
소그룹의 모임에서도 말로만 전도하고 예수를 전하면 불신자들이 마음 문을 쉽게 열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의 말씀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불신자의 속마음을 알아맞히면 쉽게 마음 문을 연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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