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8:10)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1요5:4)
언제나 내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매시를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인생의 어둡고 우울한 면을 찾는 데 아주 능한 그들이 문제에 직면할 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평하는 것뿐이다.
나는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들이 읽고 있는 성경이 내가 이제까지 읽은 성경과 같은 성경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믿음 있는 사람은 비관적이고 우울한 삶을 살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정상적인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이 땅의 일들이 결코 이상적인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현실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하며 세월을 보내지는 않는다. 구속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다해며 기뻐하느라 근심할 시간이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모순'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요소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런 요소를 발견하고는 매우 당혹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었지만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당신이 생명을 누리는 것은 다른 분, 즉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인은 자기 생명을 구하려고 할 때 그것을 잃는다. 하지만 그것을 잃을 때 오히려 다시얻게 된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또 다른 점이 있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굴복한다.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그는 그것에 맞서 맹렬히 싸우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복종하기 때무에 총 한 번 쏘지 않고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승리를 거둔다. 그는 하나님께 굴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둔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강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높일 때 약해진다. 그러나 자기가 약하다고 생각하여 무릎을 꿇으면 강해진다. 두려움에 쫓겨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는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반면 자신감에 차 있을 때 그는 가장 큰 위험에 빠져 있는 것이다.
3/31/2011
당신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
당신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니낌을 더 믿지 때문이다. "메 믿음대로 될 지어다!". 이 말씀을 믿는 데 당신의 온 지성과 감정이 동원되어야 합니까? 어떤 증거를 봐야, 무슨 느낌이 들어야, 뭔가 확신을 갖데 되어야 믿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치유되었다고 말씀하시면 치유된 것입니다. 말씀을 판단하고 이해하여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대로, 들을 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좁디좁은 인간의 마음판에 집어넣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어넣는 것입이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말씀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몸, 자기 느낌, 자기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사와 표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치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말씀은 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조건이나 느낌을 구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치유되었다고 말씀하시면 치유된 것입니다. 말씀을 판단하고 이해하여 머릿속에 넣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대로, 들을 대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좁디좁은 인간의 마음판에 집어넣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어넣는 것입이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믿음이란 단순한 것입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말씀보다 자기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자기 몸, 자기 느낌, 자기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사와 표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치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말씀은 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조건이나 느낌을 구하지 마십시오.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아버지의 마음..3월을 보내며
인류의 죄를 온몸으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버림받으시므로 사랑받는 위치에서 버림받는 자리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고난의 자리에서 하늘 향해 외치실 때 그 기도 소리는 대답이 없는 메아리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부으시어 저주와 심판아래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들의 무죄를 외면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와 파멸의 늪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못을 박는 그 일이 얼마나 아버지의 가슴을 져며내는 일이었는지 땅이 흔들리고 해가 얼굴을 가리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은 아들 예수님의 고통보다
아버지 하나님의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독특하고 유일한 아들. 그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의 극치, 거룩의 극치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아버지의 하나님 되심을(신성)만나게 됩니다.
샬롬!
3월을 보내면서 또 사순절 기간에 뜨문뜨문이지만 메일로 인사를 드립니다. 이 기간에 주님의 아픔과 고난을 가슴으로 느끼시고 체험하시고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의 길을 함께 가실수 있기를 사순절의 말씀을 들어 오셔서 묵상하시고 행복한 시간들이 되세요...
사랑합니다.
그 고난의 자리에서 하늘 향해 외치실 때 그 기도 소리는 대답이 없는 메아리 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에게 진노의 잔을 부으시어 저주와 심판아래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들의 무죄를 외면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와 파멸의 늪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못을 박는 그 일이 얼마나 아버지의 가슴을 져며내는 일이었는지 땅이 흔들리고 해가 얼굴을 가리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은 아들 예수님의 고통보다
아버지 하나님의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독특하고 유일한 아들. 그 아들을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사랑의 극치, 거룩의 극치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아버지의 하나님 되심을(신성)만나게 됩니다.
샬롬!
3월을 보내면서 또 사순절 기간에 뜨문뜨문이지만 메일로 인사를 드립니다. 이 기간에 주님의 아픔과 고난을 가슴으로 느끼시고 체험하시고 새롭게 변화되어 주님의 길을 함께 가실수 있기를 사순절의 말씀을 들어 오셔서 묵상하시고 행복한 시간들이 되세요...
사랑합니다.
3/30/2011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 케네스 코플랜드
" 저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의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편 91:14-15)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구원의 능력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크리스챤들은 날마다 하나님과 가깝게 동행하는 대신, 위기가 온 다음에서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당신이 만일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구해주시기를 원한다면, 어려움이 없이 잘 될 때에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고 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잘 알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분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와 확신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 1서 3장 20-2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것을 할 때에 하나님께 담대함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을 미지근하게 섬기고 있다면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담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위험에 둘러싸였을 때 마음에 믿음이 가득한 대신, 두려움에 온 몸이 얼어붙을 것이다.
당신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 모든 것이 잘 될 때에 그분과 가까이 동행하라. 그러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아무 의심없이 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경본문: 시편 108:1-6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폭풍속을 돌아보지 말라 - 케네스 코플랜드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태복음 14:30-31)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다른데로 눈을 돌리게 할 것이다. 당신의 주변 환경을 폭풍 한가운데 놓인 배처럼 정신 없게 만들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놓게 하기 위하여 마귀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육체적인 차원과 주변 상황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자기를 참패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에게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에서 발을 내딛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 문제 없이 당당하게 물위를 걸어갔다. 그의 존재 전체가 예수님의 "오라!"고 하신 말씀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말씀에서 돌리자 폭풍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있는 불가능한 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직업이 어부였던 그는 폭풍을 만나 물결이 치솟으면 밑으로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육체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그의 믿음은 나사못이 빠진 듯 가라앉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러한 일을 막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를 얻으면 끝까지 그 말씀을 붙잡으라. 절대로 촛점을 다른 것으로 옮기지 말라.
당신이 말씀을 놓치도록 마귀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할 것이다. 당신 주변의 상황을 휘저어 놓을 것이다. 당신에게 두려움을 갖게 할 것이다. 당신이 옛날의 생각으로 돌아가도록 모든 것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놓치지 말라. 당신의 눈을 계속 하나님의 말씀에 두면,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 말씀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은 아무 문제 없이 물위를 걸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본문: 마태복음 14:22-3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포도주를 사라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잠21:11)
세상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면 인생은 끝장나고 맙니다. 좋은 집에서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의 생은 퇴색되고 절망에 부딪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생수를 먹고 갈급함을 채우고 난 뒤에 포도주를 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는 상징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새 포도주,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못박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사도들은 겁이 나서 모두 숨었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거기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획기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임하자 염려와 근심이 떠나고 기쁨이 넘치며 담대해졌습니다. 숨어 있던 사도들이 문을 박차고 나가 찬송을 부르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보니 그들 속에 기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하는 말씀이 얼마나 박력이 있었는지 그 자리에 참석한 무리 중에 3천 명이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찬송이 없으면 병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기쁨이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은 내게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를 사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언 31:6) 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꽉 들어찬 사람이 세상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잠시 동안은 염려와 근심을 잊을 수 있으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는 영원한 기쁨을 가져가 줍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와서 구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포도주를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의 생활의 활력소인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
-처음보다 끝이 좋아야-
요아스 왕은 처음에는 정직해 성전을 중수할 정도로 신앙이 돈독했으나, 일순간 간신들의 말에 현혹돼 그만 신앙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말이나 세속적인 욕심에 순간적으로 현혹되어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처음보다는 끝이 더 좋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의 더 큰 실수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책망하실때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이 완악해지거나 강퍅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겸비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 기도 -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세상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면 인생은 끝장나고 맙니다. 좋은 집에서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면 그 사람의 생은 퇴색되고 절망에 부딪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삶에 있어서 기쁨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생수를 먹고 갈급함을 채우고 난 뒤에 포도주를 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주는 상징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새 포도주, 성령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못박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사도들은 겁이 나서 모두 숨었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문을 잠그고 거기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는 획기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성령이 임하자 염려와 근심이 떠나고 기쁨이 넘치며 담대해졌습니다. 숨어 있던 사도들이 문을 박차고 나가 찬송을 부르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사도들을 보니 그들 속에 기쁨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증거하는 말씀이 얼마나 박력이 있었는지 그 자리에 참석한 무리 중에 3천 명이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찬송이 없으면 병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기쁨이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없는 사람은 내게 와서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를 사라.”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잠언 31:6) 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꽉 들어찬 사람이 세상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잠시 동안은 염려와 근심을 잊을 수 있으나 이것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포도주는 영원한 기쁨을 가져가 줍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앞에 나와서 구하는 자에게는 하늘의 포도주를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러할 때 여러분의 생활의 활력소인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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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보다 끝이 좋아야-
요아스 왕은 처음에는 정직해 성전을 중수할 정도로 신앙이 돈독했으나, 일순간 간신들의 말에 현혹돼 그만 신앙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말이나 세속적인 욕심에 순간적으로 현혹되어 신앙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처음보다는 끝이 더 좋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의 더 큰 실수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책망하실때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이 완악해지거나 강퍅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항상 겸비한 자세를 가질 때 우리의 신앙은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 기도 -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 더욱 성숙한 신앙으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3/28/2011
예수! 유일한 희망
세계(世界) 2차 대전(大戰)때에 유대인 랍비가 아들과 함께 집단(集團) 수용소(收容所)에서 지냈다.
1944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建物의 한 구석으로 갔다.
아버지는 어렵게 구한‘버터’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周鉢)에 넣고 거기에 심지(心地)를 꽂은 뒤 불을 붙였다. 촛불을 구할 수 없어‘버터’불을 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희망(希望)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希望)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여호와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랍어의‘안드로 포스'는 사람이란 뜻인데 본래(本來) 의미(意味)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存在)를 말한다.
인간(人間)이 인간됨은 희망을 가짐에 있다.
진정(眞情)한 희망은 예수를 바라봄에 있다.
절망(切望)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믿음은 새 생명(生命)을 얻는 희망이다.
출처:복있는 그리스도인
1944년의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建物의 한 구석으로 갔다.
아버지는 어렵게 구한‘버터’한 조각을 진흙으로 만든 주발(周鉢)에 넣고 거기에 심지(心地)를 꽂은 뒤 불을 붙였다. 촛불을 구할 수 없어‘버터’불을 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3주간을 살 수 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3일을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희망(希望)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단다. 어둠을 밝히는 이 불이 곧 희망(希望)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여호와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랍어의‘안드로 포스'는 사람이란 뜻인데 본래(本來) 의미(意味)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存在)를 말한다.
인간(人間)이 인간됨은 희망을 가짐에 있다.
진정(眞情)한 희망은 예수를 바라봄에 있다.
절망(切望)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믿음은 새 생명(生命)을 얻는 희망이다.
출처:복있는 그리스도인
질그릇이 되지 말라 - 케네스 코플랜드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디모데후서 2:20)
당신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일을 하기로 예정되었는가?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에게 이렇게 질문하면 그들은 겸손하게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금그릇이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성경말씀대로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작은 질그릇으로 지어졌으니까요."
감사하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물론 하늘 나라에는 금그릇도 은그릇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릇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따르면 "누구든지 이런 것 (불의)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더럽고 부패한 것들을 접촉하지 않고 분리되면, 확장번역본)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셨다.
금그릇이 되느냐, 질그릇이 되느냐, 선택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그렇다면 왜 많은 믿는 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대수롭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가?
왜 질그릇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가?
왜 질그릇이 되는 것에 만족하는가?
그들은 금그릇이 되기에 필요한 한가지, 곧 헌신된 삶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각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부터 돌아서서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 하나님의 길로 기꺼이 가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이여, 하나님은 지금 이 지구상에서 신나는 일을 벌이고 계시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계시다. 이렇게 흥분된 세대에 질그릇으로 남아 있지 말라! 아직 금그릇이 되겠다는 헌신된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기 바란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당신이 세상의 방법들을 기꺼이 버리고 더 높은 차원의 방법, 곧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도록 당신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지금 결단하라. 때는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의 마지막 찬란한 물결이 온 세상에 넘쳐 흐르고 있다. 질그릇에서 한방울씩 떨어뜨릴 때가 아니다. 금그릇에서 넘치게 부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는 부르심이다.
성경본문: 디모데후서 2:15-26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용서받는 자의 삶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헤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죄를 용서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용서해 주지 못할 처지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남편의 부정을, 아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웃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입니다. 부흥사인 코리텐 붐 여사가 독일에 와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패전에 완전히 짓눌려 침울해지고 죄책으로 말미암아 몸둘 곳을 몰라하던 독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듣고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여사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줄을 서서 여사와 악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던 여사는 손을 내밀며 다가가서는 한 남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수용소에 있을 때 여사를 벌거벗기고 학대하던 병사였습니다. 전쟁중에 여사의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죽고 여사만 겨우 살아 남아 고국인 환란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여사는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 가족을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사가 “주님, 나는 이 남자를 용서할 수 없으니 나를 도와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자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사가 천근같이 무거운 팔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사에게로 쏟아졋습니다.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받은 우리들은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를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
-선교와 성령-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완성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선교의 영되신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선교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기도 -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죄를 용서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됩니까? 일곱 번이면 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용서해 주지 못할 처지에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남편의 부정을, 아내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웃을 용서하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났을 때입니다. 부흥사인 코리텐 붐 여사가 독일에 와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패전에 완전히 짓눌려 침울해지고 죄책으로 말미암아 몸둘 곳을 몰라하던 독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복음을 듣고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여사가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자 줄을 서서 여사와 악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던 여사는 손을 내밀며 다가가서는 한 남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수용소에 있을 때 여사를 벌거벗기고 학대하던 병사였습니다. 전쟁중에 여사의 가족은 유대인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죽고 여사만 겨우 살아 남아 고국인 환란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난 여사는 강단에서는 용서를 외쳤지만 자기 가족을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손이 내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사가 “주님, 나는 이 남자를 용서할 수 없으니 나를 도와 주옵소서.” 라고 기도를 하자 “네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여사가 천근같이 무거운 팔을 내밀어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사에게로 쏟아졋습니다.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정으로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받은 우리들은 아내와 남편과 부모와 자녀를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잘못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찢으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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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성령-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선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최초의 선교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신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완성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선교의 영되신 성령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을 통해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복음을 전파하고 하늘나라를 확장하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선교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기도 -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선교는 하나님의 뜨거운 소원이십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성령님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3/26/201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 케네스 코플랜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려다 실수할까봐 두려워 하지 말라. 오히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그의 가르치심을 받으라.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삶에 아주 작은 것에 관한 것부터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다가 당신이 듣고 순종하는 데 훈련이 되면 점점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
나와 아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훈련 받았다. 처음에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 을 듣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다. 우리의 영은 훈련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기도와 말씀 공부 시간에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들을 것을 기대하였다.
나와 아내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훈련 받았다. 처음에 우리가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 을 듣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다. 우리의 영은 훈련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기도와 말씀 공부 시간에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음성을 들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들려 주셨다. 나는 아내가 처음으로 그 음성을 들은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아내는 말씀을 읽는 도중 잠시 멈추고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음성이 들렸다.
"네 차에 라이트가 켜져 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시한 것에 관해 말씀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무시하였다. 그러나 곧 같은 말씀이 들렸다. 마침내 아내가 일어나 차에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하나님은 왜 그 하찮은 차 라이트에 신경을 쓰셨을까? 왜냐하면 아내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날 밤 아내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집에 있었는데, 만일 차의 베터리가 떨어지면 꼼짝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내를 지켜보시다가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그의 음성을 듣는 데에 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큰 위험부담이 없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차에 라이트가 안켜져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일 아내가 실수로 들은 음성이었다면? 아내는 그저 바보같은 생각이 들 뿐 아무 부작용도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주님을 신뢰하면 성령님께서 이와 같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며 해가 되지 않는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 하실 것이다. 가장 중대한 실수는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내면의 음성이다.(로마서 8:14) 두려워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 당신의 영에서 음성을 들을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트가 켜져 있었다. 하나님은 왜 그 하찮은 차 라이트에 신경을 쓰셨을까? 왜냐하면 아내를 돌보시기 때문이다. 그날 밤 아내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집에 있었는데, 만일 차의 베터리가 떨어지면 꼼짝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내를 지켜보시다가 그 순간에 꼭 필요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내가 그의 음성을 듣는 데에 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큰 위험부담이 없는 것을 말씀하셨다. 만일 차에 라이트가 안켜져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만일 아내가 실수로 들은 음성이었다면? 아내는 그저 바보같은 생각이 들 뿐 아무 부작용도 없었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주님을 신뢰하면 성령님께서 이와 같이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며 해가 되지 않는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 하실 것이다. 가장 중대한 실수는 내면에서 들리는 음성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내면의 음성이다.(로마서 8:14) 두려워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라. 당신의 영에서 음성을 들을 것을 기대하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2:6-1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당신은 의인이다 - 케네스 코플랜드
당신이 어제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든지, 당신의 삶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든지 오늘부터는 당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알고 새롭게 시작하기 바란다! 당신이 무엇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 그 자체를 당신이 받은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의인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살펴보라.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시편 92:12)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잠언 11:10)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 11:21)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외면)하시느니라"(베드로전서 3: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12)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편 34:17)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25)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시편 92:12)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잠언 11:10)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잠언 11:21)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외면)하시느니라"(베드로전서 3: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호위하시리이다
(시편 5:12)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시편 34:17)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25)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시편 37:29)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시편 146:8)
당신은 아무 가치 없는 자라고 하는 마귀의 말에 속지 말라. 그리고 이 모든 축복을 하나라도 놓치지 말고 받아라. 마귀를 쫓아내고 큰 소리로 외쳐라. "나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마련하신 모든 특권을 즐기기 바란다!
성경본문: 로마서 3:21-28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밤을 지나면서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잠3:35)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소녀 점쟁이가 방해를 하자 그 소녀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들린 소녀를 고용하여 돈벌이를 하던 주인이 바울과 살라를 고소하여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중’ 이란 말은 시각적으로 어두움을 말할 뿐 아니라 마음 속에 절망과 슬픔이 꽉 들어차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야말로 마귀가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면서 참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를 드리자 죄수들도 조용히 들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가슴에 넘치는 감사로써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려 바울과 실라뿐만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묶인 것이 모두 풀러지고 자유롭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경제적으로 밤중에 처한 사람, 질병으로 밤중에 처한 사람, 영혼이 밤중에 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가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운명을 저주하는데 이것은 신앙이 자라지 못한 증거입니다. 신앙이 자란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좋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좋은 것을 주시면 좋은 것 주셔서 감사하고, 나쁜 것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우러난 찬송과 감사는 여러분을 질병에서, 가난에서, 죄악에서, 절망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온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만을 늘어 놓으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두운 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찬송과 감사와 믿음입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사도행전 16:25, 26)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
-만남과 변화-
유명한 찬송 작시자인 존 뉴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아주 잔인무도한 노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죽을 위기를 겪게 되자 자신의 어머니가 믿던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인격적인 변화를 받아 노예상의 생활을 청산하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였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입니다. 흉악한 노예상이 찬송 작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기도 -
예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되어 위대한 전도자로 변화됐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도 예수님이 만나 주심으로 불순종의 삶에서 순종의 삶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변화된 삶을 살도록 인격을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바울과 실라가 마게도냐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소녀 점쟁이가 방해를 하자 그 소녀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들린 소녀를 고용하여 돈벌이를 하던 주인이 바울과 살라를 고소하여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중’ 이란 말은 시각적으로 어두움을 말할 뿐 아니라 마음 속에 절망과 슬픔이 꽉 들어차 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때야말로 마귀가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하면서 참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를 드리자 죄수들도 조용히 들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가슴에 넘치는 감사로써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자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려 바울과 실라뿐만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묶인 것이 모두 풀러지고 자유롭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경제적으로 밤중에 처한 사람, 질병으로 밤중에 처한 사람, 영혼이 밤중에 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가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운명을 저주하는데 이것은 신앙이 자라지 못한 증거입니다. 신앙이 자란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좋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좋은 것을 주시면 좋은 것 주셔서 감사하고, 나쁜 것을 주시면 하나님께서 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우러난 찬송과 감사는 여러분을 질병에서, 가난에서, 죄악에서, 절망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다가온다고 해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불만을 늘어 놓으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두운 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찬송과 감사와 믿음입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사도행전 16:25, 26)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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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변화-
유명한 찬송 작시자인 존 뉴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아주 잔인무도한 노예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죽을 위기를 겪게 되자 자신의 어머니가 믿던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인격적인 변화를 받아 노예상의 생활을 청산하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였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입니다. 흉악한 노예상이 찬송 작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기도 -
예수님을 만남으로 사울이 바울되어 위대한 전도자로 변화됐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도 예수님이 만나 주심으로 불순종의 삶에서 순종의 삶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창조적인 삶으로 변화된 삶을 살도록 인격을 변화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3/23/2011
축복을 주는 자가 되라 - 케네스 코플랜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시편 35:27)
전통적인 종교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고 고난받기를 원하신다고 들었다. 그러나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통하기를 원하신다.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우리의 영, 혼, 육의 모든 영역에서 말이다.
당신이 누구이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구원받기 원하신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에게 맡기실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인류를 구제하는데 쓰시기를 원하시며 당신이 가진 것이 없이는 남을 도울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신다.
당신이 빈털털이라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거나 굶주린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해 줄 수가 없다. 당신이 아파서 병원에 누워 있으면 나가서 병든 자들에게 손을 얹을 수가 없다. 당신이 우울증에 억눌려 있으면 남들에게 기쁨을 나눠 줄 수가 없다. 남들에게 축복을 주는 자가 되려면 당신이 축복을 받아야 한다.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남들에게 축복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곧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상상한 것보다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경험하였다. 몇 년 전 나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남에게 주는 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주는 것을 내 삶의 중요한 가치로 두고 날마다 실천하였다. 이제 나는 문자 그대로 "주기 위해 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게 덤프트럭으로 가득가득 축복을 부어주셨다는 것을 부끄럼없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마음먹고 당신의 시간과 돈과 사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축복을 주실 것이다. 주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형통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성경본문:창세기 12:1-4, 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심은 대로 거두리라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소를 심은 곳에서는 채소를, 잡초를 심은 곳에서는 잡초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더 나은 내일과 더욱 큰 행복을 얻으며 좀 더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무엇을 심어야 할 것인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애 속에 죄악, 부정, 불안, 질병, 파괴와 절망을 심어 놓고 그 곳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부유와 풍요가 거둬지리라 생각 한다면 이는 우주의 법칙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1, 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씨를 심든지 심은 씨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창세기적 명령을 거역하고 저절로 기이한 것이 인생에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밭이고 그 생각은 씨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셧습니다. 밭인 우리의 마음에는 두 종류의 씨가 뿌려집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뿌린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씨이고 또 하나는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 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아들의 씨를 뿌리면 천국의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지 씨앗을 뿌리면 가라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통하여 어떠한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어떠한 것으로 추수하느냐가 결정되므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삶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운명을 개조하고 내일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여러분이 회개함으로써 마음의 밭에 심어진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모든 파괴와 절망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심은 씨는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소를 심은 곳에서는 채소를, 잡초를 심은 곳에서는 잡초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더 나은 내일과 더욱 큰 행복을 얻으며 좀 더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무엇을 심어야 할 것인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애 속에 죄악, 부정, 불안, 질병, 파괴와 절망을 심어 놓고 그 곳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부유와 풍요가 거둬지리라 생각 한다면 이는 우주의 법칙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1, 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씨를 심든지 심은 씨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창세기적 명령을 거역하고 저절로 기이한 것이 인생에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밭이고 그 생각은 씨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셧습니다. 밭인 우리의 마음에는 두 종류의 씨가 뿌려집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뿌린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씨이고 또 하나는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 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아들의 씨를 뿌리면 천국의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지 씨앗을 뿌리면 가라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통하여 어떠한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어떠한 것으로 추수하느냐가 결정되므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삶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운명을 개조하고 내일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여러분이 회개함으로써 마음의 밭에 심어진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모든 파괴와 절망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심은 씨는 얼마 있지 아니하여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용서의 체험
“지혜 있는 자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 있는 자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욥34:2)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므로 예수님의 용서함에 대한 은혜를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불의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용서의 체험을 하지 못하면 영적인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어서 먼지와 티끌을 씻어내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매일같이 용서받고, 주님의 깊은 용서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용서에 대해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과 나의 신앙이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해야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이 병든 한 자매님과 신앙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 자매님의 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남편은 장사를 하시는 분인데 어느 날 장사차 남편과 함께 시골을 다녀왔더니 그 동안 청상과부로 자기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임종도 못 지키고 평생 고생만 시켜 드린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니 자매님은 자신이 죽도록 미워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이것이 자매님에게 깊은 병을 유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매님을 용서하셨는데 자매님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하자, 자매님은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불효자도 용서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은 자매님은 자기 자신도 용서하게 되어 자책과 원망과 탄식 대신에 마음 속에 넘치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용서가 그의 병든 생애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용서를 받고 난 뒤에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아가서 이웃을 용서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생활에 변화가 다가올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먼저 일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두 세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합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하늘에 열납되는 것입니다. 또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언약하신 말씀을 근거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낫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 기도 -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사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도 우리 가족이 한 뜻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므로 예수님의 용서함에 대한 은혜를 실제로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불의하며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았다는 용서의 체험을 하지 못하면 영적인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어서 먼지와 티끌을 씻어내는 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매일같이 용서받고, 주님의 깊은 용서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용서에 대해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과 나의 신앙이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해야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나는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깊이 병든 한 자매님과 신앙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 자매님의 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남편은 장사를 하시는 분인데 어느 날 장사차 남편과 함께 시골을 다녀왔더니 그 동안 청상과부로 자기만 바라보고 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임종도 못 지키고 평생 고생만 시켜 드린 친정 어머니를 생각하니 자매님은 자신이 죽도록 미워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이것이 자매님에게 깊은 병을 유발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자매님을 용서하셨는데 자매님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하자, 자매님은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나 같은 불효자도 용서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음을 깨달은 자매님은 자기 자신도 용서하게 되어 자책과 원망과 탄식 대신에 마음 속에 넘치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용서가 그의 병든 생애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깊은 용서를 받고 난 뒤에는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나아가서 이웃을 용서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생활에 변화가 다가올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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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먼저 일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두 세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 합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하늘에 열납되는 것입니다. 또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언약하신 말씀을 근거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낫고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 기도 -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사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오늘도 우리 가족이 한 뜻으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22/2011
복있는 그리스도인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畵家)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自畵像)을남긴 것으로 유명(有名)하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순교자 스데반'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群衆)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의 한 사람으로 표현(表現)했다.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탕자(蕩子)의 모습으로 남겼다.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罪人)의 심정(心情)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殺人者)의 부끄러움으로 주님에게 다가서려고 했다.
우리는 십자가(十字架)를 묵상(黙想)할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子女)로 구원(救援)받았기 때문이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순교자 스데반'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群衆)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의 한 사람으로 표현(表現)했다.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탕자(蕩子)의 모습으로 남겼다.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罪人)의 심정(心情)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殺人者)의 부끄러움으로 주님에게 다가서려고 했다.
우리는 십자가(十字架)를 묵상(黙想)할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子女)로 구원(救援)받았기 때문이다.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자아가 깨어진 사람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위대한 종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아가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특별히 택하여 세우셨지만 25년 동안 그는 자아를 죽여야 했습니다. 기근을 당하여 애굽에 내려가고, 거기서 아내를 팔아먹는 수치를 당하고, 조카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래서 그가 얼마나 깨뜨려졌던지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고 바칠 정도로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도 20여 년 동안 자아를 죽였습니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품삯을 착취당하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다가 라반의 군대에게 잡혀 죽을 뻔하고, 마지막에 얍복 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완전히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의 자아가 죽자 하나님께서 형의 군대를 막아 주시고, 그를 위대한 축복의 조장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기 위해 13년 동안 흙구덩이에서 종으로, 종에서 감옥으로 옮기면서 자아를 깨뜨려 나중에는 자기를 판 형들을 만날 때 사랑과 눈물로 맞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아를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했던 모세가 나중에는 깨어지고 깨어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아가 깨어진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 어떤 문제로든지 얻어맞고 자아가 깨어져서 앉아 있는 성도님들은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지금 실패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성공의 문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죽고 그 자리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지렁이 같은 여러분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때, 그때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타작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깨뜨리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를 통해 돌이 날아올 때에는 감사하십시오. 사업이나 생활을 통해 돌이 날아온 때도 환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돌을 허락하셨습니다. 돌이 날아올 때에는 피하지 말고 맞아서 여러분을 깨뜨리십시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쳐 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위대한 종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아가 깨뜨려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특별히 택하여 세우셨지만 25년 동안 그는 자아를 죽여야 했습니다. 기근을 당하여 애굽에 내려가고, 거기서 아내를 팔아먹는 수치를 당하고, 조카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래서 그가 얼마나 깨뜨려졌던지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고 바칠 정도로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도 20여 년 동안 자아를 죽였습니다. 그는 외삼촌 집에서 품삯을 착취당하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다가 라반의 군대에게 잡혀 죽을 뻔하고, 마지막에 얍복 강 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완전히 자아가 죽었습니다. 야곱의 자아가 죽자 하나님께서 형의 군대를 막아 주시고, 그를 위대한 축복의 조장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은 죄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사용하시기 위해 13년 동안 흙구덩이에서 종으로, 종에서 감옥으로 옮기면서 자아를 깨뜨려 나중에는 자기를 판 형들을 만날 때 사랑과 눈물로 맞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자아를 깨뜨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했던 모세가 나중에는 깨어지고 깨어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가라고 하실 때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아가 깨어진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 어떤 문제로든지 얻어맞고 자아가 깨어져서 앉아 있는 성도님들은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지금 실패해 있는 것이 아니고 성공의 문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죽고 그 자리에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지렁이 같은 여러분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을 때, 그때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타작 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깨뜨리기 위해 가족이나 이웃이나 친구를 통해 돌이 날아올 때에는 감사하십시오. 사업이나 생활을 통해 돌이 날아온 때도 환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고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돌을 허락하셨습니다. 돌이 날아올 때에는 피하지 말고 맞아서 여러분을 깨뜨리십시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책임쳐 주실 것입니다.
가시가 주는 교훈 고린도후서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악한 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린도후서 12:7-10)
가시는 인간의 타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에서 추방한 후, 맨 먼저 그들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일을 주시기 전에 먼저 가시를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가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로, 약한 것들을 ‘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시는 육신의 모든 연약함을 말합니다. 바울은 병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신이 허약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능욕을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곳에서 마다 능욕을 당했습니다. 원수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까지도 가시가 되어 그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능욕의 가시를 극복했습니다.
섯째로, 궁핍을 ‘가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조금이라도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면 궁핍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럴 때마다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통을 주는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에는 오히려 이런 가시를 가진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시들을 통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고 했던 것입니다.
가시는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경고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는 훈련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가시에 찔릴 때마다 엎드려 기도하여 가시가 주는 뜻을 헤아리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가시는 인간의 타락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에서 추방한 후, 맨 먼저 그들에게 다가온 것이 바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일을 주시기 전에 먼저 가시를 보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게 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가시’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습니다.
첫째로, 약한 것들을 ‘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시는 육신의 모든 연약함을 말합니다. 바울은 병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육신이 허약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로, 능욕을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러 가는 곳에서 마다 능욕을 당했습니다. 원수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까지도 가시가 되어 그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럴 때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능욕의 가시를 극복했습니다.
섯째로, 궁핍을 ‘가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조금이라도 자기 중심으로 살려고 하면 궁핍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럴 때마다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통을 주는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에는 오히려 이런 가시를 가진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시들을 통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고 했던 것입니다.
가시는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경고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에게는 훈련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가시에 찔릴 때마다 엎드려 기도하여 가시가 주는 뜻을 헤아리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합심 기도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왕상4:29)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더욱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 전투기에 의해서 거의 전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영국 전투기들은 한 대씩 공중전에 임하였는데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언제나 격추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전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전쟁 당시 신앙심이 두터운 한 독일 장교가 성경을 읽다가 구약에 있는 “여호와(야웨)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쫒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신명기 32:30)라는 말씀을 읽다가, 문득 “둘씩 편대를 지어 사운다면 이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곧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쏘면 8자 둘레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총탄에 맞아 추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대가 편대를 지어 기관총을 쏘면 16자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만 추락되는 것이 아니라 800자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모두 추락되었던 것입니다. 이 전법을 알게 된 독일 공군이 곧 이 전술을 시행했던 것 입니다.
이 비밀 전략을 미국의 유명한 슈날드 공군 소장이 알아내어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반드시 두 대씩 편대를 지어 전투에 임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 비행기가 미국 비행기 보다도 성능이 훨씬 우수했고 수도 많아서 미얀마 전선, 중국 전선에서 미국이 불리한 전황에 놓여 있었는데도 슈날드 장국이 편대 비행 전략을 쓰자 일본 전투기의 폭파된 수가 217대, 미확인이 43대였으나, 이에 비하면 미국 전투기의 손실은 겨의 16대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장군도 전쟁 때 작전 계획을 짤 때, 성격에서 힌트를 얻은 전략으로 힘은 산개하지 않고 합친 것같이, 우리들도 두사람 이상 마음을 합치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놀라우리만큼 큰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마음이 일치되어 손을 잡고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면 폭탄 같은 능력이 생활 가운데 나타나 자녀 문제, 가정 문제, 사업 문제가 모두 아름답게 해결될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8:19)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
-성령의 역사-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신 후에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권능으로 임하셔서 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한 제자들은 생동감있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나요? 성령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도록 도우십니다. 또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게 하시고,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 기도 -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며 담대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오니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출처: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더욱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들이 독일 공군 전투기에 의해서 거의 전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 때에 영국 전투기들은 한 대씩 공중전에 임하였는데 독일 공군 전투기들이 언제나 격추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전략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전쟁 당시 신앙심이 두터운 한 독일 장교가 성경을 읽다가 구약에 있는 “여호와(야웨)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쫒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신명기 32:30)라는 말씀을 읽다가, 문득 “둘씩 편대를 지어 사운다면 이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곧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기관총을 쏘면 8자 둘레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총탄에 맞아 추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대가 편대를 지어 기관총을 쏘면 16자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만 추락되는 것이 아니라 800자 안에 들어오는 비행기가 모두 추락되었던 것입니다. 이 전법을 알게 된 독일 공군이 곧 이 전술을 시행했던 것 입니다.
이 비밀 전략을 미국의 유명한 슈날드 공군 소장이 알아내어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반드시 두 대씩 편대를 지어 전투에 임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 비행기가 미국 비행기 보다도 성능이 훨씬 우수했고 수도 많아서 미얀마 전선, 중국 전선에서 미국이 불리한 전황에 놓여 있었는데도 슈날드 장국이 편대 비행 전략을 쓰자 일본 전투기의 폭파된 수가 217대, 미확인이 43대였으나, 이에 비하면 미국 전투기의 손실은 겨의 16대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장군도 전쟁 때 작전 계획을 짤 때, 성격에서 힌트를 얻은 전략으로 힘은 산개하지 않고 합친 것같이, 우리들도 두사람 이상 마음을 합치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놀라우리만큼 큰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 마음이 일치되어 손을 잡고 가정을 위해, 자녀를 위해,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면 폭탄 같은 능력이 생활 가운데 나타나 자녀 문제, 가정 문제, 사업 문제가 모두 아름답게 해결될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태복음 18:19)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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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신 후에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권능으로 임하셔서 그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한 제자들은 생동감있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일을 하시나요? 성령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도록 도우십니다. 또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에 덕을 세울 수 있게 하시고,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 기도 -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며 담대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능력을 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오니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출처: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21/2011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기도라는 것을 전혀 몰랐을 때 가장 많이 고민한 것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할 때 특히, 기도 생활을 하지 않던 사람이 기도를 하게 될 때 하나님 앞에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가 하나님이 무엇을 내게 원하고 계시는지를 물으며 기도하기보다 일단 자신의 사정부터 아뢰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침체 되어 있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 있어 하나님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를 드릴 때면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행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저의 사정을 아뢰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저의 죄된 삶을 회개하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고 막으시거나 침묵으로 일관하시기도 합니다.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지 않고 막으시거나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기를 바라시는 기도를 외면한체 자신이 드리고 싶은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그렇기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제목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기도는 바로 회개의 기도, 진실한 마음을 담아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영혼을 통해 무엇을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나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며 기도할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공급해 주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를 시작할 때 이런 이런 부분을 가지고 기도해야 겠다고 마음먹고서 기도를 하면 나의 생각과 마음가짐과 달리 전혀 다른 기도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때가 있음도 고백합니다.그렇기때문에 기도는 나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입술을 통해 행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실 것입니다.하나님의 응답이 빠를 것입니다.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며 마음을 움직이실 것입니다.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과 관계 유지를 위한 피나는 믿음의 노력과 열심이 필요합니다.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채 단순히 나의 필요만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필요를 구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기도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기도 제목이 응답받기를 기대하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이 흐뭇해 하실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셔서 응답을 허락하시지 않고서는 견뎌하실 수 없는 그런 우리들의 진실한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과의 막혔던 관계가 회복되고, 병든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며,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통해 일하시고, 내 영혼을 통해 감사와 영광받으시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영혼위에 크신 능력과 기름부으심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그러한 진실한 믿음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넘쳐치게 될 것을 확신하며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심은대로 거두리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소를 심은 곳에서는 채소를, 잡초를 심은 곳에서는 잡초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더 나은 내일과 더욱 큰 행복을 얻으며 좀 더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무엇을 심어야 할 것인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애 속에 죄악, 부정, 불안, 질병, 파괴와 절망을 심어 놓고 그 곳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부유와 풍요가 거둬지리라 생각 한다면 이는 우주의 법칙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1, 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씨를 심든지 심은 씨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차세기적 명령을 거역하고 저절로 기이한 것이 인생에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밭이고 그 생각은 씨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밭인 우리의 마음에는 두 종류의 씨가 부려집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뿌린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씨이고 또 하나는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 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아들의 씨를 뿌리면 천국의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지 씨앗을 뿌리면 가라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통하여 어떠한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어떠한 것으로 추수하느냐가 결정되므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삶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운명을 개조하고 내일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여러분이 회개함으로써 마음의 밭에 심어진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모든 파괴와 절망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심은 씨는 어마 있지 아니하여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http://blog.naver.com/paul_j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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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행복자임을 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내적 조건은 사랑과 평안과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리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또 진정한 평안은 의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양심에 가책이 없는 마음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소망의 빛은 행복의 환희를 선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나아가 행복의 내적 조건을 얻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됩니다.
- 기도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도 ‘나는 행복자’라고 선포하게 하시고 이 행복을 나누어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소를 심은 곳에서는 채소를, 잡초를 심은 곳에서는 잡초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좀더 나은 내일과 더욱 큰 행복을 얻으며 좀 더 풍성하고 부유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 내가 무엇을 심어야 할 것인가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생애 속에 죄악, 부정, 불안, 질병, 파괴와 절망을 심어 놓고 그 곳에서 행복과 즐거움과 부유와 풍요가 거둬지리라 생각 한다면 이는 우주의 법칙을 무시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11, 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씨를 심든지 심은 씨 종류대로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차세기적 명령을 거역하고 저절로 기이한 것이 인생에 일어나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그러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밭이고 그 생각은 씨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밭인 우리의 마음에는 두 종류의 씨가 부려집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뿌린 천국의 아들들이 되는 씨이고 또 하나는 마귀가 뿌리는 가라지 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아들의 씨를 뿌리면 천국의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지 씨앗을 뿌리면 가라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통하여 어떠한 씨를 뿌리느냐에 따라 어떠한 것으로 추수하느냐가 결정되므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삶으로, 질병을 건강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운명을 개조하고 내일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여러분이 회개함으로써 마음의 밭에 심어진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바라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모든 파괴와 절망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심은 씨는 어마 있지 아니하여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http://blog.naver.com/paul_jh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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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도 행복자임을 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내적 조건은 사랑과 평안과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리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또 진정한 평안은 의로운 마음에서 나옵니다. 양심에 가책이 없는 마음에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소망의 빛은 행복의 환희를 선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나아가 행복의 내적 조건을 얻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얻게 됩니다.
- 기도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도 ‘나는 행복자’라고 선포하게 하시고 이 행복을 나누어주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19/2011
빛과어둠의 영적전쟁 중 지옥의 군대
마귀의 군대는 엄청난 규모로 내 시야 끝까지 뻗쳐 있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군기를 들고 있는 부대들로 나뉘어 있었다. 맨앞에 있는 부대들은 교만, 자기 의, 존엄, 야욕, 불의한 판단, 그리고 질투와 같은 깃발들 아래서 진군하였다.
나의 시야 너머에도 훨씬 더 많은 악의 군대들이 있었지만, 지옥에서 나온 이 끔직한 선봉대가 가장 강력해 보였다. 이 군대의 대장은 바로 "형제들의 참소자"였다.
이 군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칼의 이름은 협박이었고, 창은 배반, 그리고 화살들은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 등이었다. 이 군대의 주 공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초대로 거절, 앙심 ,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 앞서 나가 있었다.
작은 전초대는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더 큰 부대 못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그들은 오직 전략적인 이유로 소규모였을 뿐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혼자였지만, 군중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들 소수 마귀 중대들도 "무리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특별한 악의 권세를 받았다.
앙심이라는 마귀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종족이나 문화 전체에 그의 독을 뿌릴 수 있었다.
정욕이라는 마귀 하나는 공연자 한 사람, 영화, 또는 광고 한편에 자기를 밀착시켜 놓고 수많은 대중을 치거나 "정신을 해이시키는" 오염물을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 같이 퍼부어 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뒤를 따라오는 악의 대군을 위한 준비였다.
이 군대는 특히 교회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지만, 공격은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하나님의 역사를 사전 격파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군대의 일차 전략은 가능한 대로 모든 관계, 즉 가 교회들의 상호관계, 성도들과 목사들, 부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 서로간의 모든 관계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 정찰병들은 교회들과 가정들 그리고 각 개인들 안에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면 거절, 앙심, 정욕과 같은 것들이 이를 이용하고 틈새를 더욱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뒤따라 온 수많은 부대들이 이 틈새를 통해 밀어닥치고 희생자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 받을마하고 또한 세련된데다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의 양심을 다둑거리기 위하여 기독교의 진리는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두움의 세력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어둠의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때 그들에게 배속된 마귀들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이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이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 이상의 귀신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마귀 중 하나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두목의 성깔은 그가 속해 있는 부대를 드러냇다. 모든 부대들이 함께 진군해 가고 있었으나 동시에 모든 군대가 혼란 직전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예를 들자면 미움의 마귀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했다. 질투의 마귀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 마귀 떼의 우두머리들이 마귀들간에 싸움을막는 유일한 방도는 그들의 미움, 질투 같은 것들을 그들이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주 싸움질을 했다.
나는 바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군대들이 결국 자기들끼리 스스로 싸워 파멸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에 대적한 그들의 목적이 방해받았을 때 그들의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결국 서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마귀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마귀들을 털어내려면 단지 그들의 마귀들과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예컨대, 질투라는 마귀가 올라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질투에 대해서 반문만 해도 그 마귀는 금방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힘이 약해지는 마귀는 고함을 질렀고, 부대의 우두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주위에 잇는 모든 마귀들에게 집중 공격 지시를 내려 다시 앙심 등과 같은 마귀들이 그 사람 위에 대신 자리를 잡곤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귀들은 앙심, 고소 등이 합리화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왜곡해 인용하기 시작했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만큼만 속이고 있었다. 이것은 왜냐하면 "자기 의"라는 군기는 거의 모든 병졸들이 들고 있어 막상 행군 중인 자들은 부대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군기를 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멀리 이 군대의 후위를 바라보니 바로 "참소자"의 측근들이 보였다. 나는 그의 전략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 단순함에 놀랐다. 그는 분쟁이 난 집은 온전히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군대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잇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임수에 빠진 신자들이 "고소자"에게 복종하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군대가 전진해 나가면서, 그의 확신과 그의 모든 지휘관들의 확신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이 군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방식에 얼마만큼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의 시야 너머에도 훨씬 더 많은 악의 군대들이 있었지만, 지옥에서 나온 이 끔직한 선봉대가 가장 강력해 보였다. 이 군대의 대장은 바로 "형제들의 참소자"였다.
이 군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칼의 이름은 협박이었고, 창은 배반, 그리고 화살들은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 등이었다. 이 군대의 주 공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초대로 거절, 앙심 ,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 앞서 나가 있었다.
작은 전초대는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더 큰 부대 못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그들은 오직 전략적인 이유로 소규모였을 뿐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혼자였지만, 군중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들 소수 마귀 중대들도 "무리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특별한 악의 권세를 받았다.
앙심이라는 마귀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종족이나 문화 전체에 그의 독을 뿌릴 수 있었다.
정욕이라는 마귀 하나는 공연자 한 사람, 영화, 또는 광고 한편에 자기를 밀착시켜 놓고 수많은 대중을 치거나 "정신을 해이시키는" 오염물을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 같이 퍼부어 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뒤를 따라오는 악의 대군을 위한 준비였다.
이 군대는 특히 교회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지만, 공격은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하나님의 역사를 사전 격파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군대의 일차 전략은 가능한 대로 모든 관계, 즉 가 교회들의 상호관계, 성도들과 목사들, 부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 서로간의 모든 관계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 정찰병들은 교회들과 가정들 그리고 각 개인들 안에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면 거절, 앙심, 정욕과 같은 것들이 이를 이용하고 틈새를 더욱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뒤따라 온 수많은 부대들이 이 틈새를 통해 밀어닥치고 희생자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 받을마하고 또한 세련된데다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의 양심을 다둑거리기 위하여 기독교의 진리는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두움의 세력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어둠의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때 그들에게 배속된 마귀들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이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이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 이상의 귀신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마귀 중 하나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두목의 성깔은 그가 속해 있는 부대를 드러냇다. 모든 부대들이 함께 진군해 가고 있었으나 동시에 모든 군대가 혼란 직전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예를 들자면 미움의 마귀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했다. 질투의 마귀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 마귀 떼의 우두머리들이 마귀들간에 싸움을막는 유일한 방도는 그들의 미움, 질투 같은 것들을 그들이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주 싸움질을 했다.
나는 바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군대들이 결국 자기들끼리 스스로 싸워 파멸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에 대적한 그들의 목적이 방해받았을 때 그들의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결국 서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마귀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마귀들을 털어내려면 단지 그들의 마귀들과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예컨대, 질투라는 마귀가 올라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질투에 대해서 반문만 해도 그 마귀는 금방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힘이 약해지는 마귀는 고함을 질렀고, 부대의 우두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주위에 잇는 모든 마귀들에게 집중 공격 지시를 내려 다시 앙심 등과 같은 마귀들이 그 사람 위에 대신 자리를 잡곤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귀들은 앙심, 고소 등이 합리화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왜곡해 인용하기 시작했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만큼만 속이고 있었다. 이것은 왜냐하면 "자기 의"라는 군기는 거의 모든 병졸들이 들고 있어 막상 행군 중인 자들은 부대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군기를 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멀리 이 군대의 후위를 바라보니 바로 "참소자"의 측근들이 보였다. 나는 그의 전략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 단순함에 놀랐다. 그는 분쟁이 난 집은 온전히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군대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잇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임수에 빠진 신자들이 "고소자"에게 복종하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군대가 전진해 나가면서, 그의 확신과 그의 모든 지휘관들의 확신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이 군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방식에 얼마만큼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귀의 군대는 엄청난 규모로 내 시야 끝까지 뻗쳐 있었다. 그것은 각기 다른 군기를 들고 있는 부대들로 나뉘어 있었다. 맨앞에 있는 부대들은 교만, 자기 의, 존엄, 야욕, 불의한 판단, 그리고 질투와 같은 깃발들 아래서 진군하였다. 나의 시야 너머에도 훨씬 더 많은 악의 군대들이 있었지만, 지옥에서 나온 이 끔직한 선봉대가 가장 강력해 보였다. 이 군대의 대장은 바로 "형제들의 참소자"였다.
이 군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칼의 이름은 협박이었고, 창은 배반, 그리고 화살들은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 등이었다. 이 군대의 주 공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초대로 거절, 앙심 ,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 앞서 나가 있었다.
작은 전초대는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더 큰 부대 못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그들은 오직 전략적인 이유로 소규모였을 뿐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혼자였지만, 군중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들 소수 마귀 중대들도 "무리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특별한 악의 권세를 받았다.
앙심이라는 마귀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종족이나 문화 전체에 그의 독을 뿌릴 수 있었다. 정욕이라는 마귀 하나는 공연자 한 사람, 영화, 또는 광고 한편에 자기를 밀착시켜 놓고 수많은 대중을 치거나 "정신을 해이시키는" 오염물을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 같이 퍼부어 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뒤를 따라오는 악의 대군을 위한 준비였다.
이 군대는 특히 교회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지만, 공격은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하나님의 역사를 사전 격파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군대의 일차 전략은 가능한 대로 모든 관계, 즉 가 교회들의 상호관계, 성도들과 목사들, 부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 서로간의 모든 관계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 정찰병들은 교회들과 가정들 그리고 각 개인들 안에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면 거절, 앙심, 정욕과 같은 것들이 이를 이용하고 틈새를 더욱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뒤따라 온 수많은 부대들이 이 틈새를 통해 밀어닥치고 희생자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 받을마하고 또한 세련된데다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의 양심을 다둑거리기 위하여 기독교의 진리는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두움의 세력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어둠의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때 그들에게 배속된 마귀들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이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이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 이상의 귀신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마귀 중 하나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두목의 성깔은 그가 속해 있는 부대를 드러냇다. 모든 부대들이 함께 진군해 가고 있었으나 동시에 모든 군대가 혼란 직전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예를 들자면 미움의 마귀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했다. 질투의 마귀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 마귀 떼의 우두머리들이 마귀들간에 싸움을막는 유일한 방도는 그들의 미움, 질투 같은 것들을 그들이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주 싸움질을 했다.
나는 바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군대들이 결국 자기들끼리 스스로 싸워 파멸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에 대적한 그들의 목적이 방해받았을 때 그들의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결국 서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마귀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마귀들을 털어내려면 단지 그들의 마귀들과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예컨대, 질투라는 마귀가 올라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질투에 대해서 반문만 해도 그 마귀는 금방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힘이 약해지는 마귀는 고함을 질렀고, 부대의 우두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주위에 잇는 모든 마귀들에게 집중 공격 지시를 내려 다시 앙심 등과 같은 마귀들이 그 사람 위에 대신 자리를 잡곤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귀들은 앙심, 고소 등이 합리화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왜곡해 인용하기 시작했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만큼만 속이고 있었다. 이것은 왜냐하면 "자기 의"라는 군기는 거의 모든 병졸들이 들고 있어 막상 행군 중인 자들은 부대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군기를 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멀리 이 군대의 후위를 바라보니 바로 "참소자"의 측근들이 보였다. 나는 그의 전략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 단순함에 놀랐다. 그는 분쟁이 난 집은 온전히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군대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잇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임수에 빠진 신자들이 "고소자"에게 복종하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군대가 전진해 나가면서, 그의 확신과 그의 모든 지휘관들의 확신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이 군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방식에 얼마만큼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군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칼의 이름은 협박이었고, 창은 배반, 그리고 화살들은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 등이었다. 이 군대의 주 공경을 준비하기 위하여 전초대로 거절, 앙심 ,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 앞서 나가 있었다.
작은 전초대는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그 뒤를 따르는 더 큰 부대 못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그들은 오직 전략적인 이유로 소규모였을 뿐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혼자였지만, 군중들에게 주님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특별한 기름부으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들 소수 마귀 중대들도 "무리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특별한 악의 권세를 받았다.
앙심이라는 마귀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여러 종족이나 문화 전체에 그의 독을 뿌릴 수 있었다. 정욕이라는 마귀 하나는 공연자 한 사람, 영화, 또는 광고 한편에 자기를 밀착시켜 놓고 수많은 대중을 치거나 "정신을 해이시키는" 오염물을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 같이 퍼부어 버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뒤를 따라오는 악의 대군을 위한 준비였다.
이 군대는 특히 교회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지만, 공격은 닥치는 대로 아무에게나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하나님의 역사를 사전 격파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군대의 일차 전략은 가능한 대로 모든 관계, 즉 가 교회들의 상호관계, 성도들과 목사들, 부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심지어 어린이 서로간의 모든 관계에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 정찰병들은 교회들과 가정들 그리고 각 개인들 안에 있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그러면 거절, 앙심, 정욕과 같은 것들이 이를 이용하고 틈새를 더욱 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뒤따라 온 수많은 부대들이 이 틈새를 통해 밀어닥치고 희생자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이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 받을마하고 또한 세련된데다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은 스스로 의 양심을 다둑거리기 위하여 기독교의 진리는 고백하지만 실제의 삶은 어두움의 세력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어둠의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때 그들에게 배속된 마귀들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이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했다.
이들 대부분의 신자들은 하나 이상의 귀신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마귀 중 하나가 지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히 보였다. 두목의 성깔은 그가 속해 있는 부대를 드러냇다. 모든 부대들이 함께 진군해 가고 있었으나 동시에 모든 군대가 혼란 직전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예를 들자면 미움의 마귀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했다. 질투의 마귀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있었다. 이 마귀 떼의 우두머리들이 마귀들간에 싸움을막는 유일한 방도는 그들의 미움, 질투 같은 것들을 그들이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자주 싸움질을 했다.
나는 바로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러 온 군대들이 결국 자기들끼리 스스로 싸워 파멸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이스라엘에 대적한 그들의 목적이 방해받았을 때 그들의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어 결국 서로 자기들끼리 싸움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마귀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마귀들을 털어내려면 단지 그들의 마귀들과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예컨대, 질투라는 마귀가 올라타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질투에 대해서 반문만 해도 그 마귀는 금방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힘이 약해지는 마귀는 고함을 질렀고, 부대의 우두머리는 그리스도인의 주위에 잇는 모든 마귀들에게 집중 공격 지시를 내려 다시 앙심 등과 같은 마귀들이 그 사람 위에 대신 자리를 잡곤 하였다. 만일 이렇게 잘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마귀들은 앙심, 고소 등이 합리화될 수 있도록 성경 말씀을 왜곡해 인용하기 시작했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만큼만 속이고 있었다. 이것은 왜냐하면 "자기 의"라는 군기는 거의 모든 병졸들이 들고 있어 막상 행군 중인 자들은 부대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군기를 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멀리 이 군대의 후위를 바라보니 바로 "참소자"의 측근들이 보였다. 나는 그의 전략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것이 너무 단순함에 놀랐다. 그는 분쟁이 난 집은 온전히 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군대는 교회에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잇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임수에 빠진 신자들이 "고소자"에게 복종하여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을 지배하는 그의 힘은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군대가 전진해 나가면서, 그의 확신과 그의 모든 지휘관들의 확신은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이 군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의 방식에 얼마만큼 동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복 있는 사람의 생활의 열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1:17)
그래서 어떻게 하여 이 포도나무에는 다른 포도나무보다 맛있는 열매가 맺히는지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리도 마침내 이 포도나무의 뿌리가 테임즈 강 밑바닥에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뿌리가 강 밑에 뻗어있으므로 웬만큼 가물어도 수분을 충분히 빨아들일 수 있었고 또한 다음 곳보다 더 많은 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겉 보기에는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과 삶의 철학과 신앙의 뿌리가 하늘 보좌에까지 뻗어 있으므로,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지진이 나며 기근이 다가오고 이 세상에 변혁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 이와 같은 기적이 나타나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풍수지리설에서의 자연환경을 통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죄를 좇지 아나하고,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야웨)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그가 사는 곳 마다 복이 넘치도록 쏟아지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1, 32)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의 테임즈 강변에 재판소가 있었는데 이 재판소의 뜰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열리는 포도가 영국에서 가장 맛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식물 학자들이 그 포도나무를 번식시켜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 조사를 해보니 다른 포도나무와 조금 다른 점이 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여 이 포도나무에는 다른 포도나무보다 맛있는 열매가 맺히는지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그리도 마침내 이 포도나무의 뿌리가 테임즈 강 밑바닥에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뿌리가 강 밑에 뻗어있으므로 웬만큼 가물어도 수분을 충분히 빨아들일 수 있었고 또한 다음 곳보다 더 많은 양분을 섭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겉 보기에는 여느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상과 삶의 철학과 신앙의 뿌리가 하늘 보좌에까지 뻗어 있으므로,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지진이 나며 기근이 다가오고 이 세상에 변혁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으며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 이와 같은 기적이 나타나게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풍수지리설에서의 자연환경을 통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죄를 좇지 아나하고,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야웨)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 앞에 복 있는 사람이 되면, 그가 사는 곳 마다 복이 넘치도록 쏟아지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1, 32)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복 있는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만나가 내리고, 메추라기가 날아오며, 바위가 갈라져 생수가 넘쳐 흐르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풍성한 기적의 열매를 맺어 여러분 자신이 복을 누리고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시냇가에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형통하리로다”(시편 1:3)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 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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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아름다운 보고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늘의 보고를 열어 복을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하늘의 보고를 열고 복을 주십니다.첫째 우리가 회개할 때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가 열립니다. 비록 우리들이 죄짓고 불의하고 추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총과 함께 복이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가 열립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혹은 양심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늘의 보고가 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심을 때 하늘의 보고가 열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보물을 얻기 위해 하늘에 부지런히 쌓아야 합니다.
- 기도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오늘도 복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며 순종하는 우리 가족이 되어 하늘의 복을 받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3/18/2011
세 종류의 만남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선(生鮮)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影響)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嫉妬)하고
싸우고 원한(怨恨)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腐敗)한 냄새를 풍깁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香氣)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肉體)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열흘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셋째,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祝賀)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渡來)하는 날
주님께서도 우리 눈물을
닦아주신다 하셨습니다.
복있는 그리스도인
생선(生鮮)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첫째, 생선 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影響)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嫉妬)하고
싸우고 원한(怨恨)을 남기게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 갈수록
더욱 부패(腐敗)한 냄새를 풍깁니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香氣)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모든 육체(肉體)는 풀과 같습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열흘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사랑은 풋사랑입니다.
셋째,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있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祝賀)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나 목자와 성도의 만남은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渡來)하는 날
주님께서도 우리 눈물을
닦아주신다 하셨습니다.
복있는 그리스도인
3/17/2011
은밀한 골방의 능력 7
하나님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계속해서 그분을 구한다면 항상 영의 양식을 풍성히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이사야 65:10).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고프고 결코 만족함이 없이 목자를 찾아 헤매지만 아무 것도 없고 굶주리며 목마르게 합니다. 성경은 그들은 "주릴 것이니라 ... 갈할 것이니라 ...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13절).
"(그러나) 나의 종들은 ... 먹을 것이로되 ... 마실 것이로되 ... 기뻐할 것이로되"(13-14절). 주께 자신의 영혼을 내어놓고 모든 것에서 주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능력, 권위, 영적 능력, 영과 마음의 양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적 휴식과 충만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구할 때 볼 수 있는 능력 즉,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면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시편 69:32).
시편 91편은 많은 신자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전체는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능력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악마의 덫, 공포, 연약함 그리고 재앙에 대항하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 기도로 이겨내고 그 결과를 얻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절에서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하다"는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지존자의 가장 은밀한 곳인 기도의 골방에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루의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은 아마도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역대상 16:11)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깨어 일어나는 모든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대화하십시오. 언제나 그분을 갈망하십시오. 하루의 모든 것을 여러분의 영 안에서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능력을 알게되며 여러분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아멘.
성령님의 임재연습 New Life(새생명) 교회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계속해서 그분을 구한다면 항상 영의 양식을 풍성히 받을 것을 약속하십니다.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이사야 65:10).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고프고 결코 만족함이 없이 목자를 찾아 헤매지만 아무 것도 없고 굶주리며 목마르게 합니다. 성경은 그들은 "주릴 것이니라 ... 갈할 것이니라 ...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13절).
"(그러나) 나의 종들은 ... 먹을 것이로되 ... 마실 것이로되 ... 기뻐할 것이로되"(13-14절). 주께 자신의 영혼을 내어놓고 모든 것에서 주를 구하며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능력, 권위, 영적 능력, 영과 마음의 양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적 휴식과 충만함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구할 때 볼 수 있는 능력 즉,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언 28:5).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면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시편 69:32).
시편 91편은 많은 신자들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여기서 위대한 약속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전체는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가는 원인이 되는 능력의 인도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기도의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악마의 덫, 공포, 연약함 그리고 재앙에 대항하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 기도로 이겨내고 그 결과를 얻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1절에서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거하다"는 "살다"라는 의미입니다. 지존자의 가장 은밀한 곳인 기도의 골방에서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하루의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은 아마도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역대상 16:11)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깨어 일어나는 모든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대화하십시오. 언제나 그분을 갈망하십시오. 하루의 모든 것을 여러분의 영 안에서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능력을 알게되며 여러분의 모든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아멘.
성령님의 임재연습 New Life(새생명) 교회
은밀한 골방의 능력 6
은밀한 골방은 우리의 온 맘을 가지고 나아오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편 119:2)
여러분이 (골방 기도)습관을 가지고 산만함을 닫아버렸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자신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자취와 시련이 사람들 앞에 있음을 알았으며 그들에게 승리의 열쇠를 주었습니다."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여러분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버려 두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도 않으십니다"(30 -31절).
모세는 또한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일을 당하든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트리지 말라. 육으로 되돌아가지 말라. 주께 향하여 기도하며 그를 구할지라! 그분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구하면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골방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내놓는 한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마음, 영혼, 심장 그리고 힘이 하나님께로 닿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이것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에게 그러한 모든 문제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우리가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갈 때 산만케 하는 모든 것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응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은밀한 골방의 능력으로부터 많은 보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히 저에게 성령이 계시하는 보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여호사밧을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역대하 22:9)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를 구했기에 그는 자신의 왕국을 35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온갖 곳에서 공격이 있다해도, 사람들이 여호와를 속히 구하므로 하나님은 적들을 속히 꺽으셨습니다.
혼란이나 혼동이 없이 항상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여호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는 예후에의해 살해되었으며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9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처럼 왕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왕국은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구하는 매일 매일의 습관인 기도의 골방을 갖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가정을 인도할 능력이 없습니다. 악마는 직업, 가족, 관계 등 이 모든 것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 듯이, 은밀한 골방의 능력은 여러분의 삶, 가족, 직업, 교회 안의 모든 혼동과 무질서에 대항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편 119:2)
여러분이 (골방 기도)습관을 가지고 산만함을 닫아버렸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자신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명기 4:29).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자취와 시련이 사람들 앞에 있음을 알았으며 그들에게 승리의 열쇠를 주었습니다."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 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여러분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버려 두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도 않으십니다"(30 -31절).
모세는 또한 경고했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일을 당하든 불평하거나 불만을 터트리지 말라. 육으로 되돌아가지 말라. 주께 향하여 기도하며 그를 구할지라! 그분은 여러분이 전심으로 구하면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골방에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내놓는 한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 즉 마음, 영혼, 심장 그리고 힘이 하나님께로 닿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이것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에게 그러한 모든 문제는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갚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지시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우리가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갈 때 산만케 하는 모든 것을 닫고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응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은밀한 골방의 능력으로부터 많은 보응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히 저에게 성령이 계시하는 보응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여호사밧을 "저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역대하 22:9)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여호와를 구했기에 그는 자신의 왕국을 35년간 다스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이스라엘의 모든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온갖 곳에서 공격이 있다해도, 사람들이 여호와를 속히 구하므로 하나님은 적들을 속히 꺽으셨습니다.
혼란이나 혼동이 없이 항상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그는 여호와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시야는 예후에의해 살해되었으며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라"(9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하시야는 그의 아버지처럼 왕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왕국은 여러분의 가정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구하는 매일 매일의 습관인 기도의 골방을 갖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가정을 인도할 능력이 없습니다. 악마는 직업, 가족, 관계 등 이 모든 것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 듯이, 은밀한 골방의 능력은 여러분의 삶, 가족, 직업, 교회 안의 모든 혼동과 무질서에 대항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은밀한 골방의 능력 5
기도의 골방은 또한 만족스런 시간입니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흠이 있거나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는 어린양을 가지고는 제단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골방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최고의 시간입니까, 정신이 깨어있습니까? 또는 하루를 분주하게 보내고 그분 앞에 눈꺼풀이 무거운 채 지치고 피곤하여 나아오십니까? 여러분이 피곤해서 마음이 부산해진다면, 차라리 "예수님, 오늘밤 기도하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주님과 훨씬 더 나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씀하십시오.
거룩한 것을 기도하기 위해 아침에 그분께 나아오십니까 -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그날 세차를 해야하는 차에 신경이 가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이 기도하는 그곳에 여러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 ....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이사야 56:7).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희생을 드리는 사람은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6절)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드려질 수 있는 유일한 희생입니다! 다리를 절지도 않고, 마지못한 것도 아니며 막판의 의무적인 번제인 졸린 눈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부르짖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주님을 알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인도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를 이해하기 위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원하며 주님을 더욱더 알기 원합니다!"
그러한 희생을 드리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7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고 기쁘고 능력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구약에서, 사람들은 흠이 있거나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는 어린양을 가지고는 제단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골방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십니까? 최고의 시간입니까, 정신이 깨어있습니까? 또는 하루를 분주하게 보내고 그분 앞에 눈꺼풀이 무거운 채 지치고 피곤하여 나아오십니까? 여러분이 피곤해서 마음이 부산해진다면, 차라리 "예수님, 오늘밤 기도하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주님과 훨씬 더 나은 시간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정직하게 말씀하십시오.
거룩한 것을 기도하기 위해 아침에 그분께 나아오십니까 -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은 그날 세차를 해야하는 차에 신경이 가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이 기도하는 그곳에 여러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 ....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이사야 56:7).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희생을 드리는 사람은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6절)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제단에서 드려질 수 있는 유일한 희생입니다! 다리를 절지도 않고, 마지못한 것도 아니며 막판의 의무적인 번제인 졸린 눈으로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부르짖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 제가 오늘 주님을 알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인도하시고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도를 이해하기 위해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원하며 주님을 더욱더 알기 원합니다!"
그러한 희생을 드리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7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고 기쁘고 능력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
“야훼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야훼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시19:7)
하나님의 율법의 총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속에 포함되어 있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전통적으로, 습관적으로, 의식적으로 마지못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위선자이며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나아가 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밤낮으로 생각합니다. 연애하는 남녀를 보십시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상대를 그리워하고 생각합니다.
화가가 꿈 속에서라도 그림 구상을 하고, 음악가가 길을 걸으면서도 멜로디를 읊조리고,사업가가 밥을 먹으면서도 사업을 생각하듯 복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가르침인 성경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도,저녁에 자리에 들어서도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성경이 뽀얗게 먼지가 쌓이도록 내버려 두었고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 버려 말씀이 귀에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던 것이 이제는 성경 말씀이 재미가 있어져 팽개쳤던 성경을 펼쳐서 일기 시작합니다. 모르는 것, 이행할 수 없는 것도 많지만 한 장 두 장 읽어 나가면 전에 체험하지 못하던 즐거움을 맛보게 되어 밤낮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지루하던 목사님의 설교가 꿀맛처럼 달아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율법이 즐거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복 있는 가람의 곁에는 왔을지 모르지만 아직 복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사랑스럽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주야로 묵상하게 되지 않는다면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 부르짖어 성령 충만함을 받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오시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야웨)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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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영수증-
한국에서 선교사 활동하던 선교사가 휴가를 받아 고국으로 돌아가다가 공항 내 토산물 점에서 물건을 구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영수증을 이중으로 발급해 주더랍니다. 세관에 보여 줄 때에는 적은 금액의 영수증을 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교사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공의롭고 정직하게 생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가게 주인에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자기 기만의 껍데기를 벗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 기도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 풍토 가운데서 구별되어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되어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정직한 선한 청지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3/16/2011
은밀한 골방의 능력 4
은밀한 골방은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과 차단된 어떤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구하고 기도하기 위해 자기자신을 하나님과 홀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6). 다시 말해, 네가 골방에 들어갈 때, 문을 닫기 전까지는 기도하지 말라!
이것은 흩어진 마음으로 아버지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마음을 합하지 못하고 떠돌게 하는 온갖 종류의 생각을 차단하십시오. 버려지는 말이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자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친구와 이야기할 때 또는 직장이나 학교에 있을 때 마음이 부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왕의 임재 앞에 나아올 때 "그분은 은밀히 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왜 응답되지 않는지, 왜 승리하지 못하는지를 의아해 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골방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산만해 질 수밖에 없게 문을 열어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냉랭하고 위선적인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여러 시간 동안 초점 없이 그리고 하나님이 듣지 못하게 기관총처럼 되는대로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집중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갈 때, 문을 닫고 전화 코드를 뽑아놓으십시오! 아버지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악마는 여러분이 하늘의 아버지께 마음을 두지 못하도록 방해하러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훈련은 절대로 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분이 은밀히 계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뒤에는 문이 닫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은 맨하탄에 있는 연방 법원하고는 틀립니다. 저는 그 법원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저는 재판관이 소송사건에 얼마나 빠르게 몰입하는지에 놀랐습니다. 법원 속기사가 왔다갔다하고, 법률가들이 이야기하면서 걷고있고 이곳은 소란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재판관은 자주 망치를 두드리면서 방청석을 "조용!"하게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그러한 재난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출두하기 위해 기다리느라 끝없이 늘어서 있지도 않고 여기저기 걷는 산란한 영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뒷문을 닫을 때, 여러분과 아버지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 안에 홀로 있게 되며 그분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시장, 주지사 또는 대통령 앞에서 감히 할 수 없던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도 그렇게 하십니까? 한시간 동안 대통령에게 물어볼 수나 있는지 말해봅시다. 자, 대통령 집무실로 걸어갔을 때, 여러분은 거기서 어리둥절해 하면서 이야기 할 것이며, 아마도 밖에서 테니스를 치고있는 누군가를 쳐다볼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얼마나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구하고자 할 때는 문을 닫으십시오 그리고 아무도, 심지어 산만함도 자만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문자 그대로 문을 닫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집중하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복음 6:6). 다시 말해, 네가 골방에 들어갈 때, 문을 닫기 전까지는 기도하지 말라!
이것은 흩어진 마음으로 아버지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그분께 마음을 합하지 못하고 떠돌게 하는 온갖 종류의 생각을 차단하십시오. 버려지는 말이나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임을 자각하십시오.
여러분은 친구와 이야기할 때 또는 직장이나 학교에 있을 때 마음이 부산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왕의 임재 앞에 나아올 때 "그분은 은밀히 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기도를 합니다. 그들은 왜 응답되지 않는지, 왜 승리하지 못하는지를 의아해 합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들의 골방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산만해 질 수밖에 없게 문을 열어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냉랭하고 위선적인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여러 시간 동안 초점 없이 그리고 하나님이 듣지 못하게 기관총처럼 되는대로 기도하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집중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갈 때, 문을 닫고 전화 코드를 뽑아놓으십시오! 아버지를 구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의 방해"를 받게 됩니다. 악마는 여러분이 하늘의 아버지께 마음을 두지 못하도록 방해하러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훈련은 절대로 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분이 은밀히 계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오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뒤에는 문이 닫혀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은 맨하탄에 있는 연방 법원하고는 틀립니다. 저는 그 법원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저는 재판관이 소송사건에 얼마나 빠르게 몰입하는지에 놀랐습니다. 법원 속기사가 왔다갔다하고, 법률가들이 이야기하면서 걷고있고 이곳은 소란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재판관은 자주 망치를 두드리면서 방청석을 "조용!"하게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그러한 재난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출두하기 위해 기다리느라 끝없이 늘어서 있지도 않고 여기저기 걷는 산란한 영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여러분의 뒷문을 닫을 때, 여러분과 아버지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 안에 홀로 있게 되며 그분의 유일한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시장, 주지사 또는 대통령 앞에서 감히 할 수 없던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도 그렇게 하십니까? 한시간 동안 대통령에게 물어볼 수나 있는지 말해봅시다. 자, 대통령 집무실로 걸어갔을 때, 여러분은 거기서 어리둥절해 하면서 이야기 할 것이며, 아마도 밖에서 테니스를 치고있는 누군가를 쳐다볼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얼마나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구하고자 할 때는 문을 닫으십시오 그리고 아무도, 심지어 산만함도 자만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문자 그대로 문을 닫으십시오. 그리고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의 순종에 집중하십시오!
은밀한 골방의 능력 3
무엇보다도, 은밀한 골방에서 은밀한 골방의 능력이 나온다!
여러분은 골방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실제의 세탁물 골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은밀한 골방"을 갖는 다는 것은 간단히 주를 갈망하고 주를 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재능과 선택된 시간을 드리면서 어느 곳, 어느 때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의 골방"은 "기도의 습관"을 의미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과 홀로 있는 연습을 하고 계십니까? 기도의 골방은 전적으로 연습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성령님이 부를 때 응답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 오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나는 하나님과 홀로 있고싶어, 나는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어!" 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끔 혼자일 때 저의 은밀한 골방은 차안이 되기도 합니다. 집에 있을 때는 종종 저의 서재가 골방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제가 때때로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가는 곳인 펜실바니아의 작은 시골 도로가 되기도 합니다. 뉴욕시의 거리를 걸을 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몇 주전 여러 시간을 거닐었던 플로리다 해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기도의 종류는 그분과 함께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친밀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기도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은밀한 골방에서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과의 극적인 구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선자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고 거룩한 척 연기하는 연기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에 그러한 연기자들이 많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5).
우리의 육체는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지은 우리 육체의 속성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고쳐지거나 죄가 씻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죽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성령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육체는 완전히 벗어지고 죽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사람들이 이것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빼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 마치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위선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 그들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 믿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기도하며 기도 모임에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도의 습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홀로 하는 기도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한 목사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그 목사님은 하루에 8시간을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와! 대단하시다. 그 목사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 목사님을 만났지만 다른 점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저의 생각이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8시간을 기도했다면, 단순히 그의 인격이 변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명백하게, 그가 그들에게 말한 대로 그들은 그의 기나긴 철야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위선자의 기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기도는 잡동사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위선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주님과 매일 함께 하는 연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그리고 식사할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께 아주 짧게 기도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도의 습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위기가 닥쳐서 기도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때 거룩한 분노를 느낍니다, "데이브 형제님,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직업이고 설교자로서 소명을 받았으니까 기도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역자도 아니고 그것에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어요."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습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기도 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또는 되는대로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되는 대로이거나 기도의 습관이 없는 기도에는 결단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복음 6:6),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은밀히 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관심이 부족함을 보시며, 대부분의 시간을 여러분이 필요한 것, 즉 TV앞에서 그리고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신념이나 자신을 잃었을 때 뒤늦게 자성하고 그분께 나아오는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여러분은 골방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실제의 세탁물 골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습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은밀한 골방"을 갖는 다는 것은 간단히 주를 갈망하고 주를 구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재능과 선택된 시간을 드리면서 어느 곳, 어느 때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의 골방"은 "기도의 습관"을 의미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과 홀로 있는 연습을 하고 계십니까? 기도의 골방은 전적으로 연습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성령님이 부를 때 응답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 오게 하는 훈련입니다. 이것은 "나는 하나님과 홀로 있고싶어, 나는 오늘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어!" 라고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끔 혼자일 때 저의 은밀한 골방은 차안이 되기도 합니다. 집에 있을 때는 종종 저의 서재가 골방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제가 때때로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가는 곳인 펜실바니아의 작은 시골 도로가 되기도 합니다. 뉴욕시의 거리를 걸을 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몇 주전 여러 시간을 거닐었던 플로리다 해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기도의 종류는 그분과 함께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친밀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선적인 기도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은밀한 골방에서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과의 극적인 구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선자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려고 거룩한 척 연기하는 연기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에 그러한 연기자들이 많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태복음 6:5).
우리의 육체는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지은 우리 육체의 속성을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고쳐지거나 죄가 씻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죽게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성령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우리의 육체는 완전히 벗어지고 죽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사람들이 이것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점을 빼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 마치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위선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 그들은 여러분이 어느 정도 믿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기도하며 기도 모임에 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도의 습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홀로 하는 기도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한 목사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그 목사님은 하루에 8시간을 기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와! 대단하시다. 그 목사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그 목사님을 만났지만 다른 점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저의 생각이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루에 8시간을 기도했다면, 단순히 그의 인격이 변화되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명백하게, 그가 그들에게 말한 대로 그들은 그의 기나긴 철야에 대해서만 압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위선자의 기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기도는 잡동사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아버지로부터 응답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메시지는 위선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정직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상당수의 신자들이 주님과 매일 함께 하는 연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에서 그리고 식사할 때,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께 아주 짧게 기도합니다. 그들에게는 기도의 습관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위기가 닥쳐서 기도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때 거룩한 분노를 느낍니다, "데이브 형제님,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직업이고 설교자로서 소명을 받았으니까 기도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사역자도 아니고 그것에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어요."
아닙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습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기도 생활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일주일에 한번, 또는 되는대로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되는 대로이거나 기도의 습관이 없는 기도에는 결단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복음 6:6),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은밀히 보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관심이 부족함을 보시며, 대부분의 시간을 여러분이 필요한 것, 즉 TV앞에서 그리고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신념이나 자신을 잃었을 때 뒤늦게 자성하고 그분께 나아오는 여러분을 바라보십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신4:6)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화를 받게 될 때 제일 먼저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모든 행위의 죄책에 눌려 “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답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알게 되고, 그 피로써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내 양심의 죄책을 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를 용서받은 기쁨으로 즐거움에 넘치다가 얼마 있지 아니하여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용서받은 내 속에 아직도 죄의 권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죄악이 아직도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죄를 범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죄성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이와 같은 체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구원하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해 주심을 가리킵니다.
이러므로 옛 아담의 죄성을 가진 내가 그 죄의 성품에 대하여 죽는 도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속에 이미 용서해 놓으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혜를 힘입어 선하게 하려고 하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거듭거듭 실패를 하고 나중에는 과연 자기의 죄의 성품에서 벗어났는지를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우리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고 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옆에 계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로마서 8:2)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오늘의 Daily Bread(http://blog.naver.com/paul_jhkim)
점선(===)이하의 말씀은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전선에서 끊임없이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대적해서 싸워야 하는 적에 대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라’(약 4:7)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심으로 우리는 날마다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기도-
기도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문제도 우리 하나님께서 이미 이겨 놓으신 싸움이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감화를 받게 될 때 제일 먼저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 죄책감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모든 행위의 죄책에 눌려 “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답으로써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알게 되고, 그 피로써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내 양심의 죄책을 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를 용서받은 기쁨으로 즐거움에 넘치다가 얼마 있지 아니하여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것은 용서받은 내 속에 아직도 죄의 권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죄악이 아직도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죄를 범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 죄성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이와 같은 체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구원하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해 주심을 가리킵니다.
이러므로 옛 아담의 죄성을 가진 내가 그 죄의 성품에 대하여 죽는 도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속에 이미 용서해 놓으신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은혜를 힘입어 선하게 하려고 하나 얼마 있지 아니하여 거듭거듭 실패를 하고 나중에는 과연 자기의 죄의 성품에서 벗어났는지를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우리는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고 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 때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옆에 계셔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로마서 8:2)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오늘의 Daily Bread(http://blog.naver.com/paul_jhkim)
점선(===)이하의 말씀은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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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전선에서 끊임없이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대적해서 싸워야 하는 적에 대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라’(약 4:7)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심으로 우리는 날마다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기도-
기도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문제도 우리 하나님께서 이미 이겨 놓으신 싸움이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3/15/2011
은밀한 골방의 능력 2
오늘날, 소수의 목사들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에 기록된 장면은 정확히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목자들이 게으르고 태만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단지 봉급을 받는 직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대신 자신들의 설교를 위해 책과 주석서를 찾으며 자신들의 물질적인 힘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양떼를 먹이고 보호할 힘을 잃었으며 양떼는 흩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강력한 교회를 유지했던 유대감은 현재 해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갈망을 충족하는데 필요한 아주 조금의 것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면서 복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10:20앞)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유대감을 유지했던 하나님의 구속하신 능력의 줄이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20절 중). 무리는 흩어졌습니다!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20절 뒤). 제사장들 가운데는 그러한 부정이 있었으며 누구하나 하나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막에 들어갈 만한 제사장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기술한 목자의 종류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목사들은 담대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셨을 것입니다. 기도가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 내에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파멸했습니다 - 하나님이 외면하셨습니다 - 그분은 게으른 목자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나를 찾는 이가 없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기도가운데 그분을 구하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 차별을 두셨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들 중에 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사실, 예레미야에 기록된 장면은 정확히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목자들이 게으르고 태만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명을 단지 봉급을 받는 직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대신 자신들의 설교를 위해 책과 주석서를 찾으며 자신들의 물질적인 힘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양떼를 먹이고 보호할 힘을 잃었으며 양떼는 흩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강력한 교회를 유지했던 유대감은 현재 해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갈망을 충족하는데 필요한 아주 조금의 것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면서 복음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10:20앞)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유대감을 유지했던 하나님의 구속하신 능력의 줄이 끊어져 없어졌습니다.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20절 중). 무리는 흩어졌습니다!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20절 뒤). 제사장들 가운데는 그러한 부정이 있었으며 누구하나 하나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막에 들어갈 만한 제사장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예레미야가 기술한 목자의 종류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목사들은 담대하고도 구체적으로 기도했을 것이며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셨을 것입니다. 기도가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 내에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파멸했습니다 - 하나님이 외면하셨습니다 - 그분은 게으른 목자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나를 찾는 이가 없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기도가운데 그분을 구하는 신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간에 차별을 두셨습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을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 들 중에 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은밀한 골방의 능력 1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5-6).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구하러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물리적인 골방 이상의 크나큰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나를 찾는 자와 찾지 않는 자!"의 두 개의 범주로 나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주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두 종류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노하셨을 때,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쳤습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오며"(출애굽기 33:7).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중에도 전심으로 주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이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 밖으로 가야함을 알았으며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배교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습니다.
수세기 후에, 아사왕 밑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적들과 평안케 하신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역대하 14:7).
아사가 통치기간 동안, 수 백만 명의 구스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 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11-13절). 아사가 공격받았을 때, 그는 엎드려서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승리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하고 돌아온 후 아사랴 선지자는 아사를 맞아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15:2). 다시 말해 "네가 여호와 찾기를 멈추면, 즉, 그를 열망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멈추면 그분도 너를 버리시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사랴 선지자는 여호와의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왕이 의기양양해지고 악을 행할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구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4절).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과 승리를 전심으로 여호와께 구함으로써 찾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역대하 15:12, 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간구할 때 주어지는 평안을 즐겼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모든 걸 여호와께 의지한 채 주께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는 항상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그들에게 계시와 강성함을 주셨습니다.
웃시야 왕의 기록입니다,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역대하 26:5, 15).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강하게 하셨고 그 왕국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가 형통하여짐에, 왕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웃시야는 그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치를 당하며 살면서 문둥병자로 세상을 마쳤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구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목자들 또한 끊어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예레미야 10:21).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구하러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물리적인 골방 이상의 크나큰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나를 찾는 자와 찾지 않는 자!"의 두 개의 범주로 나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은 '은밀한 기도의 골방에서 주를 찾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의 두 종류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우상숭배에 대해 노하셨을 때, 모세는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쳤습니다. 성서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씀하십니다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오며"(출애굽기 33:7).
이스라엘 자손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중에도 전심으로 주를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이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 밖으로 가야함을 알았으며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배교 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습니다.
수세기 후에, 아사왕 밑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형통케 하시며, 적들과 평안케 하신 이유를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이 땅이 아직 우리 앞에 있나니 우리가 이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주위에 성곽과 망대와 문과 빗장을 만들자 우리가 주를 찾았으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느니라 하고 이에 저희가 성읍을 형통하게 건축하였더라"(역대하 14:7).
아사가 통치기간 동안, 수 백만 명의 구스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 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 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 여호와 앞에서와 그 군대 앞에서 패망하였음이라"(11-13절). 아사가 공격받았을 때, 그는 엎드려서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승리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하고 돌아온 후 아사랴 선지자는 아사를 맞아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15:2). 다시 말해 "네가 여호와 찾기를 멈추면, 즉, 그를 열망하고 그의 이름 부르기를 멈추면 그분도 너를 버리시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아사랴 선지자는 여호와의 놀라운 인도하심으로 왕이 의기양양해지고 악을 행할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구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가서 찾으매 저가 그들의 만난 바가 되셨나니"(4절).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과 승리를 전심으로 여호와께 구함으로써 찾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역대하 15:12, 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간구할 때 주어지는 평안을 즐겼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모든 걸 여호와께 의지한 채 주께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는 항상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그들에게 계시와 강성함을 주셨습니다.
웃시야 왕의 기록입니다,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역대하 26:5, 15).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강하게 하셨고 그 왕국에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가 형통하여짐에, 왕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웃시야는 그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치를 당하며 살면서 문둥병자로 세상을 마쳤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구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목자들 또한 끊어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예레미야 10:21).
두가지 고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16)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태어났고 고난 속에서 살다가 고난 속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받아야 할 고난과 받지 않아야 될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지 않아야 할 고난 중의 첫째는 죄악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자기 자신을 분열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이 죄로 인하여 고난받은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죄값을 청산하셨습니다.
둘째는 병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질병으로 고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오셔서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자를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유없이 가난하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우주, 땅 위의 오곡백과를 다 가지신 부요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요하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적이 결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이유도 없이 실패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쁘게 받아야 할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축복을 끼치기 위해, 남에게 위대한 구속의 은총을 전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을 때 받는 고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고난으로 열 두 제자가 순교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주의 복음을 위하여 필요한 고난이므로 하나님께서도 도와 주시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죄와 질병과 가난과 실패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 말되 주의 복음을 위하여는 감사함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전서 4:14)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
-악을 제하라-
악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성장력과 전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방치해 놓으면 암세포가 순식간에 자라나 퍼지듯 갑자기 커지고 확산되어 주변을 물들입니다. 때문에 악은 애초에 그 싹을 잘라 버리고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흔히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다고해서 매를 들지 않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때때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무서운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우리 속에서 죄의 법과 성령의 법이 매일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있기에 우리가 죄의 법 아래로 끌려 내려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능으로 이 죄를 이길 수가 없사오니 오직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이기도록 성령님이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 태어났고 고난 속에서 살다가 고난 속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받아야 할 고난과 받지 않아야 될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지 않아야 할 고난 중의 첫째는 죄악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자기 자신을 분열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이 죄로 인하여 고난받은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죄값을 청산하셨습니다.
둘째는 병으로 오는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질병으로 고난 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오셔서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자를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 받아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유없이 가난하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풍부한 자원과 아름다운 우주, 땅 위의 오곡백과를 다 가지신 부요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요하게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적이 결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이유도 없이 실패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쁘게 받아야 할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축복을 끼치기 위해, 남에게 위대한 구속의 은총을 전하기 위해, 내가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을 때 받는 고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고난으로 열 두 제자가 순교했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주의 복음을 위하여 필요한 고난이므로 하나님께서도 도와 주시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죄와 질병과 가난과 실패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 말되 주의 복음을 위하여는 감사함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베드로전서 4:14)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jhkim)
-악을 제하라-
악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성장력과 전염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방치해 놓으면 암세포가 순식간에 자라나 퍼지듯 갑자기 커지고 확산되어 주변을 물들입니다. 때문에 악은 애초에 그 싹을 잘라 버리고 뿌리를 뽑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흔히 자식이 사랑스럽고 귀엽다고해서 매를 들지 않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때때로 악을 제거하기 위한 무서운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우리 속에서 죄의 법과 성령의 법이 매일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있기에 우리가 죄의 법 아래로 끌려 내려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능으로 이 죄를 이길 수가 없사오니 오직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이기도록 성령님이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
3/14/2011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한 여성이 많은 괴로움을 품고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일까 하고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정원사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 너는 네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느냐?
너는 너 자신에게 임해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네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로 고통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정원사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 두고, 써레질과 경
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뿐이란다.
너는 내가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면서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정원사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이다지도 오랫동안 나는 왜 그렇게도 어두웠던 것일까!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당신은 내 인생에 이러한 시련들이 임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시련들에 의해서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의해 내가 더욱 유용한 그릇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만일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주님께 간구 하옵나니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시옵소서!"
캐더린 쿨만 “위대한 항해사는 거친 바다에서 만들어집니다.” 중에서...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하면서 포도원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 포도밭은 가을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정원사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 너는 네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느냐?
너는 너 자신에게 임해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네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로 고통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정원사가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 두고, 써레질과 경
작을 멈추는 것은 그가 그 포도나무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을 때 뿐이란다.
너는 내가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가지치기를 그만두고, 경작을 그만두고, 써레질도 그만두고, 너에게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로 할 것이다."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면서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하늘 정원사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이다지도 오랫동안 나는 왜 그렇게도 어두웠던 것일까!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당신은 내 인생에 이러한 시련들이 임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시련들에 의해서 나는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에 의해 내가 더욱 유용한 그릇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만일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주님께 간구 하옵나니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시옵소서!"
캐더린 쿨만 “위대한 항해사는 거친 바다에서 만들어집니다.” 중에서...
사랑의 시련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가지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사랑은 반드시 시련을 겪어야 합니다. 그 시련이 사랑의 불길을 끄려고 폭풍처럼 다가옵니다. 우리의 사랑이 온실 속의 꽃처럼 연약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 뒤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영광이 다가오고 우리는 그 가운데서 기뻐하게 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가정에 사랑을 심어 주시고 떠나신 뒤에 시련이 다가와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두 동생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편을 통하여 예수님에게 급히 오시라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날만 학수고대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오시지 않고 이제까지 믿고 의지하였던 오라버니 나사로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가정에 다시 절망이 다가왔습니다. 회의가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소식을 받으시고도 우리를 이렇게 버려둘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라버니를 장사지낸 두 자매에게는 삶의 목표가 의미가 없는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후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화를 통하여 사랑은 과거나 미래나 아니고 바로 현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그리고 무덤으로 가셔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시며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만드시는 현재의 예수님이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시련을 통하여 바로 이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며 변치 않으십니다.
비록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칠흑같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구름 위의 햇빛처럼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을 버리고 현재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도록 하는 훈련이며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비록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칠흑같이 어두울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구름 위의 햇빛처럼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을 버리고 현재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도록 하는 훈련이며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4:12,13)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 jhkim)에서 다시 보실수 있습니다.
오늘의 Daily Bread는 (http://blog.naver.com/paul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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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유월절-
이스라엘의 출애굽 장면은 성도들이 죄악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향하는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으로 향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나요?
먼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살아야 합니다. 즉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와 허물을 대속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육에 새로운 힘을 얻어 힘차게 천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 기도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 오늘도 예수님의 피를 몸과 마음에 바릅니다. 모든 재앙이 떠나가게 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승리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사는 우리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2)
<순복음신문 “오늘의 묵상”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13/2011
영적 교만을 피하십시요-조나단 에드워드
"겸손만큼 한 사람을 사단의 손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은 없다."(Edwards)
우리 시대에 있어서 가장 편만하면서도 가장 으뜸으로 사악한 오류는 영적 교만이다. 이 문을 통해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심히 바라는 신자의 마음에 들어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부터 올라오는 연기는 이 통로를 통해 마음을 검게하며,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 손잡이를 이용해 사단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게끔 만든다. 이 질병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모든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너무나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너무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높은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다. 교만의 본질은 바로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으로 배재해 버린다는 것이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 층을 마음속에 이룬다 - 한 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시26:2; 139:23; 계2:23).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잠28:26).
영적 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한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한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조사하며 궁구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의 비꼬는 태도이며, 수많은 신자들의 거룩함에 반대한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한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우며 자신의 영적인 냉담함을 탓하고 남들은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줄로 여긴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한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 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을 향한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 됨과 천함에 대해 압도되어 있다. 자신의 동료 크리스챤들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사랑과 겸손의 마음을 담고 있으며, 타인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한량없는 상냥함과 겸손으로 대한다.
영적인 교만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외면적으로 다르게 행동하게 하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게 하고 표정과 행동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겸손한 크리스챤은 비록 자신의 세상에서의 의무에 충실할 것이지만 홀로 천국을 향해 걸어간다. 온 세상이 그를 저버린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구별을 위한 구별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자신을 의도적으로 구별되게 보이도록, 그렇게 나타나도록 따로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의 나중이 되려하며, 양보하고, 따르고 순종하고자 하며 죄를 제외한 모든 일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갖는다(에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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